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on Says
프랑스 출신의 새로운 패션 신동이 나타났다. 세상은 그를 ‘시몽 포르트 자크무스’ 라고 부른다.
“정확히 2시간 40분이요.” 급행열차가 아비뇽(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그의 고향 마을 말레모르 근처의 도시)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파리 리옹 역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을 때, 시몽 포르트 자크무스(Simon Porte Jacquemus)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자크무스의 두 가족을 하나로 연결하는 슬픔과 기쁨, 승리와 재능의 거리를 시계만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28세의 이 패션 디자이너에게 TGV는 철도일 뿐 아니라 생명선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가 성장한 마을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그의 생물학적 친척들과 그가 파리의 가족이라고 부르는 무리를 연결해주는 생명선 말이다. 오늘 우리는 이 무리와 함께 파리 생마르탱 운하 바로 건너편에 있는 자크무스의 스튜디오에서 몇 블록 떨어진 작은 식당에 앉아 술을 곁들인 점심을 먹고 있다. 레드 와인이 넘쳐나고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서로를 놀린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크무스와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그들은 그의 파리 생활 초창기부터 그를 지원하고 격려해온 사람들로, 여기에는 모델이자 인플루언서인 잔느 다마스도 포함돼 있다. 오늘 그녀의 유명한 입(그녀의 도톰한 입술은 인스타그램의 전설이다)은 레어 비프 요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자크무스는 다마스와 여기에 모인 거의 모든 사람들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처음 만났다. 그에게 소셜 미디어는 일종의 제2의 가족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현재 그는 바스티유에 아파트를 갖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시간을 말레모르에서 보낸다. 적어도 상상 속에서는 말이다. 비어 있는 수영장에서 친구들(모델로 등장한)과 함께 선보인 획기적인 첫 컬렉션 2014 S/S 이후 자크무스는 자신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패션쇼에 곧바로 쏟아부으면서 추억과 씨름해왔다.
그 후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이 빛의 도시의 총아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프랑스 패션이라는 하늘에 떠오른 신인들 중 가장 반짝이는 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그가 혼자 힘으로 시작한 사업체는 현재 3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관습에 저항함으로써(한순간도 기업 후원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친구들의 얘기와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 모든 것을 해냈다. 구식으로(학위를 받고, 메이저 디자이너 밑에서 인턴을 하고, 자신의 레이블을 만들기 위해 서서히 시작하는 식으로) 이 사업에 뛰어드는 대신 자크무스는 자신의 메시지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일련의 장난기 가득한 런웨이 쇼, 그리고 유쾌한 섹시함과 뻔뻔한 셀카를 보여주는 아주 영리한(그리고 390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거느린 엄청나게 인기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이용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서로 연관된 사진 세 장으로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엮어나간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저는 그것이 고전적인 패치워크보다 더 강렬하다고 생각했어요”라고 자크무스는 설명한다.
남프랑스의 햇살은 자크무스의 심장에서 흘러나와 그의 트위스트되고 해체된 셔츠 드레스, 독특한 리넨 코트, 잘록한 허리에 퍼졌을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에는 우울한 터치도 있다. 그가 18세 때 사랑하는 어머니이자 삶의 빛이었던 발레리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래서 2018년 봄 런웨이 쇼를 준비할 때도 그녀는 변함없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는 그저 행복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이번 컬렉션은 어린 시절 추억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됐어요. 해변에 다녀온 후 정말 행복해하던 어머니를 바라보던 기억 같은 것 말입니다.” 월요일 밤 파리 패션 위크의 시작을 알린 그의 쇼는 파니 아르당(Fanny Ardant, 프랑스 배우), 지안카를로 지아메티(Giancarlo Giammetti, 발렌티노의 파트너), 그리고 95세의 피에르 가르뎅 등을 포함한 관객들이 참석하면서 대성공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들 모두 이 신인의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자크무스의 패션 커리어 전체는 어머니의 스타일과 영혼에 바치는 헌사 역할을한다. 열렬한 벼룩시장 팬인 이 디자이너는 약 10년 전 몽마르트르 인근에있는 마르셰 생피에르(Marché Saint-Pierre)를 꿈꾸듯 돌아다니다 커튼 가게에서 재봉사를 보고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저는 그녀에게 스커트를 만들려면 돈이 얼마나 들지 물었어요. 그녀는 150유로라고 하더군요. 저는 100유로에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졸랐어요. 다음 날 저는 패브릭과 스커트 스케치를 들고 그녀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의 첫 컬렉션이 시작되었어요. 아주 즉흥적이고 재미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역사상 첫 스커트는 아니었다. 그와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외할머니 릴린(Liline, 그녀는 손자의 패션쇼에 참석하기 위해 매번 파리에 온다)은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아이였어요. 춤을 추든 멋지게 차려입든 늘 행복했고 미소를 지었죠. 그리고 늘 코스튬 의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 아이는 하고 싶은 일이 1,000가지쯤 되었지만 엄마를 절대 혼자 두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엄마를 위해 커튼으로 스커트를 만들었어요. 제 딸은 그 옷을 입고 학교로 아들을 데리러 갔어요. 그녀는 아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고군분투하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자크무스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다른 나라 출신이길 바란 적이 없었다. “어릴 때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야구 모자를 쓰고 힙합을 들으며 미국인처럼 되고 싶어 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저는 세르주 갱스부르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의 의상은 거의 진부할 정도로 프랑스적이다. 아랫단이 깊이 접힌 헐렁한 팬츠를 비롯해 폭이 넓은 소매와 모래시계 형태의 실루엣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의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성장한 크리스찬 라크르와 이후에 이렇게 순수한 프랑스 감성이 캣워크에 펼쳐진 적은 없었다.
자크무스는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꼼데가르송 매장에서 일하며 요령을 터득했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컬렉션을 제작했다. 도버 스트리트 마켓의 창업자이자 사장이며 꼼데가르송 레이 가와쿠보의 남편인 아드리안 조프는 매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그를 기억한다. 재능 있는 신인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조프(그는 관습을 거스르는 또 다른 신동들 중 고샤 루브친스키를 키워냈다)는 처음부터 자크무스에게 열광했다고 말한다. “신선함과 독창성을 바로 알아봤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강한 비전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에 대해 그처럼 단호하고, 그토록 현실적이며, 그렇게 분명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자크무스는 아역 배우였고 모델이었다. 8세 때 그는 장 폴 고티에(짓궂은 성적 불손함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또 다른 프랑스인)에게 스타일리스트로 자신을 써달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제가 뭘 주장했는지 아세요? ‘제 나이면 가장 어린 스타일리스트일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것 때문에 많은 홍보 효과를 얻게 될 거예요’”라고 그는 웃으며 회상한다. 신예 영화인이었던 그는 늘 영화를 만들었다. 가끔은 자신이 처음 만든 의상을 입은 세 살 난 사촌 루이를 출연시켰다. “저는 늘 영상에 푹 빠져 있었어요. 처음부터 모든 컬렉션에 프랑스 영화 같은 제목을 붙일 작정이었죠.” 자크무스는 지금도 브랜드를 위한 모든 비주얼 머천다이징, 아트 디렉션, 광고 캠페인을 직접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작업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한다. “처음에 아주 정밀한 의상을 만들 돈이 없었을 때는 스토리텔링이 옷보다 더 강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제 옷은 모두 프랑스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파리 여성이 아니라 프랑스 여성 말입니다.”
그는 어릴지 모르지만 자신의 관객을 신경 쓰지 않고 낙서를 하거나 드레이핑을 하는 뚱한 예능인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상 캣워크에서 선보이는 모든 옷은 그의 쇼룸에 걸린다. “모든 컬렉션에서 저는 개념적이고 공간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합니다”라고 자크무스는 말한다. “제 시장에 충실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그의 시장(그의 팬들)은 그처럼 젊은 사람들이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해서 다른 의사소통방법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의 세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자크무스도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와 다마스는 그녀가 13세이고 그가 15세였을 때 비디오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우린 텀블러로 짧은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저는 우리가 조금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녀는 그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내게 말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 그가 소셜 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알게 된 유일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현재 그의 오른팔인 마리옹 아마데오(Marion Amadeo)이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처음 만났다. 어릴 때 자그마하고 박학다식하던 자크무스는 자동차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데오는 그에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가 광고에 나온 그 애니?”
“맞아, 바로 나야!”라고 자크무스는 지금과 똑같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사이버 공간에서 서로를 알게 됐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가까운 친구들이다.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사진작가 피에르 앙주 카를로티(Pierre-Ange Carlotti)는 정기적으로 자크무스와 협업하고, 직접 만나기 전 4~5년 동안 온라인으로 자크무스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파비앙 주베르(Fabien Joubert)는 현재 이 회사의 광고 디렉터다. 그와 자크무스는 초창기에 아파트를 함께 썼다. 주베르는 그곳에 대해 “몽마르트르에 점포가 딸린 동굴 같은 곳으로 길 쪽에 거실이 있었다”고 묘사했다. 내가 자크무스에게 행인들이 집 안을 들여다보는 게 당혹스럽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답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보는 게 좋았어요!” 현재 자크무스는 센 강변에 자리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총천연색이에요. 파란색 카펫 위에 오렌지색 소파가 놓여 있고 벽에는 빨강과 노랑 드로잉이 걸려 있습니다. 바닥에는 제가 모아온 책이 쌓여 있고 부엌 조리대 위에는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도자기가 가득합니다. 현재 저는 아주 기괴한 80년대 이태리 플렉시글라스(Plexiglas) 램프에 푹 빠져 있어요.”
그러나 브루클린에 살고 있어서 오늘 참석하지 못한 핵심 멤버가 있다. 그는 바로 자크무스의 남자 친구이자 영화 제작자이며 사진작가인 고든 폰 스타이너(Gordon von Steiner)이다. 그렇다. 두 사람은 폰 스타이너의 작품을 좋아하는 자크무스가 인터넷을 통해 그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만나게 됐다. “그건 아주 강렬하고 굉장히 시적입니다”라고 자크무스는 두 사람의 로맨스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제가 세상의 다른 쪽에 있을 때 어떻게 그와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 의문일 테지만 저는 같은 동네에 사는 남자들과 더 큰 거리감이 느껴지는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어요. 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입니다.”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로익 프리장(Loic Prigent)은 처음부터 이 디자이너의 다정함과 정직함에 매료됐다. 프리장의 표현처럼 “이렇게 가끔 사람을 너무 질리게 만드는 분야”에서 보기 드문 자질이다. 그는 자크무스가 시골 출신이라는 사실에 편안해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할머니의 당나귀를 자랑스러워했어요!”라고 프리장은 말한다.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었을 뿐 아니라 고정관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패션 교육을 받지 않았고 패션 시스템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어요. 그의 에너지는 너무나 압도적이고 생생하고 정직합니다. 그리고 그의 옷은 어떤 전위적인 레이블과도 다른 방식으로 섹시합니다. 그것은 절대 쓰레기 같거나 과도하지 않아요.”
자크무스는 현재 소셜 미디어뿐 아니라 위트 있는 패션쇼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관중에게 직접 전달하고 있다. 한번은 관객들이 입을 수 있게 병원 작업복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들이 서로의 의상에 정신이 팔리지 않고 캣워크에 시선을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2016년 봄 컬렉션 때는 맨발에 흰옷을 입은 자크무스가 하얀 말을 데리고 무대에 직접 등장하기도 했다. 그의 획기적 패션쇼였던 2018년 봄 컬렉션을 위해서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아 부은 것 같은 아주 큰 밀짚모자를 만들었다. “그 모자는 네 번이나 품절됐어요!”라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공장에서 더 만들 수가 없었어요. 밀짚이 떨어졌거든요.”
이런 종류의 이른 성공에는 자신감과 경이로움이 뒤섞인 독특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 될 운명이라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무언가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에 대해 솔직히 멍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제 삶이 이렇게 펼쳐질 줄 알았습니다”라고 자크무스는 지난 몇 년간의 궤적을 조용히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할 얘기가 아주 많습니다. 제가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과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 에디터
- 남현지
- 포토그래퍼
- Zoë Ghert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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