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세상을 스타일링하는 남자, 버질 아블로

2019.06.26

세상을 스타일링하는 남자, 버질 아블로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는 오프화이트, 루이 비통 작업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미술관 회고전이 열리기 전날 밤 <보그>가 버질과 함께 고향 시카고로 돌아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주요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루이 비통의 남성복을 이끄는 아티스틱 디렉터로서 세계 패션의 중심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38세의 이 남성이 바로 대규모 미술관 회고전의 주인공이다. 시카고 현대미술관에서 6월 10일에 열린 <버질 아블로: Figures of Speech>전은 미국 일리노이주 록퍼드 출신 17세 스케이트보더의 집념을 자세히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 아블로가 카니예 웨스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며 했던 작업과 2013년에 론칭한 그의 브랜드 오프화이트를 헤치며 서서히 지나가다 파리 아틀리에를 보여주는 상층부에서 끝이 난다.

아블로의 작품은 현시점에서 아주 유명하게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열광하는 관중의 관심을 이용할 줄 아는 그는 소셜 미디어의 속도에 맞춰 작업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니 홀저와 존 발데사리에 이르는 다양한 협업을 통해 자신이 존경하는 이들의 작업을 적절히 도용하고, 이케아를 위한 가구를 디자인하는 박학다식한 인물인 동시에 코첼라의 디제이기도 하다.

‘Wet Grass’ 프로토타입 러그, 2018. 버질 아블로 for IKEA.

“처음부터 일반 대중의 수준에서 디자인 아이디어를 구상했어요.” 아블로는 말한다. “고객과 동떨어진 듯한 아이디어는 없앴죠.” 아블로는 자신의 작업 과정이 과거의 디자이너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들었다. “자신의 스튜디오에 앉아서 다트를 던지며 그게 과녁에 명중하기만 기다리지 마세요. 여러분이 실제로 다트 판까지 걸어가면, 직접 다트를 과녁에 놓을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오프화이트의 성공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디자인 업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지 않아요. 그냥 나 스스로가 두 세계에 완전히 몰두했죠. 그리고 난 패션 업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 아니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컬렉션을 만들어낼 만한 사치를 부릴 여유도 없어요.”

아블로의 상승세가 켄달 제너와 지지 그리고 벨라 하디드 같은 사회적 모델의 부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제너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패션이 실제로 스트리트웨어 분야로 뛰어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멋지고, 편안하고 느긋한 그런 순간이죠. 그리고 버질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그저 가장 행복하고 가장 멋진 남자예요. 그에게도 스트레스를 받고 압박감을 느낄 만한 이유가 충분히 많지만, 그는 결코 그런 법이 없어요.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 우리도 보다 다정다감하고 열린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싶은 거죠.”

2월 말 파리에서는 보기 드문 따사로운 어느 날이었다. 아블로가 오프화이트 패션쇼를 준비하기 위해 빌린 파리 2구의 뒤제스 거리에 있는 창고를 개조한 작업실은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 조용하고 거의 비어 있는 방에서, 나는 곧 다가오는 그의 리조트 컬렉션이 구체화되는 모습을 봤다. 무드 보드는 스쿠버 장비를 손에 들거나 착용한 여성들의 사진으로 덮여 있었고, 그 옆에는 재클린 비셋이 영화 <디프>에서 걸쳤을 법한 화사한 마크라메 드레스가 옷걸이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다른 방은 아찔하면서 행복한 기운이 느껴지는 혼돈의 장소였다. 그 방의 탁자는 교통 표지판처럼 보이는 형광색 장갑과 벨트, 가방으로 덮여 있었고 이글루 크기의 푸퍼 코트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번쩍이는 대머리에 키만 멀쑥하게 큰 아블로가 복잡한 블랙 트라우저와 블루 반다나로 만든 셔츠, 그가 멋지게 만든 수하물 태그로 고정된 나이키 스니커즈를 신고 나타나자, 이내 패션 에디터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모델들도 스타일리스트 스티비 댄스와 함께 피팅을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프랭크 오션의 노래를 제외하면 아블로의 크고 따뜻한 웃음소리만 뚜렷이 들렸다. 오프화이트 2019년 가을 패션쇼가 고작 24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완벽하게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다음 날 밤, 패션쇼가 시작되기 고작 몇 분 전, 나는 그가 여러 친구들과 백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봤다.)

어느 순간에, 벨라 하디드가 댄스와 함께 의상을 피팅하더니 실키한 블랙 팬티 한 벌과 아찔한 하이힐, 흑백 체크 재킷 차림으로 등장했다. 아블로는 그것을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승인했다. 몇 분 후, 그녀는 옷자락이 방바닥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스쿨버스 같은 노란색 가운 차림으로 다시 등장했다. 그녀는 아블로를 위해 워킹을 선보인다. “죽여주네요.” 그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블로와 댄스 그리고 하디드는 이제 패션쇼에서 선보일 모든 룩을 압정으로 눌러놓은 무드 보드 앞에 서서 하디드가 걸칠 의상을 결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첫 번째 룩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말한다.

“맞아요! 나도.” 아블로가 말한다.”

“그걸 메인 의상으로 해요.” 하디드는 말한다. “이것도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른 의상과 차원이 달라요.”

“그런데 당신이 행사에 가야 한다면, 어떤 의상을 입을 것 같나요?” 댄스가 질문한다. “도무지 결정 못하겠어요.”

“좋아요. 그럼 셋을 셀 때까지, 첫 번째 건지 두 번째 건지 말해요. 하나, 둘, 셋…”

“첫 번째 것!” 모두 소리친다.

“야호!” 아블로가 웃으며 소리친다. “결정 났어요! 간단하네요.”

자신이 직접 선택한 룩을 입고 오프화이트 2019 F/W 컬렉션의 피날레를 장식한 벨라 하디드.

이후에 나는 자신이 입을 패션쇼 룩을 벨라에게 직접 고르게 하는지 아블로에게 물었다. “멋진 패션쇼를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벨라가 런웨이를 걸을 때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예요. 그녀는 묘하면서도 강력한 존재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그녀를 독특하고 강렬한 존재로 만드는 그녀의 개성과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매력을 포착하는 방법은 바로 작업 과정에 동참시키는 거죠. 나는 오프화이트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어요. 브랜드는 나의 것인 만큼 그녀의 것이기도 하고, 우리 인턴이나 어시스턴트의 것이기도 합니다. 내 일은 그걸 통제하고 깃털을 붙잡듯 거머쥐려 하지 않는 거죠. 일종의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겁니다.”

패션계가 현대화를 시도하며 새로운 성장의 길을 모색하는 가운데, 수천 명 가운데서 달릴 수 있는 후드 티와 스니커즈의 공급자인 버질 아블로 같은 사람의 부상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패션계 최정상에 서 있는 그의 존재가 아직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학계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패션계 역사상 5년 동안 구조공학을 전공하고 건축학 석사 학위를 딴 디자이너가 어디 있었던가?) 아마 학문의 상아탑에서 그 모든 세월을 보냈기에, 아블로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유행에 밝은 예술사나 비교문학 교수를 많이 연상시킨다. 그리고 본인이 거둔 성과에 하도 편안해 보여서 때로는 아프리카계 아버지를 둔 시카고 출신의 또 다른 흑인 남자, 버락 오바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2018년, 버질 아블로가 디자인한 나이키 스니커즈의 프로토타입.

“아블로는 자신이 시카고 출신이라는 점을 엄청나게 자랑스러워하고 있어요.” 스트리트웨어 라인인 빈트릴뿐 아니라 2000년대 중반에 아블로와 함께 카니예 관련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진행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디제이인 헤론 프레스톤은 말한다. “그는 마이클 조던 시대의 영향을 받았어요. 코첼라에서 자기 뒤로 전성기의 조던 모습을 보여주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했어요.” 아블로의 부상을 지켜보면서 프레스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뭘까. “관심의 초점이 아주 분명하다는 거예요. 그런 태도 덕분에 그는 루이 비통에까지 성공적으로 들어간 거죠. 그 자리를 원했고, 낡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그 목표를 향해 달렸죠. 그는 사실상 규칙을 다시 쓰고 있고, 많은 젊은이가 그런 그를 우러러봐요. 사람들이 디자인 경력을 쌓는 전통적 방식을 완전히 붕괴시켰어요.”

아블로는 어떤 것도 흑이나 백, 남성이나 여성, 대량 판매 제품이나 선망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그것은 자주 둘 다이거나 아니면 둘 다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오프화이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저는 저와 제 세대와 관련 있는 브랜드를 구축할 거예요.” 그는 6년 전 밀라노에서 정말 초라한 모습으로 오프화이트를 시작했을 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고등학교에서 저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이든 대마초 피우는 스케이트 타는 아이든, 아니면 비싼 사립학교 학생이든 어떤 아이들의 점심 식사 자리에도 낄 수 있었어요.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들 사이를 오가는 것을 좋아했어요. 거의 경찰이 없는 땅 같아요. 그래서 제가 밀레니얼 (세대의) 정신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스족인 인스타그램을 만들었다가, 그다음 주에는 하라주쿠 스타일로 차려입는 식이에요. 그게 자유입니다. 작업하는 데 가장 큰 전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자기모순에 빠져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니까요.”

아블로가 20대 후반이었고, 창작자가 아닌 고객으로 주로 디제잉을 하며 이른바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세세하게 열심히 파고들던 시절에, 2007년에 나온 다큐멘터리 영화 <마크 제이콥스 & 루이 비통>을 봤다. “그것이 제가 패션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순간이었어요.” 그는 말한다. “그 당시 저는 그야말로 ‘패션’이 나를 위한 것도, 대중을 위한 것도 아닌, 먼 곳에서 일어나는 지적이면서도 상류 문화에 해당하는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저는 패션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건 원래 그렇게 설명하기 어려워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 정도 장벽은 있어야 패션이 중요하게 느껴지니까요. 그런데 미국인 마크 제이콥스가 갑자기 등장해 그만의 방식으로 높고 낮음을 표현하고 신비감과 장벽을 허물어버렸죠. 그게 저의 북극성이에요.”

루이 비통의 총괄 책임자이자 부사장 델핀 아르노는 아블로보다 나이가 겨우 몇 살 많다. 그녀는 지금까지 루이 비통 모엣 헤네시(LVMH)의 이사회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자 최연소 인물로, 그녀와 아블로는 서로를 이해한다. 내가 왜 루이 비통에서 아블로를 고용했는지 묻자, 그녀는 계약을 성사시키는 그의 ‘전복적 방식’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또 아블로의 첫 번째 루이 비통 패션쇼를 “문화 행사, 즉 우리 세대가 주로 관심을 갖는 가치인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한 전 세계 사람들의 축제”라고 설명했다. (아블로는 피부색으로 그룹을 나눈 모델들이 착용한 올 화이트 의상을 선보이며 시작된 패션쇼를 “포용성이나 흑인과 백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종에 관한 이야기였어요”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패션쇼가 시작되자 의상이 프리즘을 통과해 흑백으로 시작하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사용된 테크니컬러의 탄생에서 파생된 무지개 효과를 연출했어요.”)

아블로는 독창적 사상가가 아니라 전용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던진 비난에 대해, “뭐든 아무것도 없는 데서 발전시켜나가는 그런 방식의 디자인은 다른 시대의 산물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저에게 디자인은 제가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싶으면 그게 뭐라도 상관없어요.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려진 이런 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결코 그려진 적 없다는 생각이 문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목표는 사물을 강조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협업을 많이 하고, 참조도 많이 하죠. 그래서 제 창작품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어떻게 단 6년밖에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지 않은 38세의 젊은 디자이너가 미술관의 20년 회고전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아블로는 카우치에서 벌떡 뛰어올랐다가 내려와 그가 공들여 제작한 미술관 전시회 모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그건 단지 오프화이트 시절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분명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왔어요. 제가 10대 시절 하던 작업을 첫 번째 전시실에서 소개합니다. 그다음에 여러분은 패션과 음악, 미술과 디자인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겁니다.” 그는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한쪽 벽에 미니어처 뉴포트 담배 광고가 매달린 모형이 있는 방을 가리킨다. “이 방은 인종에 관해 다루고 있어요.”

그의 앞에는 MCAC 쇼 카탈로그로 사용되는 실물 크기의 커피 탁자용 책 모형이 놓여 있다. 패션쇼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는 중이다. 40대가 가까워지면서 아블로도 자신이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중년에 접어드니 갈수록 소파에 앉아 있는 게 좋아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중독자로서 그건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저는 제 경력에서 이렇게 이정표가 될 만한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더 이상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마 저는 프로젝트도 많이 맡지 않고, 아이들과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같아요. 제 삶의 궤적이 어떨지 이제 보여요. 누가 알겠어요? 제가 지루한 삶을 순순히 받아들일지.”

2017년, 버질 아블로가 디자인한 의자.

그는 루이 비통을 위해 제작했지만 최종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견본이 딱 한 벌밖에 없는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다. 재킷 뒤쪽에 화성에 서서 지구를 되돌아보는 손으로 칠한 카우보이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카우보이는 ‘머나먼 곳에서’라고 쓴 로고가 박힌 재킷을 걸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가족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일하면서 확실히 느꼈을 혼란뿐 아니라 70년대에 가나를 떠나 시카고로 향한 그의 부모가 (그의 아버지는 페인트 공장에서 일했다) 분명히 했을 경험에 대한 비유로 쉽게 읽힐 수 있다. 지금 간호사로 일하는 그의 누나가 시카고에서 태어난 후 아버지는 인근 록퍼드의 또 다른 페인트 공장에서 더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 그곳 록퍼드에서 버질이 1980년에 태어났다.

아블로는 대학에 들어가는 일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인생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도 전혀 몰랐지만, 아버지는 그가 대학에 가야 한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고, 심지어 아블로 대신 전공을 골라주기까지 했다. “그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는 말한다. “저는 그냥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싶었고 랩 음악과 ‘건즈 앤 로지스’의 노래를 듣고 싶었어요. 제가 오리엔테이션에 갔는데, 아버지가 ‘나는 항상 기술자 아들을 갖고 싶었어’라고 말씀하시길래, 저는 ‘좋아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는 5년 동안 따분한 학과 수업을 B 정도의 학점을 받으며 묵묵히 들었다. 힙합과 패션, <GQ>와 <바이브> 잡지를 통해 문화계에 입문했다. 대학 4학년 때 처음으로 미술 수업을 들으며 회화에 대해 배웠다. “그 수업은 캠퍼스 반대쪽에서 있었는데, 거기가 제가 처음부터 있어야 하는 곳이었어요.” 아블로는 말한다. “하지만 저는 완벽한 컬러, 벨벳으로 덮인 가구, 가죽 상판의 탁자 등 아름다운 이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물에 있던 예술 도서관을 이용하기 시작했죠. 그 도서관은 거의 텅 비어 있어서 아주 조용했고 온통 예술 서적으로 가득했어요. 그리고 도서관에 가려면 이 모든 전시품을 가로지르며 걸어가야 했어요. 그게 제가 예술과 처음 교류한 경험이었어요.

오프화이트가 큰 인기를 얻기 전, 아블로는 쉽게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의 앨범 커버 제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사빌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블로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멘토 같은 존재를 찾고 있었다. “제 디자인이 내는 목소리가 싸구려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화를 걸었고, 제가 그를 지나치게 떠받들었기 때문에 저는 그가 ‘이봐요, 디자인 수준 좀 끌어올려요’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반대로 말했어요. 그는 ‘밈 문화와 스트리트웨어 등 제가 당신 세대를 보며 느낀 것을 밝히자면 당신에게 최선은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대신 그냥 하던 대로 계속하는 것이에요’라고 말했어요.”

“그 당시 저는 마르지엘라나 레이 가와쿠보 정도는 돼야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죠. 저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부적격자였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정말로 지저분한 누군가가 디너 파티를 열기 위해 자기 집을 깨끗이 청소하려는 것과 같아요.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 그 후 당신이 욕실에 가서 ‘욕조에 시리얼 상자가 도대체 왜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아블로는 자신이 아닌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제가 그런 걸 소유했을 때 될 수 있었어요. 그러고는 밤에 잠을 잘 수 있었어요. 그냥 확인할 필요가 있었어요. 어쨌든 이미 제 계획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때때로 머릿속으로 가구를 재배치할 필요가 있어요.”

    포토그래퍼
    Anton Corbijn, GettyImagesKorea, Courtesy Photos
    Jonathan Van M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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