패션 화보

이불이 조각낸 세계

2017.12.26

by VOGUE

    이불이 조각낸 세계

    이불의 레이디 디올은 산산이 부서진 거울 같다. 전 세계 아티스트들이 레이디 디올 을 재해석하는 프로젝트에서, 이불은 또 한번 기성 세계를 부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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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스오디브 디올 4층에서 만난 이불 작가는 은발을 동여매고 있었다. 한 번에 마구 묶은 모양새다. 그녀가 재해석한 레이디 디올과 관련 작품의 전시가 열린다는 보도 자료에서는 은발의 쇼트커트였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요. 젊은가 봐.” 이불 작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내 작업복겸 외출복이지.” 가슴에는 펜과 두 개의 안경이 들어 있다. 하나는 돋보기, 하나는 시력 보정 안경이다. 뭐 그런 것까지 묻나 싶지만, 이불은 그런 질문에선 답이 빠르다. 작품 세계나 해석에 관해서는 망설인다. 아예 답할 의도가 없을 수도.

    이불이 1987년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괴물을 연상케 하는 천을 두르고 도쿄를 걸어 다닌 ‘수난유감 – 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알아?’(1990)을 선보일 때부터도 주관적인 비평은 있지만 그녀의 입을 통한 작품 설명은 찾기 힘들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해석은 관객에게 자유롭게 맡긴다는 대답을 자주 합니다. 설명하자면 한없이 길어지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늘 레이디 디올처럼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는 순간 수많은 목격과 평가가 이루어지기에 때론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지 않을까. “저는 비판과 찬사를 극복하지 않습니다. 비판은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찬사는 감사히 여깁니다. 그리고 (감사히 여기지 못할 비평에 대해선) 우리가 노화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웃음)

    이불은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베니스 비엔날레, 파리 퐁피두센터, 도쿄 모리미술관 등 해외 유수 미술관에서 전시를 이어갔고,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미술계에서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 작가가 되었다.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특별상(1999), 석주미술상(2002),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2016) 등도 수상했다. 하지만 이런 이력은 이불을 얘기할 때 중요하지 않다. 2016년 여름, DDP에서 열린 전시 <에스프리 디올 – 디올 정신>에서 향수 ‘미스 디올’을 주제로 작품을 선보였을 때, 상업적인가 아닌가의 논점도 진부하게 만든 작가이지 않은가. 당시 설치 작품은, 향수가 공중에 사라지며 자기 존재를 드러내듯이, 거울 조각마다 다르게 비추는 자신의 모습을 아이덴티티가 분해되어 반짝이듯이 표현했다. 그래도 브랜드와의 협업에선 작가의 자유의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브랜드와의 협업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협업을 고려할 때는 상당히 까다롭게 접근하죠. 제 작품 세계에 제한을 줄 거라 판단되면 진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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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은 올해에도 디올과 협업했다. 디올은 2016년 소수의 영국 및 미국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레이디 디올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제작했고, 그 성공에 힘입어 올해 더 다양한 출신과 연령대의 아티스트 10인과 작업을 진행했다. 이들은 모든 권한을 아티스트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1994년 공방에서 만들 때부터 레이디 디올이 가진 품위, 예를 들어 가방의 카나주 스티치, 패딩 가죽 쿠션, 대칭적인 각면 패턴, 실버 혹은 도금 소재의 참 장식은 너무 상징적이다. 이전의 향수 미스 디올을 주제로 한 설치 작품과 달리 레이디 디올이 가진 상징적인 이미지와 가방이라는 기능성이 작업에 조금이라도 제약이 되지 않았을까?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상은 예술 작품이 추구하는 이상을 넘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가방 그 자체를 재해석해서 디자인하지 않습니다. 레이디 디올의 가방 고유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떻게 작업으로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해 모색했습니다.” 이불은 이렇게 답했다.

    이번 레이디 디올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플렉시글라스 미러라는 소재다. “플렉시글라스 미러라는 재료를 선택한 이유는 거울, 즉 반사재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일상생활에서의 안전이나 실용성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때문이죠.” 이불은 2000년대 들어 이번처럼 무언가를 투영시키고, 은색의 차가운 거울을 연상시키는 소재를 자주 차용해왔다. “맞습니다. 작품의 재료로서 거울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중반이죠. ‘나의 거대 서사(Mon Grand Récit)’라는 작업을 하면서부터예요. 거울은 재료 그 자체로서 강력한 성질이 있음에도 끊임없이 외부를 ‘반영’함으로써 순간의 리얼리티를 시각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렇기에 작업에서 ‘재현’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거울을 자주 활용해요.” 그녀에게 소재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물었다. “재료는 작품의 구성, 의도와 마찬가지로 작품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그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어느 하나가 빠지더라도 작품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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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올은 이 독특한 소재와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 60여 번의 시도를 거친다. 그 과정 속에서 이불의 선택은 “가장 익스트림한 것”이다. “디자인 단계 중에 디올 하우스에서 가방의 외부 재료 테스트 샘플을 보내왔어요. 그 샘플 중에서 가장 실현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제 선택 때문에 디올 하우스에서 꽤 많은 과정을 거쳤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번 레이디 디올을 ‘상품’으로 받아들일 확률도 크다. 많은 이들이 “백이 아름다워서”라고 시각적인 접근을 하고 소유하길 욕망할 것이다. 디올과 이불 모두 브랜드와 작품 세계의 확장을 염두에 뒀지만 말이다.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아름다운 소비재’로 읽힐 거란 두려움은 없을까. “두렵지 않습니다. 작품이 드러내야 하는 여러 모습 중에서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제 의도 중 하나일 때만 작품을 아름답게 제작하니까요.” 이불은 레이디 디올과 더불어, 이를 형상화한 작품 네 점을 따로 제작했다. 플렉시글라스 미러가 산산조각이 나거나 자유롭게 춤추듯 휘어진 설치 작품이다. 이 역시 하우스오브디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불을 직접 만나면 처음엔 부드러움에 놀란다. 작품과 명성에 비하면 부드러운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내가 사진발을 잘 받네요” 같은). 하지만 이불은 “두렵지 않습니다”라는 단언을 자주 하는 모습처럼 끊임없는 탐구와 자기 확신에서 오는 당당함을 갖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아우라라 부른다. 그런 작가도 한계를 생각했을까. 그만큼 몸서리치는 일이 있을까. 이불은 누군가의 말을 빌렸다며 단언한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제 삶의 무언가를 바꾸거나 변화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LEE JI H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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