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한국 패션계에서 가장 막강한 여성 4인이 모였다

2021.05.13

한국 패션계에서 가장 막강한 여성 4인이 모였다

진태옥, 한경애, 서영희, 김주원. 한국 패션계에서 가장 막강한 여성 4인이 모였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그들이 기획한 마스터 클래스.

“디자인할 때면 어떤 주인공이 내 옷을 입고 어떤 역할로 분위기를 풍길지를 중요하게 여겼죠. 발레리나 김주원이라면 제가 만든 옷을 입고 어디를 가도 주인공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진태옥

“남자 재킷에 벨벳같이 부드러운 소재를 더하면 어떨지 상상했습니다. 남성과 여성, 그 사이를 오가는, 두 지점을 극대화한 옷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진태옥

DANCING HIGH 오버사이즈 화이트 코트에 긴 슬릿의 울 코트를 레이어드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구조적인 실루엣이 돋보인다.

크롭트 화이트 셔츠에 소매만 남긴 베스트를 매치했다.

“리사이클링 디자인이라고 해서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체가 되는 디자이너의 역량이 뛰어나야만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죠. 한국에서 디자인 에너지와 역량이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 이번 프로젝트를 맡아야 옷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영희

디자이너 진태옥은 자신의 상징인 화이트 셔츠를 입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스태프들에게 주는 선물로 자신의 키 절반이 될 법한 꽃나무 한 다발을 든 채 말이다. 여전히 맑게 빛나는 눈동자, 단정하게 정리된 화이트 네일, 명확한 딕션. 1965년부터 옷을 만들어온 그녀는 올해로 데뷔 55주년을 맞았다. 행어에 일렬로 걸린 10여 벌의 새 컬렉션을 보자 진태옥의 눈동자는 더 반짝였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지금껏 수천 벌의 옷을 만들어온 패션 거장이지만 이번 컬렉션은 더 특별하고도 특별했다. 바로 팔고 남아 버려질 위기에 처한 남성복을 재료로 새롭게 디자인한 ‘지속 가능 패션’이기 때문이다.

POWER PLAY 밑단을 풍성한 러플로 장식한 화이트 셔츠와 짧은 블랙 재킷.

크롭트 화이트 셔츠와 벨벳 리본으로 장식한 원피스.

“이번 컬렉션을 상업적으로 판매하지 않고 아카이브로 남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많은 옷을 만들기보다 이 옷이 지니는 가치에 중점을 두고 싶었죠.” ─한경애

“이 프로젝트는 지난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가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코오롱의 지속 가능 브랜드 래코드(Re;code)가 지난 2월 이 행사에 초청받았고,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디자이너인 진태옥과 협업 컬렉션을 기획한 거죠. 하지만 코로나19로 행사 참여를 취소했고, 대신 그 컬렉션을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발전시켜 비로소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래코드 신화의 주인공인 코오롱FnC부문 한경애 전무의 설명이다. 이 프로젝트에 주축이 된 또 다른 인물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보그>와 20년 넘게 ‘코리아니즘’을 비롯해 수많은 패션 비주얼과 전시를 기획하고 창작해온 인물이자 진태옥과 런웨이, 전시, 아트북 등 여러 장르에서 오래 일해온 비주얼 크리에이터다. 진태옥과 래코드의 협업을 위한 비주얼 작업 역시 그녀의 솜씨다.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면서 늘 느끼는 게 있어요. 요즘이야말로 디자이너의 역량이 매우 중요한 시대라는 사실이죠. 그런 의미에서 리사이클링 패션을 쉽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옷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만큼 디자이너가 고유의 에너지와 역량이 없다면, 새로 만든 옷이라고 해도 죽은 옷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진태옥과 래코드 협업에 참여한 건 저에게도 행운이었죠.” 한경애 전무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 “이미 만든 옷을 재해석하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려운 작업입니다. 래코드의 뜻은 코드, 즉 방식을 전환한다는 의미죠. 생각의 전환이 가능한 사람만이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컬렉션이 판매용이 아닌, 아카이브 컬렉션으로 제작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한경애 전무는 “많은 옷을 만들기보다 이 옷이 지닌 가치에 중점을 두고 싶었다”고 전한다. 리사이클링으로도 이런 패션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데 무게가 실린 것이다. 그래서 이 옷을 입는 주체 역시 패션모델이 아니라 발레리나 김주원이다. 15년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였고 연극, 뮤지컬 등 현대 예술의 장르를 넘나드는 바로 그 아티스트다. “디자인할 때면 늘 어떤 주인공이 내 옷을 입고 어떤 역할로 분위기를 풍길지를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발레리나 김주원이라면 제가 만든 옷을 입고 어디를 가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진태옥의 말에 김주원이 감회가 새롭다며 설명을 이었다. “제가 <보그>와 첫 화보를 찍던 때가 열아홉 살이었어요. 그때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실장님과 촬영했고, 제가 입은 옷 중에 진태옥 선생님의 옷도 있었죠. 지금 마흔네 살의 발레리나로서 두 분과 함께 <보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사실 패션 비즈니스에서 3년이 지난 옷은 마지막까지 누군가에게 선택되지 못한 ‘재고 중의 재고’로 취급받는다. 그 수많은 재고 중에 진태옥은 ‘남성복 재킷’을 요구했다. “남자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템은 단연 재킷입니다. 저는 여기에 벨벳을 더했어요. 디자인을 시작하던 처음이나 지금이나 저의 테마는 늘 여성과 남성을 오가며 상반된 요소의 매치였습니다.” 진태옥은 블랙 재킷을 이리저리 해체한 뒤 전혀 새로운 형태의 옷을 ‘창조’했다. <보그> 촬영장에서 다시 만나 10여 벌의 옷을 입은 김주원은 이번 컬렉션에 대해 특별한 평가를 더했다. “클래식이야말로 당대 모더니즘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진태옥 선생님의 옷이야말로 모든 시대의 클래식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술이라는 형태는 자연과 함께 흘러가며 진화해야 하죠. 그래서 이번 촬영이 개인적으로 의미가 큽니다.”

“진태옥의 옷은 늘 한계가 없다는 느낌을 줍니다. 오늘 입은 옷 역시 평소에도 세련되고 예쁘지만 무대에서 입고 춤을 춰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김주원

CREATIVE CONTROL 움직일 때마다 역동성을 보여주는 프린지 재킷.

“가까운 미래가 우리가 상상한 미래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환경을 먼저 고려하고 지구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그려야 하지 않을까요.” ─한경애

“스튜디오 한쪽에 걸린 재킷을 보았을 때 웃음이 절로 나오더군요. 재킷을 베스트로 만들기 위해 가위로 자를 때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이 옷을 사람들이 입을 때 어떤 새로움을 느낄지 떠올리며 흥분했죠.” ─진태옥

지속 가능성은 몇 년 전만 해도 모든 디자이너들이 ‘옷’과 ‘패션’을 위해 고려해야 할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필수 중의 필수다. 유명 하우스는 물론 신생 독립 브랜드까지 모두가 지구와 환경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진태옥 역시 지속 가능성을 늘 숙고해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옷이 지구를 덮어도 수십 번은 덮고 남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진태옥은 또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덧붙인다. “케이트 블란쳇이 지난 베니스 영화제에서 4년 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었던 알렉산더 맥퀸 드레스를 다시 입었어요. 지속 가능성을 또 다른 형태로 보여준 좋은 예죠. 패션의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진태옥은 1993년 파리 패션 위크에 참여한 뒤 1989년 서울패션협회를 설립해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SFA와 SFAA 그리고 서울 패션 위크로 이어지는 선진국형 패션 위크를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한국 패션 대가가 보여준 이번 협업을 통해 후배 디자이너들 역시 다시 한번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녀는 젊은 한국 디자이너들이 리사이클링 패션에 대해 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번 컬렉션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K-팝 아티스트들이 국제 무대에서 리사이클링 패션을 입고 공연하는 거죠. 덕분에 한국에도 이런 옷과 이런 옷을 디자인하는 인물이 많다는 것을 세계인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K-리사이클링 패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에디터
    남현지
    포토그래퍼
    김신애
    모델
    김주원
    헤어
    김선희
    메이크업
    이미영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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