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트렌드

RE-RE LAND

2020.03.03

by 이주현

    RE-RE LAND

    온라인 뷰티 세상에 열린 ‘중고’ 마켓.

    20조원! 지난해 한국 중고 시장의 규모다. 중고 명품 의류와 액세서리를 취급하는 ‘더 리얼리얼(The Realreal)’, 명품 백을 재판매하는 ‘리백(Rebag)’, 패션 아이템은 물론 온갖 생활 소품까지 한 번에 구입할 수 있는 ‘포시마크(Poshmark)’ 등. 수입 패션 시장 규모 290억 달러 중 70억 달러, 약 4분의 1이 중고 마켓 차지다. 거대 자금이 몰리는 뷰티 시장은? “화장품 중고 거래에는 크나큰 진입 장벽이 존재해요. ‘위생’이죠.” 트렌드 리서치 전문 기관 WGSN 뷰티 디렉터 제니 미들턴은 그럼에도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리세일 트렌드는 뷰티’라 확신한다. 대체 중고 시장에 어떤 변화가 있길래?

    당신은 2000년대 말, 뷰티 커뮤니티를 평정한 중고 화장품 거래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대학 시절 바비 브라운 ‘롱웨어 젤 아이라이너’를 블랙과 브라운 두 컬러 다 갖고 싶었지만 예산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뷰티 커뮤니티에 올라온 ‘품앗이’ 제품을 샀죠. ‘짐승 용량’을 자랑하던 ‘아멜리’ 아이섀도 10개를 솜씨 좋게 나눠 10구 팔레트로 재탄생시키는 ‘금손’들이 등장할 만큼 소분 제품 인기가 상당했어요.” 여전히 방 한쪽을 화장품으로 가득 채우는 뷰티 관계자의 얘기다. 지금이야 가격 대비 고품질 화장품 선택의 폭이 넓지만 10년 전만 해도 중고 거래는 뷰티 마니아들의 특별한 즐길 거리였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위생’이다. “‘맞춤형 화장품 조제관리사’ 제도에 따라 자격증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 한 번이라도 쓴 화장품을 재판매하는 행위는 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음을 유의하세요.” 성신여대 뷰티산업학과 박초희 교수의 설명이다. 유통기한도 걱정이다. ‘중고나라’, ‘당근 마켓’ 등 리세일 플랫폼에 샘플, 미개봉 제품이 종종 올라오는데, 2017년 재정된 ‘화장품법 시행규칙’에 맞춰 샘플에도 유통기한을 표기해야 하지만 이를 지키는 브랜드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고, 상자를 버린 메이크업 제품 또한 실제 수명은 미스터리에 가깝다.

    해외 중고 마켓 뷰티 카테고리에서 입고와 동시에 품절되는 다이슨 ‘에어랩’과 ‘슈퍼소닉 헤어드라이어’, 테라건 마사지 툴, 반클리프 아펠이나 장 파투 등 향수 품목은 위생 면에서 보다 자유롭다. 이에 포시마크는 미개봉 혹은 한 번도 쓰지 않은 제품에 ‘New with Tags’를 달아 활발한 거래를 유도하고 이베이는 FDA 권고에 맞춰 되도록 손 타지 않은 제품 위주의 판매 정책을 세웠다. 2015년 8월 개장한 최초의 뷰티 전문 중고 플랫폼 ‘글램봇’의 경우 자체 클리닝 시스템을 도입하며 블루 오션을 선점했다. 판매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제품을 구입한 뒤 비용을 먼저 지급하고 카테고리별로 맞춤 소독, 보완 과정을 거쳐 상품 가치를 높인 후 되파는 식이다. 세척 과정은 또 얼마나 정교한지! 칼날로 립스틱 단면을 커팅하고 에어 프레스기로 압축 파우더나 아이섀도 팔레트 표면에 붙은 미세먼지를 박멸한다.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열처리와 알코올 소독도 기본 옵션. 눈에 직접 닿는 마스카라, 인조 속눈썹이나 애플리케이터가 내장된 립글로스, 틴트류는 다루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제조 공정을 갖춘 72개 브랜드 제품만 취급하는 것도 글램봇만의 규정이다. 각고의 노력 덕분에 현재 53만 명에 이르는 소비자들이 글램봇 인스타그램에서 실시간 신상 정보를 확인하고, 이전 사용자에 대한 궁금증 대신 글램봇을 향한 신뢰로 중고 화장품을 산다. C2C 거래 중심의 중고 판매 사이트와는 180도 다른 풍경이다.

    “풍요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저성장, 고용 불안, 취업난, 양극화에도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고 통장 잔고가 부족하더라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소비를 찾는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16>에서 ‘중고 신드롬’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적 있다. 가격 경쟁력은 중고 마켓의 최대 장점 이다. 한 예로 이베이 히트 상품인 다이슨 ‘슈퍼소닉 헤어드라이어’는 정가보다 평균 120달러 저렴하다. 그래서 누적 조회 수 15만 건을 돌파했다. 글램봇은 미개봉 중고품에 약 20% 할인 가격을 책정하고, 판매자가 가격을 정하는 포시마크에서는 잘만 찾으면 5만원대 조르지오 아르마니 립 마그넷 새 제품을 2만원에 ‘득템’할 수 있다. 한정판 제품을 향한 불꽃 튀는 전쟁도 당연히 목격할 수 있다. 지난해 말 출시 3일 만에 품절된 카일리 코스메틱 ‘2019 홀리데이 컬렉션 패키지’는 포시마크에 업데이트 즉시 정가 대비 두 배 이상 가격이 올라 약 90만원에 낙찰됐다.

    위생은 기본, 깔끔한 제품 사진과 정확한 상태 설명, 직관적 웹사이트 UI, 철저한 배송 관리. 이런 완성형 뷰티 중고 플랫폼으로 평가받는 글램봇에 매일 넘쳐나는 화장품에 허덕이는 ‘사재기 퀸’ 친구가 접근을 시도했다. 그녀에 따르면 제품 구입 과정은 일단 ‘순조로웠다’는 것(심지어 100달러 이상 주문하면 한국까지 무료 배송이라며 기뻐했다!). 캡과 본체를 가로지르는 스티커를 본 순간, 저렴하게 새 제품을 산 듯한 뿌듯함마저 느꼈다고 고백했다. 곧 그녀는 의욕이 충만해졌다. “이런 식이라면 나도 판매할 수 있지 않겠어?” 결론부터 말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 글램봇은 판매자가 어디에 있든 전 세계 곳곳으로 미국 사무실까지 제품을 안전하게, 심지어 무료 운송 가능한 택배 라벨을 보낸다고 했다. 사이트에 안내된 이메일 주소로 연락처와 거주지 정보만 전달하면 지역에 따라 1~2주 사이 라벨이 도착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그녀에겐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허들이 있었다. 최소 30 개(미국 내 15개)까지 제품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수집욕으로 사모았던 맥 총알 립스틱들, 입생로랑 뷰티 ‘루쥬 볼륍떼 샤인’, 투페이스드 ‘본 디스 웨이 파운데이션’… 하나둘 꺼내다 보니 상자는 금세 채워지던걸?” 이제 일주일 후면 글램봇 물류 창고에 자신이 보낸 제품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릴 테고, 48시간 안에 그녀의 통장으로 판매 대금이 입금될 것이다. 그녀는 과연 얼마나 받게 될까?

    “브랜드나 카테고리별로 정한 최소, 최대 환급 금액은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어.” 백화점 입점 브랜드 기준 A급 립스틱 하나가 4,000원, 베이스 제품은 8,000원 선으로 환급되니 25만원 정도의 수익이 예상된다. “본전을 생각하면 꽤 아쉬운 금액이지만 가격 흥정에 따른 감정 노동이나 개인 정보 공개 부담이 없는 ‘쿨 거래’가 보장되니 눈감아줄 만해.” 일본 최대의 중고 거래 플랫폼 ‘메루카리’는 선진화된 C2C 안전 거래망을 개발, 창업 4년 만인 2016년 유니콘 기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거래 성사 후 판매자와 구매자에게 각각 QR 코드가 전송되고 이를 통해 편의점에서 택배를 신청하면 상대방 연락처와 주소가 자동 입력된다.

    지속 가능과 환경보호 차원에서 이런 뷰티 중고 거래의 잠재력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글로벌 리서치 전문 기업 입소스가 중고 거래 경험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0%가 중고 판매와 구입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 답했다. 아울러 25%는 쓰레기 배출을 줄이기 위해 본격 시작을 알렸다.
    WGSN 뷰티 디렉터 제니 미들턴은 <보그 비즈니스> 팀과의 인터뷰에서 색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중고 거래를 애용하는 1020 소비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 제품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길 원합니다. 중고 거래 플랫폼이 그들 사이에 끈끈한 가교 역할을 하죠.” 중고 거래가 보편화된 패션 월드에서는 옷을 판매한 수익으로 다시 새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 브랜드에도 긍정적이라는 평가다.

    일본은 중고 거래를 일컬어 ‘빈(Poor)테크’라는 말을 붙인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젊은이들이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을 활용해 지출을 아끼고 자금을 융통한다는 다소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합리적 소비라는 명분 아래 중고 거래를 즐긴다. ‘소비는 죄악’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언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뷰티 중고 거래 시대가 도래했다

    뷰티 에디터
    이주현
    포토그래퍼
    이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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