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가 1집부터 10집까지 해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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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하이가 1집부터 10집까지 해온 이야기

2021-05-13T11:20:53+00:00 2021.01.20|

에픽하이는 2003년 1집부터 이제 막 발표한 10집까지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었다.

어둡고 두려운 곳에 에픽하이가 서 있다.

 

투컷이 입은 재킷은 디올 맨(Dior Men), 셔츠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타이는 스투시(Stussy). 타블로가 입은 의상은 프라다(Prada). 미쓰라가 입은 코트는 펜디(Fendi), 셔츠는 벨루티(Berluti).

9집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 만들 때 “우리의 마지막은 세상이 정해주는 거니까 항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어야 해”라고 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타블로 사람들이 아는 사건 외에도 굉장히 억울한 일이 많았어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고 내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일을 해도 누군가가 원하면 내가 사랑하는 이 일을 못하게 할 수 있겠구나 너무 잘 알거든요. 앨범을 내거나 콘서트 무대에 설 때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고 늘 생각해요. 안타깝게도 두려움에서 비롯된 거죠. 하지만 그만큼 매 기회마다 감사하고 즐거워요. 자기 자신이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복적인 일을 귀찮다고 느낄 수도 있거든요. 투컷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내가 남기고 가는 마지막 작품이 창피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앨범을 만들려고 해요.

작별 인사 같던 9집 이후 3년 3개월 만의 정규 앨범이군요. 에픽하이의 마지막이 아닌 세상의 마지막을 얘기하는 듯합니다. 10집을 만들며 에픽하이 음악에 대해 어떤 생각을 많이 했나요? 타블로 이 음악을 누가 듣게 될지, 그 사람이 음악을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을 얻었으면 좋겠는지, 그 사람 생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는지 많이 생각했어요. 내 얘기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게 음악에 대한 우리의 철학이에요. ‘내 얘기 같아’라는 수록곡처럼, 우리 이야기에서 비롯됐지만 당신의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는 거죠. 이번 앨범은 특히 억울한 사람들, 뿌리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들, 극한의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듣고 힘을 얻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나를 이해하는구나, 누군가는 내 안의 이런 기분을 이해하는구나 느꼈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거든요. 앨범 제목 <Epik High Is Here>는 ‘긴 세월 끝에도 에픽하이는 여기 있다’는 표현도 되지만 ‘세상의 누구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당신 곁에 아무도 없어도  에픽하이가 여기 있다’는 뜻이에요. 투컷 곡의 주제나 내용이 결코 즐겁지 않거든요. 그 즐겁지 않은 내용을 듣는 사람은 즐겁길 바랐어요. 그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타블로 ‘Rosario’가 그런 노래예요. 처음의 가사와 기타 멜로디는 굉장히 쓸쓸하고 슬퍼요. 그런데 노래가 빌드업되면서 마지막에는 커다란 자신감을 느낄 수 있거든요. 헬스장에서 운동하며 들어도 되지만 그 안에 슬픔과 쓸쓸함이 있어요. 희망을 잃을 기회가 훨씬 많은 이때, 비현실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힘내라, 너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일이 일어난다’ 같은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어요. ‘현실은 이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으면 좋겠다’를 전달하기 위해 음악적으로 많이 고민했어요. 어둡고 절망적이고 슬프기만 한 노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거든요. 미쓰라 예전에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싶진 않았어요. 너무 솔직하면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감출 수 있는 건 감추고 어느 정도만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가사를 썼어요. 이번 앨범에서는 더 직설적으로 썼어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거라고 여겼어요. 답답하고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정이죠.

절망과 슬픔만 얘기하는 노래가 왜 안 좋을까요? 그것대로 누군가에겐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타블로 사실 ‘행복합니다’라는 노래가 그랬죠. 아무리 노래가 절망적이고 암울해도 끝에는, 희미하게나마 위로가 느껴져야 한다는 게 에픽하이가 지키려는 규칙 중 하나예요. 우리 노래를 듣고 억울함과 분노만 커지면 안 되거든요. 슬픈 사람이 우리의 슬픈 노래를 들었을 때 그 감정이 완화되는 방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해요. 사운드와 전반적 가사의 흐름이나 메시지로 만들 수 있어요. 저희 노래 중 ‘빈차’를 듣고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는데요. 가사만 보면 그게 불가능해 보여요. 하지만 사운드와 멜로디가 힘을 조금 내게 하죠. 물리적으로 나이 드는 것과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별개로 봐요. 저희가 앨범을 꾸준히 내면서 어른이 되듯 음악적으로 성장한 거거든요. 그러면서 깨달은 거예요. 굉장히 미묘한 차이지만 저희에게는 굉장히 중요해요.

지옥이라는 단어도 자주 보이고, 영웅이든 예언자든 다 필요 없고 신도 기능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에픽하이가 보는 지금의 세상이 지옥인가요? 타블로 어릴 때 저를 보호해야 하는 어른들이 ‘너 그러면 지옥 간다’며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많이 강요했어요. 천국, 지옥이라는 단어만 안 쓰지, 사회 곳곳에서도 그 공포심을 이용해 겁을 줘요. 아무 권리도 없는 사람이 자기 기준대로 선과 악을 정해놓은 뒤, 내가 그 기준에 맞으면, 한마디로 말을 잘 들으면 천국과 구원을 얻는다 하고, 기준에 안 맞으면 존재의 가치가 없는 듯 여겨요. 어릴 때부터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 평생 그것과 싸워온 것 같아요. 잘못 태어난 것 같고 존재 자체가 죄인 듯 느끼게 된 사람들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희는 2003년에 나온 1집 <Map Of The Human Soul>부터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게 에픽하이가 해야 하는 일이에요.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얘기 안 해줬으니 저희라도 하려고요.

오랜만에 2CD를 발매해요. 두 번째 파트 <Epik High Is Here 下>의 발매 시기나 트랙 리스트는 아직 공개 안 됐는데 어떤 계획이 있나요? 미쓰라 첫 앨범을 다 이해한 후 두 번째 앨범이 나오는 게 맞아서 발매 시기를 분리했어요. 저희가 원하는 상황이 되어야 발매할 수 있어요. 타블로 <Epik High Is Here 上> 편은 혼자 있는 공간에서 이어폰 끼고 들을 수 있는 음악 위주라면, 下편은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즉 다 같이 로드 트립을 가는 차 안이나 공연장이나 페스티벌 같은 환경에서 들었으면 해요. 상황이 나아졌으면 좋겠는데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니, 솔직히 언제 나올지 모르겠어요.

이번 앨범에서 특히 애착이 가는 곡이 있나요? 이번 앨범에 대해 기대하는 반응은 뭔가요? 타블로 저희처럼 음악을 오래 하다 보면 지금 가장 애착이 가는 곡, 지금 차트 1위 하는 곡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긴 시간을 버틴 노래가 뭔지 알잖아요.17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사랑하는 에픽하이 노래가 있거든요. 시간의 시험을 이기는 노래를 만드는 게 우리가 바라는 거예요. 팬들을 가장 갈라놓은 앨범이 7집<99>였어요. 타이틀곡 중 하나였던 ‘Don’t Hate Me’는 당시 에픽하이답지 않은 노래라며 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었어요. 사람들이 싫어하고 관심 없는 노래로 여겼는데 지나고 보니 그 노래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다 따라 부르는 거예요. 아이유 콘서트에 게스트로 갔을 때도 아이유가 저희에게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노래가 위로가 됐다고요. 내가 노래를 만들었다고 내가 주인이 아니구나, 노래 스스로의 힘이 생기는구나 싶었어요. 노래는 듣는 사람들 거예요.

에픽하이와 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두 감정이 있어요. 자신의 시절을 배반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줬으면 하는 것 혹은 자신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함께 나아가는 것. 투컷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제 유년 시절을 에픽하이와 함께했습니다. 제 청소년기에 에픽하이가 가장 큰 힘이 됐습니다.” 그분들이 바라는 건 크게 없는 듯해요. 그 시절을 나와 함께해줘 고맙고 계속 그 자리에서 있어줘서 고맙다는 거예요. 타블로 “바라는 건 없으니 음악을 계속해달라, 음악 계속해줘 고맙다”는 댓글이 최근 제 인스타그램에 많이 달렸어요. 울컥하더라고요. 너무 많은 것이 요구되는 세상이고 저희 자신도 스스로에게 너무 많이 요구해요. 그러다 보니 아무 요구와 조건이 없는 그런 얘기가 너무 고맙더라고요. 그런 글을 보면 계속 음악 하고 싶어요.

9집이 작별 인사 같아 더 그런 듯해요. 음악 인생의 마무리처럼 들렸어요. 타블로 마무리였죠. 마지막 곡 ‘문배동 단골집’ 가사에서 일종의 마무리를 짓잖아요.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잖아요. 저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경험이 많아요. 그런데 작별 인사를 한 번도 못했어요.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거, 미쳐요. 앨범을 만든다는 건 저희와 긴 시간을 함께한 분들과 대화하는 거예요. 물론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앨범이 하나의 편지라고 여겼을 때, 작별 인사를 하는 건 잊지 않으려고 해요. 작별 인사를 못했다는 것에 대해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앨범이 저희의 마지막이 돼도, 그게 좋은 인사였으면 좋겠어요.

BLEED’에 “은퇴, 해체, 매해 목구멍에 담은 단어들인데 14년째 못 뱉네”라는 가사도 있었죠. 그런 고민을 구체적으로 했나요? 투컷 여기 오기 전에도 했어요. 그 고민은 2003년부터 했어요. 타블로 그 고민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해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욕을 계속 들어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어요. 이젠 플랫폼이 너무 많아 내가 안 보려고 해도 문 앞에 찾아오는 수준으로 어떻게든 그 미움이 나에게 전달되는데 그냥 관두고 싶을 때도 많죠.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즐거워할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럴 때는 ‘이게 다 뭘 위한 거지? 그만하는 게 맞나?’ 싶어요. 그러다가도 존재해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들으면, 생각을 다시 고쳐먹어요. 어느 순간 셋이 모여 있어요. 음악에 대해 서로에 대해 비슷한 것 같아요. 너무 오래 같이 있을 땐 각자의 시간을 갖고 싶고 같이 있으면 멤버들 때문에 미칠 때도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우리끼리 있는 게 제일 나아요. 아무 이유 없이 얼굴 보자마자 서로 쌍욕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게 나아요. 유일한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