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 때론 시큼한
박제된 아이돌 시대가 저물어간다.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베리베리는 유튜브 시대에 부합하는 아이돌 그룹이다.
20대 후배 에디터의 표현처럼 이들의 ‘과일 같은’ 이름은 초록 검색창에 ‘2019 신인 아이돌’을 검색하면 지난해 말부터 빠지지 않고 리스트에 올랐다.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에서 빅스와 구구단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인 아이돌 그룹, 베리베리. “라틴어로 진실을 의미하는 ‘베리(Veri)’와 영어로 매우, 정말이라는 뜻의 ‘베리(Very)’를 합친 이름으로 진실한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베리어스(Various), 에너제틱(Energetic), 리얼(Real),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이니셜을 따서 다양하고 에너지 넘치는, 진정한 혁신을 보여주는 그룹이라는 뜻도 있고요.” 아이돌에게 또박또박한 자기소개는 기본이다. 매니지먼트에서 퍼즐 조각처럼 조합한 아이돌 그룹을 화수분처럼 쏟아내는 요즘, 베리베리는 ‘소통형 크리에이티브 아이돌’이라는 색다른 컨셉으로 등장했다. 멤버 전원이 데뷔 앨범의 작사, 작곡, 안무 창작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직접 사진을 찍고 디자인한 그래피티 느낌의 DIY 앨범까지 만들었다. 팬들을 혹하게 하는, 멤버들의 손길이 담긴 한정판 앨범은 공식 앨범과 동시에 출시됐다.
“우리가 직접 영상을 제작하고 편집한 DIY 뮤직비디오가 있다는 게 다른 아이돌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해요. ‘크리에이티브돌’이라는 수식어로 불리고 싶습니다.” 지난해 9월 세 번째로 공개된 멤버 계현은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멤버들조차 꽤 뿌듯해하는 눈치인 DIY 뮤직비디오는 2월 23일 상영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서투름을 기대한 우리에게 약간의 충격을 줬다. 지루하지 않도록 다양하게 촬영한 장면은 눈에 거슬리지 않게 정석적으로 구성돼 있었다. 경쟁률 높은 입사 시험의 서바이벌 미션이나 대학교 과제 수준의 꼼꼼함도 엿보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소박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한 게 아닌지 조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이런 일을 시키다니,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오빠들에게 너무하지 않냐”며 팬들이 봉기하고도 남을 일이라고 성토한다면 시대착오적인 걸까?
현실은 그렇다고 말한다.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다가가기 어려운, 카리스마 넘치는 오빠보다 친근하고 잘생긴 오빠가 범지구적으로 어필한다는 걸 입증했다. 베리베리는 아이돌이 더 이상 아이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신속하게 각성한 결과물이다. 가수가 노래만 잘 부르는 걸로 충분치 않다는 걸 보여준 게 아이돌의 등장이었으니 또 다른 낯선 형태는 진화의 과정이다. “스물둘이니까 아마 군대에 가 있겠죠? 직업을 생각해본다면 영상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거예요. 유튜브 채널을 보면서 저렇게 편집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영상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 민찬을 비롯한 일곱 명은 당신이 마치 한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태어났다고 느끼는 것과 똑같은 감도로 그룹의 방향성을 진지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팀 이름처럼 진심으로).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바빠질 일만 남은 아이돌을 대신해 콘텐츠를 만들어낼 고스트들이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새로운 시대의 부적응자일 뿐이다.
조금 전 촬영장으로 들어온 일곱 명의 베리베리 멤버들은 어느새 스튜디오 곳곳을 파고들었다. 카메라 앞 호라이즌, 모니터가 잘 보이는 긴 테이블, 푹신하고 낡은 가죽 소파, 메이크업 룸, 드레스 룸, 작은 부엌, 눈에 띄지 않는 또 다른 어느 구석. 분명 누군지도 모를 모두에게 일일이 90도 인사를 한 다음 어디든 상관없다는 듯 각자 자리를 잡았다. 촬영장에서 만난 아이돌은 대부분 세탁기에서 막 꺼낸 빨랫감처럼 몹시 피곤하다. ‘스카이캐슬’에서 시달리는 입시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때로는 훨씬 더. “처음엔 많이 놀라더라고요. 음악 방송이 있는 날에는 꼭두새벽부터 나가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제는 좀 적응한 것 같아요.” 소속사 관계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베리베리는 새벽 출근길의 괴로움에 대해 투덜대기엔 아직 풋내 폴폴 나는 신인이다. 팬들에게는 잠에서 덜 깬 얼굴이 아침 공기보다 상쾌할지 몰라도, 자비 없이 아침잠을 빼앗는 음방 출근길은 이제 막 데뷔한 신인 아이돌에게도 낯선 촬영장에서의 쪽잠을 선사한다. 소년과 성인 사이 어디쯤을 정신없이 지나고 있는 일곱 명은 음악 방송과 콘텐츠 제작과 예능 프로그램과 연습 외에도 해야 할 것이 여전히 많다. 해야 할 것 리스트에는 시시콜콜하거나 사적인 혹은 진지한 걱정도 포함돼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게 될 텐데 신인이라서 잘 모르고 실수하지 않을까, 그게 늘 걱정돼요.” 용승은 서글서글한 눈매에 조심스러움을 담아 말했다. “감정 기복이 심해서 기분이 처질 때는 한없이 우울해지는 자신의 성격이 걱정스럽다”고 말하는 강민의 목소리는 근심으로 가득해서 점점 작아지다 못해 오물거리는 입속으로 사라졌다. “처음 노래를 시작할 때는 발라드 가수가 꿈이었어요.” 회사에 캐스팅돼 오디션을 보고 들어온 후부터 아이돌 가수에 관심을 갖게 된 메인 보컬 연호도 지난 2년의 연습생 시절은 노력해도 노래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느낀 절망적인 순간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더 나아지고 싶고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져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죠.”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두려운 신인 아이돌에게는 평소에 간단하게 느껴지던 질문조차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다행히도 호영이 답할 질문은 어렵지 않다. “뉴질랜드에서 자라서 시험지에 이름과 성의 순서를 바꿔 쓰는 데 익숙했죠. 한국에 와서도 무심결에 시험지에 호영 배라고 쓰곤 했는데, 그게 제 별명이 돼버렸어요. 친구들은 저를 호, 영배라고 불러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젊은이들은 빨리 익히는 만큼 빨리 잊고, 너덜너덜할 정도로 지쳤다가도 순식간에 성층권을 뚫고 나갈 정도로 과도한 충전 상태가 된다.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일곱 명은 잠시 후 스스로 정한 자리를 이탈해서 스튜디오를 돌아다니고 쑥덕거리다가 갑자기 파안대소를 하거나 원인 모를 감탄사를 뱉기도 했다. 그리고 첫 무대를 기억할 때의 떨려오는 목소리는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한다. 사실 고작 한두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니까 말이다. “정말 긴장되고 많이 설렜어요. 팬들에게 오랫동안 준비해온 무대를 보여준다는 생각 때문에요. 다른 멤버들보다 연습생 기간이 더 길었거든요. 무대를 마쳤을 때는 성취감만큼이나 허탈감도 컸죠. 그 많은 시간을 공들여서 하나하나 준비해온 것들이 이렇게 한순간에 끝나버렸구나 싶어 허무함이 몰려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함께 노력해온 사람들과 꿈꿔오던 걸 이룰 수 있어서 행복하고 영광이었습니다.” 촬영 내내 엄격하던 리더 동헌은 무대를 바라보는 팬과 눈이 마주친 순간을 잊지 못할 거라고 말하면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베리베리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이제 막 시작했다. 그리고 과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과일처럼 달콤하고 때론 시큼하지만, 싱그럽다.
- 에디터
- 송보라, 이소민(sub), 전소연(sub)
- 포토그래퍼
- 황상준
- 헤어
- 김승원
- 메이크업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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