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버 발레타와 캐롤린 머피
90년대 아름다움을 정의하던 두 미인. 20년 넘게 패션의 정상을 지키는 미국 출신 슈퍼모델, 앰버 발레타와 캐롤린 머피를 <보그>가 만났다.
90년대 패션을 대표하는 순간은 모두에게 다르다. 누군가는 케이트 모스와 마크 월버그가 하얀 팬티가 보이도록 청바지를 내려 입은 CK 광고를 떠올릴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린다 에반젤리스타와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포드와 크리스티 털링턴이 서로 허리를 감싸고 베르사체 무대를 거닐던 순간을 말할 것이다. 90년대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순간에는 늘 당대의 얼굴이었던 슈퍼모델이 등장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얼굴이야말로 슈퍼모델의 역할이니까. 그리고 90년대 패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두 개 더 있다. 캐롤린 머피(Carolyn Murphy)와 앰버 발레타(Amber Valletta).
나오미, 크리스티, 린다의 뒤를 이어 케이트 모스로 대표되는 ‘헤로인 시크’ 모델 세대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슈퍼모델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카일리 백스, 크리스틴 맥미나미, 샬롬 할로우 등 90년대 중반의 전복적 패션과 함께 새 얼굴은 끊임없이 등장했다. 머피와 발레타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다. 그들보다 선배였던 ‘트리니티’ 모델이 어떤 옷을 입어도 슈퍼모델의 존재감을 자랑했다면, 후배 모델들은 철저히 주어진 역할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카멜레온 같은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처음으로 흑과 백을 벗어나 아보카도와 카푸치노 컬러를 잔뜩 담은 컬렉션을 선보인 1996년 봄/여름. 프라다 여사는 짧게 자른 머리와 유리처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캐롤린 머피를 캠페인 모델로 낙점했다. 피터 린드버그가 촬영한 광고에서 머피는 미국 플로리다 시골에서 자란 ‘톰보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1 년 뒤 골반 아래까지 슬릿이 들어간 구찌 미니스커트를 입은 머피는 마리오 테스티노의 관음적 렌즈 앞에서 요염하게 카메라를 훔쳐본다. 또 머리에 커다란 핑크 깃털을 달고 금색 브로케이드 드레스를 입은 채 오페라 가르니에 계단을 내려오던 1998년 봄 디올 꾸뛰르 쇼에서의 모습 또한 그녀의 명장면이다.
그런가 하면 오클라호마 들판을 뛰어다니던 소녀 앰버 발레타는 90년대의 쿨함을 대표하던 모델이었다. 크레이그 맥딘이 촬영한 빨간 배경 속 1995년 가을 질 샌더 광고 캠페인은 여전히 수많은 화보의 ‘무드 보드’에서 빠지지 않는 전설의 이미지다. 간결한 화이트 슬립 드레스를 입고 리듬을 타던 모습을 포착한 1996년 봄 알베르타 페레티의 광고는 또 어떤가. 허리끈 장식을 더한 빨간색 헬무트 랭 바지에 투박한 슬리퍼를 신고 무릎을 꿇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발레타의 <보그> 화보 이미지는 90년대 패션을 정의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물론 천사의 날개를 달고 맨해튼을 떠도는 피터 린드버그의 천사 화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시대의 전설이다(얼마 전 린드버그가 작고해, 바로 이 천사 사진이 SNS에 자주 등장했다).
만약 이 두 명의 커리어가 여기서 끝이 났다고 해도, 그들은 이미 ‘레전드’로 남았을 것이다(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카일리 백스나 미셸 힉스 등이 그랬듯이). 하지만 발레타와 머피는 90년대에서 멈추지 않았다. 머피는 재빠르게 스스로의 커리어를 찾았다. 가장 오랫동안 뷰티 명문가의 전속 모델로 활동하면서, 더없이 미국적인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자신의 취향을 담은 디지털 매거진을 론칭하는가 하면, 미국적인 브랜드 ‘시놀라’의 여성복 디렉터로 활약한 적도 있다. 그 와중에도 톰 포드 컴백 무대에서 매력을 뽐냈고, 마이클 코어스의 뮤즈로 런웨이에 올랐다. 스티븐 마이젤이 지키던 <보그> 이탈리아 커버에 가장 자주 등장하던 얼굴 중 하나도 바로 머피였다.
발레타 역시 다를 게 없다. ‘베프’였던 샬롬 할로우와 함께 할리우드로 향한 그녀는 차분히 자신만의 필로그래피를 쌓아갔다. 주로 아름다운 모델 여자 친구 등의 역할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좌절하진 않았다. 덕분에 <Revenge>, <Blood & Oil> 등의 TV 시리즈에서 꽤 무게감 있는 역을 맡을 수 있었다. 물론 패션계의 러브콜 역시 끊이지 않았다. 프로엔자 스쿨러, 스텔라 맥카트니 등의 디자이너들은 ‘쿨’한 매력을 선보이고 싶을 때 맨 먼저 발레타를 찾았다. 특히 지난해 모델 생활 30주년을 맞은 그녀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어준 인물도 생로랑 하우스의 안토니 바카렐로다. 여기에 친환경 패션을 위한 홍보 대사 역할을 자처해, 이번 시즌 스텔라 맥카트니 광고 모델로도 발탁되었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서는 만큼 스스로의 삶에도 충실했다. 머피의 딸과 발레타의 아들은 이번 가을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머피는 화려한 파티 대신 서핑 보드를 들고 파도를 찾아 떠나는 것을 즐기고, 발레타는 어디서나 소소한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연스러운 삶을 영위한 덕분일까. 그들의 매력은 세월과 함께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스펙트럼이 더 확장되고 있다. 당장 패션계의 바로미터인 미국 <보그>만 봐도 그들의 새로운 전성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99년이 아니라 2019년 8월호 화보에서 만난 머피와 발레타의 모습은 여전히 동시대적이다. 발레타가 시몬 로샤의 로맨틱한 트렌치를 입고 한참 어린 후배 프란 서머스와 포즈를 취하면, 그다음 페이지에 캐롤린 머피가 알베르타 페레티의 재킷을 입고 비토리아 체레티 곁에 등장한다. 4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선 그녀들(둘 다 74년생으로 동갑이다)은 함께 데뷔한 모델들 중 유일한 ‘서바이버’가 된 셈이다.
“패션계는 점점 나이는 물론이고 인종, 성 정체성에서 더 다양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난해 어느 인터뷰에서 스스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발레타는 이렇게 얘기했다. “패션 업계가 더 많은 사람을 대변하게 된 지금이야말로 무척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머피 역시 친구의 말에 동의했다. “패션계는 나이가 많은 여성을 필요로 합니다. 패션계 소비의 80%가량은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우리 세대야말로 다양한 배경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보그 코리아> 역시 그들의 성숙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늘 찬양해왔다. 발레타는 2015년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디자인한 루이 비통 드레스를 입고 뉴욕 코니아일랜드에서 커버를 촬영했고, 머피는 2012년과 2016년 두 차례 <보그 코리아> 커버 걸이라는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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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대표하는 이 두 명의 슈퍼모델이 차례대로 <보그 코리아> 10월호에 등장한다. 우선 커버를 장식한 발레타를 다시 만난 곳은 LA다. 프라다 가을 컬렉션을 입은 그녀는 역시 드라마틱한 패션 연기를 선보였다. 노련하게 화보의 흐름을 지휘하면서도 그녀만의 쿨한 매력은 여전했다. ‘전설’과 함께 촬영을 마친 패션 디렉터의 소감은? “우리가 어린 시절 우러러보던 소녀는 이제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더 멋있었습니다. 얼굴의 자연스러운 주름부터 패션 자체를 소화하는 감각까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촬영 후일담도 가득하다. “감자탕, 곱창, 비빔냉면까지 한국 음식 마니아였어요. 한국 식당 추천까지 빼놓지 않았죠.”
반면 머피는 서울까지 날아왔다. 막스마라가 서울에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면서 특별히 초대한 것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우아한 매력으로 충만했다. 금발을 뒤로 넘긴 그녀에게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말하는 ‘아메리칸 뷰티’ 그 자체였다. 그녀 역시 한국 음식 마니아다. 김치찜을 찢어 먹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남긴 그녀는 행복한 서울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패션계는 달라지기 아주 쉬운 업계죠. 지금은 아름다우니까 모두들 저를 찾지만, 10년 뒤 제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면? 글쎄요.” 유튜브에서 발견한 1996년 인터뷰 영상에서 발레타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비슷한 시기에 촬영한 듯한 영상에서 머피 역시 모델이라는 직업의 신기루 같은 매력을 꼬집었다. “시골에 살던 열세 살 소녀에게 나중에 파리에서 모델 일을 할 거라고 말하면 믿었을까요? 아마 절대 믿지 않았을 거예요.”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 있는 소녀들에게 23년 뒤에도 여전히 <보그> 커버와 화보를 장식할 거라고 이야기하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당신들이야말로 현재진행형 레전드라고, 마흔을 훌쩍 넘겨도 런웨이에서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 말이다. 90년대 쿨 모델을 대표하는 여자들답게 “Cool!”이라고 답하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Annie Leibov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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