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김기창의 아내, 어머니 그리고 미술가 ‘박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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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김기창의 아내, 어머니 그리고 미술가 ‘박래현’

2021-05-13T11:48:23+00:00 2020.11.23|

청각 장애를 가진 천재 화가 김기창의 아내, 어머니 그리고 미술가.
박래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박래현, 삼중통역자>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뜨거웠던 한 예술가에 관한 기록이다.

영광, 1966-1967, 종이에 채색, 134×168cm, MMCA

삼중통역자. 박래현이 스스로를 일컫던 말이다. 알려진 대로 남편은 청각 장애를 가진 화가 김기창이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한 미국 여행에서 박래현은 여행 가이드의 영어를 해석해 다시 구화와 온갖 몸짓으로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여행에 동행한 수필가 모윤숙이 그 모습에 관심을 보이자 박래현은 자신이 영어, 한국어, 구화(구어)를 넘나드는 “삼중통역자와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삼중의 언어 통역자였던 박래현은 ‘천재’로 불린 유명인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 그리고 예술가로서 ‘삼중’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미술가로서 박래현의 작업 세계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에서는 박래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월 3일까지 이어지는 <박래현, 삼중통역자>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뜨거웠던 한 예술가에 관한 기록이다.

사실 박래현은 일찍부터 촉망받던 화가였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3년 ‘단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할 수 있는 한국적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를 탐구한 선구적 미술가였다. 집안도 무척 부유했다. 동경으로 미술 유학까지 간 평안남도 만석꾼의 딸이 어떻게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늙은 총각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이들의 러브 스토리는 당시에도 세간의 화제였다. 전시장에는 박래현의 작품과 함께 생전 그가 잡지에 기고한 글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궁금증을 채운다. 1962년 여성 잡지 <여원>에서 박래현은 이렇게 기술했다. “말 잘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 오히려 불충분한 언어로 상대방과 의지를 통하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어느 안도감 같은 것을 안겨주었고, 또 하나 결혼 후 계속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자는 결심은 두 사람의 결합에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고 강단 있다. 그런 박래현에게 남들의 시선이나 저잣거리의 떠도는 말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완전한 말 대신 글과 그림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눈 둘은 해방 이듬해 봄 결혼식을 올린다. 운보 김기창은 박래현의 이름 앞에 산(山)을 보태고(박래현(朴來賢)의 이름 가운데 한자를 바꾼 ‘朴崍賢’) 우향(雨鄕)이라는 호를 선물했다. 비 내리는 마을 우향과 구름 낀 밭 운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다. 구름과 비, 마을과 밭처럼 정다운 짝이 된 두 사람은 인사동에 각자의 호를 딴 ‘운향화실’을 운영하며 열두 번의 부부전도 열었다. 김기창은 한국 화단의 인기 화가로 빠르게 성장했고 박래현 역시 큰 미술상을 휩쓸며 작가로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박래현은 어디까지나 ‘청각 잃은 남편의 입과 귀가 되어 시중을 드는 눈물겨운’ 아내(<여원> 1962. 11.), ‘신사임당상’을 수상한(1974) 모범적 어머니로 먼저 평가받았다. 오죽하면 앞서 언급한 여성 잡지의 기고문 제목이 ‘남편 시중기’였을까?

1960년대 중반 한복 차림으로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박래현의 모습.

정작 작품의 면면을 보면 연약하고 가여운 여인은 어디에도 없다. 해방 전후 초기작부터 1970년대 추상화까지 하나같이 우아하고 기개가 넘친다. 일단 작품 사이즈부터 크다. 대부분 사람 키만 한 대작이다. 한국 화단에 박래현의 이름을 알린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단장’은 배경이 없는 큰 화면에 새까만 옷의 소녀와 새빨간 화장대만 덩그러니 마주한다. 일본 유학 시절 하숙집 딸을 모델로 한 이 그림은 ‘거울을 보는 여성’이라는 일본 미인도의 흔한 소재를 차용했는데 그 깔끔한 구도와 감각적인 색감, 정확한 인체의 표현, 도판으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화장 도구의 세밀한 묘사는 감탄을 자아낸다. 인물화에서 탄탄한 기초를 쌓은 그는 해방 이후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난 한국적인 여성 인물화를 발전시켜나간다. 좀처럼 쉬는 날이 없었다. 심지어 1956년 1월 막내딸을 출산해 네 아이의 엄마가 된 직후에도 맹렬히 작업을 이어갔다. 같은 해 6월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불과 몇 달 지난 11월에는 ‘노점’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노점’은 군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시기, 입체주의에 대한 탐구와 화풍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시장을 오가는 여성들의 일상적 풍경 속에서도 기하학적인 색면의 분할과 탁월한 색상 배합, 예리한 필선이 돋보이는 맑은 담채화다.

생활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건 박래현 작업의 특징이다. 그의 수필에선 가사와 육아에 쫓겨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작가의 번민이 드러난다.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 보기, 정오면 점심 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결혼과 생활>, 1948) “순수한 가정주부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예술에만 몰두한다는 것도 허용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이니만큼 항상 마음이 복잡한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다.”(<여원>, 1962. 11.)

자연히 그림 소재는 평소 가사 활동 반경 내에서 볼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생선 한 토막, 고양이, 새, 닭, 두 딸의 모습, 어항, 창밖의 풍경 등)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작업의 소재였던 셈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면 일상 속 사물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은은하고 상냥하기 그지없는데 작품에 스민 기운은 펄펄 끓는 것을 느낀다. 조잡함 없이 탁 펼쳐내는 대담한 구성이며 색감, 끈질기게 거듭되는 실험의 흔적. 예를 들면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그려진 세 점의 ‘부엉이’ 시리즈는 전부 그 표현 방식이 다르다. 잔붓질을 여러 번 해서 면 안에서 변화를 보여준다거나 아교와 물감의 번짐 효과를 활용해 보드라운 털의 질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두 마리의 부엉이를 중첩시키는 한편 크레파스 같은 재료와 유화에서 쓰는 테레빈유로 안료의 갈색조 깊이를 더하기도 했다. 제한된 소재 안에서 반복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 기법과 표현 영역을 확장해나간 것이다. 박래현은 시간을 쪼개고 30평 남짓한 화실을 남편과 나누어 쓰며 작품을 제작했다. 제대로 된 칸막이도 없는 그야말로 한 방에서 펼쳐지는 두 개의 세계였다. 박래현은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무서운 대결’이라 표현했다. 둘은 백양회 회원전과 함께 거의 매년 부부전을 개최하며 꽤 많은 합작도를 남겼다. 대부분 소품으로 그린 화조화인데 이번 전시에선 네 폭 연폭 병풍에 그린 큰 규모의 합작도가 공개된다. 박래현과 김기창이 입체주의를 수용한 새로운 양식의 동양화를 선보이며 각각 작가로서 큰 인상을 남긴 1956년에 발표한 ‘봄C’다. 박래현이 먼저 등나무를 그린 뒤 김기창이 참새를 그리고 글을 썼다. 두 사람은 부부이자 선의의 경쟁자며 예술적 동반자였다. 1964년과 1965년엔 미국 순회 부부전을 열고 유럽, 남미, 인도, 아프리카를 돌며 추상화의 물결이 일던 서구 미술계와 세계 문명의 현장을 확인했다. 여행은 박래현의 작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달밤, 1960년대 초, 종이에 채색, 100×69.7cm, 개인 소장

일곱 번째 부부전이 열렸을 때 출품된 11점의 작품은 ‘잊혀진 역사 중에서’라는 단일한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작가는 역사 이야기에서 색과 이미지를 찾아 환상적으로 표현한 추상화라고 설명했다. 한지를 흠뻑 적신 붉은색과 노란색, 파란색 등의 강렬한 색감은 찬란한 황금빛 고대 유물을 연상시킨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출품한 또 다른 추상화 ‘영광’은 한지를 구기고 먹물을 묻혀 두드리고 찍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붉은색과 검은색 바탕에 구불거리는 황색 띠가 화폭을 가득 메운 이 그림에 대해 박래현은 인생을 회고하는 글에서 “태양의 생활력을 등황색으로,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짙은 붉은색으로, 타산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신중성을 검은색으로 표현하였다”고 밝혔다. 서양의 고대 문명에서 발견한 듯한 생명력과 동양화 특유의 먹의 번짐이 인상적이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비는 그의 1943년 데뷔작 ‘단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하고 다시 미국을 방문한 후에는 1974년까지 뉴욕에 체류하며 태피스트리(태피스트리는 벽면, 가구 등을 덮거나 장식하는 용도로 손이나 기계로 짠 직물을 의미한다)와 판화를 연구했다. 함께 여행을 떠난 김기창은 홀로 귀국해 한국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마흔아홉 살의 나이에 다시 유학을 시작한 박래현은 열의가 넘쳤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생소하던 섬유 예술을 자신의 미술 언어로 가져와 새로운 조형 실험을 하고(‘작품’, 1970-1973), 주로 동판화 작업을 하며 까다로운 여러 기법을 한 작품에 다양하게 구사(‘Recollection’, 1970-1973)했다. 그 광범위한 작업의 스펙트럼 탓에 개별 작품만 따로 놓고 보면 도무지 한 사람의 작업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의 이야기가 중구난방이거나 일관된 방향성이 없다는 건 아니다. 박래현은 이 땅의 한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끝없이 작품에 투사하고 있다. 전시 제목 <박래현, 삼중통역자>는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를 넘나들며 연결 짓던 그의 예술 세계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전시를 기획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20세기 초 한국 화단에서 활동한 몇 안 되는 여성 화가로 이름은 유명한데 그 위상에 비해 알려진 게 너무 없어 저부터 궁금했어요. 대체 어떤 맥락에서 ‘노점’이나 ‘영광’ 같은 작품이 나온 거고, 왜 그토록 다양한 작업을 하게 된 건지, 그리고 서로 상통하는 지점은 무엇인지 궁금증을 풀어내는 게 곧 전시 준비의 과정이었어요.” 워낙 오래 전시가 없었던 작가인 터라 박래현의 작품을 비장(秘藏)했던 소장가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내고 설득하는 과정에만 1년 이상이 걸렸다. 도록에 참여한 필진과 함께 작가를 연구하는 한편 당시의 대중잡지도 참고했다. 1974년 귀국 판화전으로 한국 미술계에 놀라움을 선사했던 박래현은 1976년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대중적으로 제대로 이해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타계 직전에 남긴 동양화 다섯 작품도 공개된다. 흥미로운 건 많은 작품 중 자화상은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이다. “잡지 속 삽화를 제외하곤 자화상은 저도 못 봤습니다. 신기하죠. 그런데 작품을 보면 여성이나 모성으로서 느끼는 고민과 감정이 많이 표현되어 있어요. 기도하는 여성이나 자궁 같은 이미지. 특히 새와 알이 자주 등장하는데 새는 여성에게 알을 전해주고 여성은 알을 품고 있죠.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새와 그 생명을 잉태시키고 세상을 창조하는 그런 과정이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보이거든요.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김새를 묘사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자화상을 이런 도상에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박래현을 기억하는 원로 작가들의 말에 따르면 궁중 요리도 참 잘했다고 한다. 이상적인 가정과 작가로서 정점을 찍은 멋진 작품. 거짓말처럼 너무도 완벽해 보이는 모든 결과물의 이면에 어떤 아픔과 희생이 있었는지 누구도 모른다. 다만 박래현의 수필을 통해 한 인간의 안쓰러운 사투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분명한 건 그가 어떤 표리부동함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사회적 요구 속에서 끝없이 고민해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여원>에 수록된 ‘남편 시중기’는 불편한 필담 대신 입 모양으로 남편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김기창을 요리조리 설득한 ‘남편 훈련기’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김기창은 그런 현명한 아내가 자신의 곁을 떠나자 80여 점의 꽃 그림(‘바보 화조’, ‘바보 수렵도’ 등으로 대표되는 ‘바보 산수화’)으로 그의 영혼을 위한 꽃길을 만들어주었다. ‘만일 우리들(여성)만의 나라가 설 수 있다면?’이란 주제로 진행된 여성지 앙케트에서는 또 이런 답변을 내놓았다. “글쎄, 그런 시대가 올까. 바랄 수 없는 꿈속의 일이겠지만 꿈속에서라도 그런 세상이 온다면 몇 가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1. 여성들은 외부에서 활동하게 될 테니 지금까지 해오던 가사를 위탁하고 싶다. 2.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불리했던 법정, 법 개정을 실행하고 싶다. 3. 마누라 치기 좋아하는 남성에게는 부인단에서 특별 벌을 주어야 한다. 4. 지금까지 이어져온 남성들의 봉건적 의식을 뿌리 뽑도록 교양을 쌓아주고 싶다. 5. 걸핏하면 ‘여자라는 것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자에게 특별한 법을 제정하고 싶다. 6. 여성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없애기 위해 각 학교에서 재교육을 실행하고 싶다.” 누구보다 솔직하고 자신의 삶에 치열했던 인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예술가. <박래현, 삼중통역자>는 박래현의 예술의 실체를 조명하는 전시이자 아내와 엄마, 자신의 이름으로 삼중의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노점, 1956, 종이에 채색, 267×210cm, MM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