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Draw Breath

2018.07.06

Draw Breath

현대미술가 로니 혼에게 드로잉은 ‘자서전적 풍경화’다. 예술가의 이름으로 고독과 혼란을 자처하는 그가 스스로, 우리에게 세상에 직면하는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일깨우는 가장 격의 없는 방식이다. 로니 혼을 ‘인식’할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

실제 로니 혼(Roni Horn)은 국제갤러리 2관과 3관 사이, 우고 론디노네의 작업이 놓인 작은 뜰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4년 전에도 우리는 여기서 인터뷰를 했다. 그때도 5월이었고, 화창했으며, 새소리가 들렸다. 당시 나는 로니 혼이 유리 주조 조각,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사진, 자르고 붙인 드로잉 등 현존하는 최고 ‘현대미술가로서의 로니 혼’을 ‘규정’할 만한 대표작을 선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그를 규정하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 했다. 작품이 야기하는 의심과 회의, 혼돈을 거친 후 그녀를 겨우 ‘인식(Perception)’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하는 것 외에 그것이 실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평생을 봐도 알 수 없도록 스스로를 의도하는 작가도 있지만 전 그런 스타일은 아니에요. 한 전시는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입니다. 전체를 알지 못해도 괜찮지만, 전체를 알아가는 과정이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로니 혼과 재회했으니, 우리의 만남은 ‘인식’의 결과 혹은 각자의 자리에서 보낸 시간의 인과율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계절에 다시 만나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가 화답했다.

“나는 그게 진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실제적 만남은 희귀해지고, 우리는 가상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죠. 가상적이라는 것의 문제, 아니 현실은 실제가 덜 중요해지거나 다른 식으로 중요해진다는 겁니다. 자연은 간과되고, 세상은 일종의 예시, 이를테면 공원이 되거나 엔터테인먼트의 장이 될 뿐이에요. 어떤 자전거 경주 선수가 그러더군요. 자전거를 집 안에 세워두면 가상의 장면이 생기고, 그 안에서 자전거를 탄다는 거예요. 비가올까, 자동차에 부딪칠까 걱정할 필요 없으니, 오히려 편하다는 거죠. 난 위험의 경험을 잃는 것이 인간에게 큰 손실이라 생각해요. 가상의 현실은 실제의 현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도록 모든 감각을 퇴화시키죠. 이로써 다른 것들에 당신을 연결하는 화두를 잃어버립니다. 어떤 것에도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것, 그게 바로 가상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저 공유하고 싶었어요.”

4년 전 로니 혼이 써준 사인 ‘Roni Horn = Yoon Hei Jeong’은 ‘실제 혹은 경험의 형이상학’을 공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이자, 우리가 그녀의 작업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표식이었던 셈이다. 로니 혼은 “실제의 복합성을 다루는 예술가”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왔다. 작가의 대표작, 빛이나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육중하고도 투명한 ‘물 덩어리’ 유리 주조 조각이나 아이슬란드 온천에 몸을 담근 여자의 얼굴 사진 100장이 보여주는 변화와 차이의 역학에 ‘You are the Weather, Part 2’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 등 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와 그 속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화두를 건넨다. 그리고 실존을 넘어 존재함의 엄연한 가치는, 이번 개인전(6월 30일까지)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도구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자 관계함의 한 형태”로서의 드로잉을 통해서다.

드로잉 “나는 스스로 늘 ‘그리는 사람’이라고 말해왔어요. 드로잉은 나와의 관계입니다. 조각이나 사진 작품은 관객을 필요로 하지만, 드로잉은 달라요. 내가 꼭 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해요. 나 자신을 알고, 다른 것에 거리 혹은 관점을 갖고, 휴식하고, 다른 종류의 세상에 가도록 하죠. 드로잉은 그들이 작품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어느 면에서는 내게 필수적인 심리학적 요소입니다. 솜씨가 훌륭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운이 좋다고 느껴요. 자유롭게 드로잉을 한다는 건 내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이에요.”

전시명과 동일한 제목의 드로잉 연작가 벽을 따라 늘어선 전시장에서 관객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식의 전형적인 동선을 무시한 채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것이다. 3×3 격자로 배열된 9점의 드로잉은 모두 15작품으로 구성되고, 공간은 15개의 색깔 덩어리처럼 구획된다. 각 드로잉은 수채 물감으로 그린 다채로운 채도와 명도의 원을 담고, 원 아래에는 단어가 가지런히 적혀있다. 원 하나에 단어 하나, 이 페어링의 질서에 안도하기엔 이르다. 돌연 원은 흩어지고 포개지며 확산하는 식으로 격자를 무너뜨리고, 단어는 출현했다 도망감을 반복한다. 확고한 구조를 고집하는 듯했던 로니 혼의 작품은 스스로를 해체해버림으로써 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작가의 말처럼 “임의적으로 이 색깔 원과 이 단어를 연관 지을 때의 그 단순한 즐거움을 방해할 수 있는 심미성”을 가진 그리드의 활약이다.

족히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원이 자연광을 받아 넘실거리는 광경 가운데 단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혼란은 본격화된다. 언어유희와 병치의 게임으로 악명 높은 이 예술가는 급기야, 전시 제목처럼, 자기 기억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이번 작품을 두고 ‘자서전적 풍경화’라고 한 로니 혼은 “개인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내 인생에서 나온 것임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말하자면, 로니 혼의 기억법은 하루 동안의 모든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한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그것이 아니다. 애써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 하지도, 두운법 같은 규칙을 차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명상하듯, 최면에 걸린 것처럼, 거의 잠든 상태”에서 단어를 떠올렸다. 1만 개의 단어를 읊은온 카와라의 작업처럼, 녹음실에서 우연히 의식의 흐름대로 단어를 마구 읊어본 게 발단이 되었다는 이 작업은 청각의 영역에서 시각의 영역으로, ‘보는’ 것과 ‘읽는’ 것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렇게 탄생한 일련의 단어, Rebus(그림 수수께끼), Sissy(겁쟁이), Humpback(꼽추), Bogus(가짜), Unface(노출), Soapy(미끈미끈한), Lavender(라벤더), Pollute(오염시키다), Hallucinogen(환각제), Cervix(자궁경부), Butt Plug(항문 플러그), Waddle(뒤뚱뒤뚱 걷기), Hydrophobia(광견병), Ugh(웩), Hirsute(털 많은), Twat(멍청이), Runt(가장 약한 녀석), 그리고 이보다도 훨씬 더 야하고, 직설적이고, 평범하고, 문학적이고, 터무니없고, 아름다운 단어들 간의 상관관계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당신이 ‘Toxic’ ‘Rustic’ ‘Tic’ ‘Tick’ ‘Luck’ ‘Sock’ 등의 단어를 보면서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 시의 실험적 방법론을 떠올린다면, 그건 행운이다.

“이런 식이에요. Square Diner가 생각나. 하지만 형편없는 음식이라 ‘Greasy Spoons(기름낀 스푼)’이라고 부릅니다. ‘Traduce(비방하다)’라는 단어는 카프카의 <심판> 첫 문장 “누군가 K를 비방하는 게 분명하다”에서 왔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서 찾아보던 기억이 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사랑에 빠진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서 ‘Malodorous(악취가 나는)’라는 단어를 발견했죠.

얼마나 좋은 단어인가요. 이 단어들은 삶의 지점을 붙잡고 레퍼런스처럼 작용하지만, 동시에 내 삶의 특정 기억과 연관되지도, 그것으로 축소되지도 않아요. 내 마음속에서,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과정으로 생겨난 거랄까요. 기억하거나 상기하지만 경험한 무언가는 아닌, 일종의 패러독스죠. 데자뷔처럼, 가본 적 없는 장소를 기억하는 일 같은거예요. 그게 이 작품의 재미라고 봐요.”

드로잉(Drawing)의 사전적 의미는 ‘선으로 그리다’다. 이와 함께 부드럽게 끌어당기다, 뽑아내다, 돈을 뽑다, 끌다, 커튼을 치다, 움직이다, 겨누다, 이끌어내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흥미롭게도, 드로잉의 이런 의미는 예술이 유도하는 행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변증법적이고도 이중적인 관계는 로니 혼의 말대로 “상호성에서 출발하는, 나와 작품 사이, 관객과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작업(드로잉을 포함한)의 본질이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전경.

의심 “창작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보다 ‘보여주지 않는가’가 더 중요하다. 로니 혼은 유감스럽게도, 어디에서도 기자 간담회를 열지 않는다. “나더러, 내 작업을 설명하라고요?”라고 성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작품을 봐도,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고자 고민한 치열한 흔적이 보인다. 는 색깔 원과 단어의 무질서한 배치로 출구 없는 사유의 미로를 만들어내는데, 색깔이 단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교란 장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다른 드로잉 연작 등에도 비슷한 혐의가 보인다. 문장을 그리고, 자르고, 다시 붙이는 행위로 완성되는데, ‘Rose is a rose is a rose’ 같은 거트루드 스타인의 명문은 ‘Coming up smelling like roses(생각지도 않은 행운을 만나다)’와 같은 관용구와 함께 뒤섞여 잘린다. 결국 우리가 알던 문장은 놀랍도록 성적이거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재배열된 이미지로 거듭난다. 유리 파편의 형태는 본래 로니 혼의 작품에 내재된 위태로움의 성향을 확고하게 하고, 작가의 의도를 캐내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의심은 관객을 활발하게 합니다. ‘Dead Owl(같은 오브제를 두 개의 방에 설치한 1997년작)’을 볼 때마다 두 작품이 같은지 묻지만, 난 절대 대답하지 않아요. 그게 내 작업의 핵심이기 때문이죠. 바젤 바이엘러 재단에서 열린 전시에 내가 붙인 제목이 ‘Transparency is Hoax(투명함은 거짓말이다)’였어요. 투명함이 실제가 아니라는 의미죠. 유리 주조 조각보다 더 투명할 수는 없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의심하고, 이와 함께 유리가 그렇게 의도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모두 날 매혹해요. 현실 정치에서는 누군가 투명한 순간 의도가 무엇인지 바로 의심하게 되죠. 그 역학에 반영된 것 이상의 인간의 조건이 예술에 있다고 생각해요.”

앞에서 생겨난 의심은 로니 혼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형식의 특성, 즉 드로잉 자체와 수채 물감(을 이용해 그린 원)이 미술 역사상 오랫동안 아마추어 혹은 ‘여성적’ 미술가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폄하되었음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태생적인 취약함 혹은 불완전함의 상징으로 작업한 로니 혼도 자신의 작업 세계가 이를 의도하고 있음을 흔쾌히 인정했다. 게다가 드로잉처럼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이야기 혹은 방식일수록 외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뛰어난 작가의 작품이든, 드로잉은 높이 평가되지 않아요. 난 그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고, 내 작업의 주요 형식으로 취하겠다고 다짐했어요. 드로잉은 거의 모든 양식에 존재할 뿐 아니라, 정말 심오한 형식입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도 덜 중요하게 취급받죠. 요즘 대형 드로잉 작업을 하고 있는데, 만약 그게 회화였으면 아주 값비쌌을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드로잉을 고집해요. 야망까지는 아니지만, 젊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순진하게도 그런 마음으로, 드로잉이 중요하게 여겨지길 바랐고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어요.”

정체성 수채 물감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차치하 고라도, 색깔 원과 단어 조합의 유동성,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특성, 반복의 반복 등의 성향은 전작을 지배하는 물(Water)을 연상시킨다. 로니 혼은 관객을 의심의 함정에 빠뜨리는 만큼, 스스로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에 매료된다. 물에 대한 흥미도 거기서 기인한 셈이다. “내게 있어 물은 무수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역량입니다. 주변에 뭐가 있든 그 모습을띠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에 연결되지만 중심을 잃지 않는 무언가로 은유되곤 해요. 그 투명성을 유지하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바보같은 질문이 아니에요. 물은 늘 침투당하고, 침범당해요. 그런 생각이 나의 많은 작품에 존재합니다. 중요하게는, 물은 양성적이에요. 양성성은 여성이거나 혹은 남성, 혹은 두 가지가 아니라 모든것이에요. 물은 내게 궁극적 통합의 상징입니다.” 로니 혼이 드로잉의 태생적인 취약함, 물의 통합성에 몰두하는 까닭도 이를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와 강하게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여자 혹은 남자로서의 정체성. ‘You are the Weather, Part 2’를 통해서 아이슬란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한 여성을 촬영한 100장의 사진, 그 표정과 뉘앙스의 연속적인 차이의 반복이 곧 본인이 생각하는 정체성의 본질임을 피력했듯이. 이는 그녀가 단순히 남자 혹은 여자로 살거나, 시각예술가 혹은 조각가로 불리기를 거부한다는 사실과도 통한다. 로니 혼은 스스로에게 어떤 정체성도 명시하지 않는다. 그저 외부, 즉 자본주의 혹은 스스로 동의할 수 없는 지나치게 단순한 관념에서 비롯된 거라고 치부해버린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성별의 이분법적 표현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성과 여성만 존재한다는 게 틀렸다고 생각했고, 누구나 복수의 측면을 가진다고 자각하고 살았어요. 성별을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으로서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요. 나는 남성과 여성,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을 취합니다. 취약함을 수용하고, 예민함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고 무언가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지없이 둔감해지죠. 인정하긴 싫지만, ‘나쁜 놈’이 아닌 이상 무언가를 해내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내가 중성성을 다뤄온 방식입니다.”

나무나 숟가락 같은 것에 감동받던 아이는 그렇게,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부터 고유의 미학을 이끌어내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언어의 아름다움과 모호성, 이중성과 복잡성은 로니 혼에게 매우 주요한 도구다. “사회적이지도 않았고, 대부분 잘 적응하지 못했던” 로니 혼은 책으로 세상을 배웠고, 세상을 가졌으며, 세상에서 도피하기도 했다(트럼프 당선 직후 그는 스튜디오에 2개월 동안 처박혀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아름다움과 좋은 글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고 사멸하는 것이 좋다”는 그녀가 에밀리 디킨슨, 클라리스 리스펙터, 앤 칼슨 등 문학가들의 문장을 작품에 차용해온 건 당연한 일이다. 언젠가 그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문장을 낭독하는 모놀로그 형식의 작업을 선보인 적도 있다.

“스타인의 문장은 정체성의 핵심 같은 겁니다. 조합을 반복하면서 계속 새로운 완전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아요. 내게 그 작품은 정체성의 가변성에 관한 것이에요. 물처럼 계속 이동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처럼 특히, 영화나 음악 같은 대중문화계가 A, B, C, D만 중요한 엄청나게 암울한 감독이 되기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주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나는 혼자 있는 상태(Solitary)를 즐깁니다. 소외된다는 건 한편으로는 매우 비판적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건 또 다른 특권이었죠. 아니, 날 편안하게 하는 무언가라는 표현이 더 맞을 거예요. 매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내 정체성의한 측면인 공격성과 다른 관점에서의 성별에 대한 혼란이 오히려 나의 자산이 되었어요.”

일상의 정치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로니 혼이 2년 동안, 3평 남짓한 방에서(작품의 크기와 관련있다)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우며 작업했다는 드로잉을 다시 본다. 그는 시간의 영속성에 색색의 얼룩을 남기고, 단어로 그 찰나의 순간을 호명했다. 드로잉은 타인에게 위탁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 작업이며, 절대적 시간 동안 노동 집약적으로 해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시간 자체인 동시에 시간의 흔적이다. 그리고 이는 로니 혼에게 미술이란 인간으로서, 순리대로 살기 위한 일종의 행위이자 저항의 방식임을 시사한다. 예술가의 이름으로 고독과 혼란을 자처하는 그가 스스로, 우리에게 세상에 직면하고 인식하는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일깨우는 가장 격의 없는 방식. “지금 가장 중요한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수전 손택의 말은 로니 혼이 드로잉하는 까닭을 은유하는 명제가 된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인터뷰 말미, 그녀는 자신이 좋아해 마지않는 작가 앤 칼슨이 인용한 문장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꿈꾸는 세상에서 꾼 꿈은 꿈이 아니다. 하지만 꾸지 않은 꿈은 꿈이다(A dream dreamt in a dreaming world is not really a dream. But a dream not dreamt is).” 이 유토피아적 문장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마치 실제에 있듯 감동적이라고 했다. 이것이 로니 혼이 꿈꾸는 세상이다. 그나저나 4년 전에 비해 왠지 편해 보인다는 인사에 그가 이번에는 이렇게 화답했다. “완전 동의해요. 난 많은 것들에 ‘그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해온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나이와 상관있는 거겠죠. 어쩌면 그게 세상의 본래 방식이거나. 우리가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동지!”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제이슨 슈미트(Jason S chmidt, 인물), 국제갤러리 제공
    글쓴이
    윤혜정(국제갤러리 에디토리얼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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