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대와 신세대가 우연히 만나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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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대와 신세대가 우연히 만나는 지점

2021-05-12T16:25:03+00:00 2021.02.03|

“미국 물 오래 먹어 미국 X 됐냐?”고 쏘아붙이는 하유미의 까랑까랑한 딕션이 귀에 맴돈다. 2021년 유튜브로 2007년 작 <내 남자의 여자>에 빠진 나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초차원적 공간 ‘테서랙트’로 진입한 쿠퍼의 기분이다. 시대 가름의 시대는 갔다.

새해 전야.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쓱쓱 훑는데 익숙한 만화 이미지가 거듭 눈에 들어왔다.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첨단 기술이 인류를 지배하는 암울한 세상을 그린 추억의 공상 과학 만화가 또래 지인들 사이에서 갓 쪄낸 호빵처럼 뜨겁게 회자되고 있었다. KBS 유튜브 채널 ‘옛날티비’에서 1980~1990년대에 방영된 만화 전편을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제공한 덕이었다. 까마득한 우주 시대라고만 여기던 2020년이 실시간으로 지나는 지금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신기하고도 복잡한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2020년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1989년 작 공상 과학 만화를 현재진행형으로 소비하는 2020년이라.

‘온라인 탑골공원’으로 촉발된 옛날 콘텐츠 역주행 열풍은 이제 트렌드라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평범한 현상이다. 1980년대생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황금기를 통과한 나 역시 흘러간 영상을 뒤적이는 ‘하드털이’가 일상이 된 지 오래. 시작은 지난해 초 <부부의 세계>를 보면서부터다. 배신과 복수로 점철된 막장 드라마의 명장면을 유튜브로 돌려 보는 동안 머릿속 한구석에는 극 중 조강지처로 등장하는 김희애가 한때 그와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하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는데 아니다 다를까, 영리한 유튜브 알고리즘은 무려 13년 전 방영된 불륜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의 유혹적인 섬네일을 보란 듯이 내 눈앞에 펼쳐놓았다. SBS 유튜브 채널에서 24부작에 달하는 드라마를 요즘 감각에 맞게 편당 20분 내외의 하이라이트 클립으로 편집한 영상이었다. 예고편처럼 핵심만 추린 영상 덕에 나는 4시간 만에 드라마 전편을 정주행할 수 있었다. 동생 남편과 바람난 김희애에게 “미국 물 오래 먹어 미국 X 됐냐?”고 쏘아붙이는 하유미의 까랑까랑한 딕션은 그야말로 인간 뚫어뻥. 인물들의 촘촘한 연기와 묵은 체증을 내려주는 사이다 전개, 김수현 드라마 특유의 고졸한 부잣집 인테리어까지, 요즘 드라마에서는 찾기 어려운 쾌감과 미학이 거기 있었다.

그러나 옛 드라마 감상의 진짜 묘미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댓글. 편집자는 매회 에피소드 끝에 바로 전 에피소드에 달린 베스트 댓글을 영상과 함께 소개했는데 그게 요즘 말로 그냥 ‘뻘하게’ 웃겼다. 유난히 감자에 집착하는 홍준표(김상중)가 감자가 설익었다며 불평하는 장면 아래 “이마트에 못난이 감자 30톤 들어왔대, 홍준표 빨리 가”라는 댓글이 달리는 식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댓글 창에서 이 작품을 처음 접하는 나이 어린 친구들의 존재가 심심찮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철 지난 드라마를 다시 보며 낄낄대는 건 나 같은 노땅들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웬걸, 젊은 구독자들 또한 옛 드라마의 미덕과 악덕을 두루 살피며 과거의 콘텐츠를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방영된 드라마에서 현대적인 요소를 찾아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반대로 시대착오적인 요소를 꼬집어 유머러스하게 조롱하는 그들의 댓글은 내게 신선하고 새로웠다. 흘러간 드라마의 캡처나 클립 영상을 밈(Meme)으로 소비하던 과거의 패러디 문화와는 결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달까. 어린 시절 콘텐츠를 추억하는 구세대와 흥미로운 콘텐츠를 찾아다니는 신세대가 우연히 한 지점에서 만나 교감 아닌 교감을 나누는 느낌.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초차원적 공간 ‘테서랙트’로 진입한 쿠퍼의 기분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렇게 드라마 다시 보기에 푹 빠진 나는 추억의 명작을 잇달아 소환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지상파 방송사에서 옛 드라마를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을 공격적으로 개설하던 시기였다. <커피프린스 1호점>과 <발리에서 생긴 일>, <내 이름은 김삼순>과 <천국의 계단>을 지나 <청춘의 덫>에 <서울의 달>까지 섭렵하고 나니 흥미는 옛날 예능 프로그램으로 옮겨갔다. MBC ‘오분순삭’ 채널의 <무한도전>과 <거침없이 하이킥> 레전드 영상은 그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파격을 실감하게 했고, 구독자의 댓글 민심을 반영한 스핀오프 채널 ‘레빼미(레전드인데 빼서 미안하다)’의 존재는 이들 아카이브 채널이 과거의 사골 우려먹기식 편성을 넘어 대중과의 새로운 소통 창구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나중에는 TV를 보다 지루할 때마다 휴대전화로 옛날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두 매체를 동시 관람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난 연말 유튜브에서 개그우먼 김신영의 레전드 영상을 보며 키득거리다 MBC <가요대제전>에서 살이 쪽 빠진 둘째이모 김다비를 보고 흠칫 놀라기도 했다. 시공간이 뒤틀린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지인들과 안부를 주고받다가 뜻밖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워킹맘인 사촌 언니는 중학생 아들이 <1박 2일>의 광팬이라고 입을 뗐다. “요즘 TV에서 예전 방송을 자주 보여주잖아. 한번은 애가 10년도 더 된 <1박 2일> 재방송을 보고 있기에 엄마가 육아할 때 자주 보던 프로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고. 그러고 보면 요즘 애들한테는 ‘옛날 콘텐츠’라는 감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옛날 영상이건 지금 영상이건 똑같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시대니까, 오래된 프로도 재밌으면 별 위화감 없이 즐기는 거지.” 열 살 딸이 있는 대학 동창의 말은 더 놀라웠다. “요즘 초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선 <놀면 뭐하니?>가 완전 대세야. 싹쓰리도 그렇고 환불원정대 인기도 대단했지.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겨울 노래 구출 작전까지 챙겨 보는 걸 보니 좀 신기하긴 하더라. 거기 나오는 노래가 걔들한테는 그냥 ‘신곡’이더라고. 차에서 애가 ‘하얀 겨울’을 흥얼거리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미스터 투의 ‘하얀 겨울’을 흥얼거리는 초등학생이라니, 나는 달력을 보며 지금이 2021년인지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2020년대에 ‘하얀 겨울’을 신곡처럼 듣고 자란 아이는 훗날 미스터 투라는 듀오 그룹을 어떤 선상에서 기억하게 될까.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20대 후배에게 이 같은 우려를 전하자 뜻밖에 시니컬한 대답이 돌아왔다. “음악 평론가들이 쓴 글을 보면 ‘시대’를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잖아요. 1980년대 레트로 인디 음악이 어쩌고 하면서요. 그런 인식 자체가 좀 올드한 것 같아요. 우리 세대에겐 그냥 좋은 노래와 그렇지 못한 노래가 있을 뿐이거든요. 옛날 노래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 좋은 노래가 오래 살아남아 일종의 클래식이 된 거죠. 1980~1990년대는 실제로 좋은 노래가 많이 나온 시기이기도 하고요.”

후배의 말처럼 흘러간 양질의 콘텐츠가 클래식 대접을 받는 시기가 온 걸까. 최근 기성 방송사도 옛 콘텐츠 소환에 다시금 열을 올리는 분위기다. 지난 연말에는 과거 명품 드라마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드라맛집 오마주>,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을 10대만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전교톱10> 같은 프로그램이 우르르 쏟아지더니 이제는 ‘탑골 GD’ 양준일을 배출한 <슈가맨>에 이어 <싱어게인>이 음악계의 뉴트로 신드롬을 무섭게 견인하는 중이다. 대중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역주행 열풍이 다시금 지상파의 영역으로 흡수되면서 옛 콘텐츠 감상이 전보다 좀 시들해진 것도 사실이다. 누리꾼의 하위문화였던 ‘깡’이 공중파로 역수입됐을 때의 기분과도 비슷하다.

웃자고 시작한 일이 너무 본격적으로 흘러가는 느낌이랄까. 한편으로 복고 트렌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스스로가 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지상파로 옮겨간 이 트렌드가 ‘우리 세대는 이런 걸 보고 들으며 자랐단다’라는 일종의 세대 부심처럼 느껴진 탓이다. 이른바 MZ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이런 트렌드가 지겹지 않을까?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기성세대의 추억 팔이가 지긋지긋하지 않을까?

올해로 30대가 된 후배에게 이 같은 물음을 던지자 그가 “저도 ‘문특’ 같은 거 보는데요 뭘” 하며 피식 웃었다. 문특. ‘연예인 반, 일반인 반’이라는 뜻의 ‘연반인’ 재재가 진행하는 ‘문명특급’을 말하는 거였다. 얼마 전 100만 구독자를 넘긴 이 유튜브 채널은 과거 K-팝 가수들의 명곡을 재조명하는 ‘숨듣명(숨어 듣는 명곡)’ 시리즈로 현재 엄청난 파급력을 보여주는 중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숨듣명이야말로 ‘굿 올드 데이즈’를 환기시키는 콘텐츠가 아닐까 해요. 중·고등학교 때 진지하게 좋아하던 노래가 지금 들어보면 엄청 웃긴 경우가 많은데 그 노래를 만들고 부른 당사자들이 나와서 그게 왜 웃긴지 설명해주니 재미있죠. 선배 세대가 <싱어게인>에서 추억의 노래가 나오면 반가워하는 것처럼요. 그게 심각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보고 즐기면 그만이죠. 어차피 요즘 코로나 때문에 새로운 프로그램 제작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낙관적인 그 후배의 대답에 질문한 내가 머쓱해졌다. 젊은 세대의 고충을 지레짐작하고 공연히 핏대를 올리는 것이 내가 속한 세대의 고질적 반응처럼 느껴졌으니까. 후배가 최고의 ‘숨듣명’으로 꼽은, 머지않아 새로운 클래식의 반열에 오를 티아라의 ‘롤리폴리’를 들으며 나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이 기묘한 시대감각을 마음 편히 즐기기로 했다. 막상 해보니 막막함을 견디기에 이만한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