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고윤정
시작이라는 단어 앞에 선, 한없이 선명에 가까운 고윤정.
‘와, 정말 대단해!’ 고윤정은 요즘 매일 넷플릭스 메인 화면의 <스위트홈> 순위를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배우가 되기 전부터 거실 TV의 메인 화면은 넷플릭스였다. “‘내가 찜한 콘텐츠’가 아니라 ‘오늘 한국의 TOP 10 콘텐츠’ 1위잖아요. 메인 화면을 보면 ‘내가 이 드라마에 출연했구나’ 현실을 조금 실감해요.”
<사이코메트리 그녀석>으로 데뷔해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슬픈 사연을 지닌 방석 귀신 고등학생으로 등장했던 고윤정은 <스위트홈>에서 석궁을 쏘며 간병을 도맡는 박유리 역으로 순식간에 글로벌 인기에 탑승했다. 광고 모델로 커리어를 시작한 고윤정으로서는 명동 한복판 백화점 벽면에 사진이 걸렸을 때보다 심적으로 조금 더 신기한 상태다. “SNS에 외국어 댓글도 많아졌어요. 번역기를 돌린 듯 ‘달콤한 집’ 잘 봤다고 적힌 댓글도 있었죠(웃음).”
시리즈 중반에 등장하는 박유리는 천식을 앓고 있으면서도 타인을 위해 앞장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유리는 침착하고 강인하고 희생정신이 되게 투철한 친구예요. 은유 대사 중 ‘이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구나. 자기도 숨이 넘어가 죽을 판에’가 있는데, 그런 모습에서 큰 매력을 느꼈어요.” 하지만 그녀가 왜 사람들을 돕는지, 길섭과 어떤 관계인지, 왜 다나까 말투를 쓰는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유리는 왜 그랬을까 계속 고민하며 서브 스토리를 많이 써봤어요. 상상한 바를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천식을 앓고 있으니 어릴 때부터 병원에 들락날락하며 자연스럽게 간호사나 의사와 가까워졌을 거예요. 그러면서 아픈 사람을 도와줘야겠다 생각했을 테고. 아파봤으니까요.” 초여름 새벽안개 같은 외모와 달리 고윤정의 음성은 늦가을 오후의 괘종 소리처럼 다소 낮고 굵직하다. 이런 목소리는 출연작이 세 편인 이 배우를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오디션 때 이경, 은유, 지수, 유리 리딩을 마친 뒤, 감독님이 소방관인 이경의 대사를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하셨어요. ‘어느 소방서 누구누구입니다’라는 군대식 말투였는데 감독님이 그때 유리는 다나까를 쓰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현장에서 처음 김갑수 선배님을 뵙자마자 저도 모르게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안녕하십니까’가 바로 나오더라고요(웃음).”
‘이런 세상에서 무슨 예의가 필요하냐’는 편상욱(이진욱 분)의 말에 “살아남았으니까 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했던 박유리의 대사는 <스위트홈>의 메시지를 관통한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괴물 사이에서 <스위트홈>은 사람다움에 대해 질문한다. “그 대사에 고민이 많았어요. 정의 내리진 못했어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중요한 데 가치를 두고 살면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죠.” 만약 유리의 욕망이 발현되어 괴물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도 상상해본 적 있다.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돕는 액체 괴물로 변해 부상자들에게 몸에서 나온 점액을 발라 낫게 해줄 것 같아요.” <스위트홈>처럼 우리 사회가 무너진다면 고윤정 자신은 생존을 향한 의지가 강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저라면 어떻게든 살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가망이 없다 싶으면 의미 있게 죽을 것 같아요. 총알받이가 되든, 장기를 기증하든.”
고윤정은 3시간 만에 웹툰 <스위트홈>을 정주행하고 오디션에 참석했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평소 웹툰을 즐겨 보는 편이 아닌데 <스위트홈>은 순식간에 다 읽었어요. 이걸 드라마화하면 재미가 없을 수가 없겠다고 여기며 설레서 미팅에 갔어요. 피가 낭자하는 작품은 늘 재미있게 봐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좋아하는데 잔인한 장면을 유쾌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지녔죠.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일곱 번도 더 봤어요. 그리고 <기묘한 이야기>처럼 팀워크가 보이는 작품도 좋아해요. <스위트홈>은 단지 크리처물이 아니라, 유쾌하고 감동적이고 정말 모든 게 다 담겨 있었어요!”
<스위트홈>에서 또 하나의 인상적인 지점은 박유리를 비롯한 여자 캐릭터 넷이다. 이시영, 박규영, 고민시, 고윤정은 스스로를 지킬 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을 이끌고 극복한다. 다섯 살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발레를 하고 1~2년 피겨스케이팅을 했으며 수영도 꾸준히 해온 고윤정은 이시영에 대해 엄청난 팬심을 드러냈다. “함께 촬영하는 장면이 많지 않았는데 회식할 때 ‘존경합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운동 자체를 좋아해 시영 언니에게 배울 게 너무너무 많았고 할 말도 많았어요. 손가락 하나만 방향이 달라도 자극점이 다르다든가, 단백질 보충제는 뭘 먹는다거나 이런 얘기요(웃음). 제가 요즘 웨이트에 빠져 있거든요.” 괴물을 향해 불화살을 쏘고, 척추 기립근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드러나는 여배우들의 흔한 대화란 이런 것이다. 성격이 비슷하고 케미도 잘 맞는다는 네 배우는 맛있는 음식에 가장 진심이라고 했다.
배우를 시작한 계기는 늘 다소 극적인 구석이 있다. 현대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던 고윤정에게 그 기회는 어느 대학교 잡지에 실린 사진에서 비롯됐다. 그 사진을 본 소속사의 제안으로 광고를 찍은 것이다. 미술가 혹은 큐레이터 혹은 선생님을 꿈꾸던 고윤정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사실 전무했다. 하지만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 고윤정은 밀린 잠을 몰아 자듯 600~700편 가까이 영화를 봤다. “어느 감독이 좋으면 그 감독의 필모를 다 보고, 그러다 어느 배우가 멋지면 그 배우의 필모 역시 다 봤어요.” 밥 한 끼 먹지 않고 하루에 일곱 편을 내리 본 날도 있다. “앉아서 그림만 그리고 세상만사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변했어요. 생각의 폭이 달라지고 가치관에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 정말 운 좋게 훌륭한 작품 오디션을 보며 더더욱 연기에 대한 의지가 생겼죠. 연기를 시작하고부터 새로운 자극, 새로운 변화가 너무 좋아요.” 무엇보다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알게 되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 캐릭터를 만나며 저를 알아가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카메라가 어색했던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동물원이나 눈썰매장에서 사진 찍어줄 때 긴장하지 않잖아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카메라 울렁증이 있거나 카메라가 어색하다는 친구도 있어요. 누군가는 극복해야 하는 건데 나는 작고도 큰 능력을 가졌구나 싶었죠. 이 일을 안 했으면 몰랐을 거예요.”
과거로 더 후진하면 입시 미술에 매달리던 평범한 학생 고윤정이 있다. “공부는 대학교 갈 정도로만 했어요(웃음). 실기에 자신이 있었죠. 제 분야에선 늘 A 이상은 받아야 했던 만큼 승리욕이 강하고 열정적인 학생이었어요. 대신 포기할 건 빨리 포기했죠. 가령 수학 같은?(웃음) 친구도 두세 명 정도 좁고 깊게 사귀는 편이었고 교실 구석에서 재미있는 동영상 보길 좋아하는, 정말이지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별명은 고씨로 태어난 숙명을 따라갔다. “고씨라서 고슴도치, 고릴라, 고질라. 고등학교 때는 성만 불렸어요. ‘고’ 혹은 빨리 발음해서 ‘꼰정’.”
앞뒤 안 보고 한 가지만 파는 성격은 고윤정을 배우로 이끌었지만, 엄청난 분량의 당근 케이크, 스콘, 마들렌 생산에도 기여하고 있다. 베이킹에 빠져 시간이 날 때마다 빵을 굽고 있기 때문이다(<보그> 촬영장에도 상큼한 레몬 파운드케이크를 구워왔다). “지금 거의 실기 자격증 따기 직전이에요(웃음). 요리는 감이 필요한데 베이킹은 과학이에요. 온도, 습도, 계량 모두 정확해야 하거든요. 처음에 시험 삼아 쿠키를 구웠는데 성공했어요! 그 후로 맛있었다는 말을 잊지 못한 채 주섬주섬 만들어 나눠주고 있어요. 받기보다 챙기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주로 촬영 현장에 가져가다 보니까 손이 커졌어요. 마들렌은 한 번에 12개씩 오븐에 들어가다 보니 일고여덟 판은 구워요. 피트니스 클럽에 가면 어깨가 왜 그러느냐, 이제 베이킹 그만 좀 해라, 라고 트레이너들이 말해요(웃음).”
자칭 집순이로서 잠옷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잠옷을 선물 받은 뒤로 잠옷이 좋아 계절별로 수집 중이에요. 수트도 아닌데 위아래 맞춰 입는다는 게 어딘지 모르게 쾌감이 있더라고요. 요즘은 추워서 무조건 편하고 따듯하며 세탁이 쉬운 옷을 선호하지만 와이드 팬츠를 즐겨 입어요. 너무 캐주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갖춰 입은 티 나지 않은 느낌이 좋거든요. 디자이너는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에디 슬리먼의 디자인이 멋있어요. 남성복도 예쁘더라고요. 클래식하면서도 핏이 근사해요.”(우연인지 오늘 촬영을 위해 패션 에디터가 에디 슬리먼의 셀린 의상을 꽤 준비했다.)
고윤정의 차기작은 로스쿨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로스쿨>이다. “로스쿨 학생 전예슬을 맡았어요. 외모도 화려하게 꾸미길 좋아하고 친구 관계도 원만하며 명랑해요. 그리고 남자 친구와 사랑에도 충실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어떠한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가요. 시나리오가 아주 재미있고 캐릭터가 분명해서 좋았어요.” 연기에 대한 설렘으로 반짝거리는 고윤정은 새로운 시작과 다음이라는 단어 앞에 서 있다. “말을 조리 있게 못하고 아직 뚜렷하게 가치관이 정립된 상태도 아니지만 늘 하는 생각이 있어요. ‘얘가 걔였어?’ 생각이 들게 만드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로스쿨> 예슬이가 <스위트홈>의 유리였어?’ 이런 말 들으면 쾌감이 정말 엄청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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