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꿈꾸는 오늘의 향
자연과 인간의 공생. 우리가 꿈꾸는 오늘의 향.
2006년 에르메스의 마스터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Jean-Claude Ellena)가 선보인 ‘떼르 데르메스’ 라인은 여전히 남성 향수의 마스코트로 실존한다. 그에게 퍼퓸 하우스를 이양받은 크리스틴 나이젤(Christine Nagel)은 ‘떼르 데르메스’의 아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15년간 이어진 옴므 컬렉션의 공백을 향기롭게 채우기 위해 ‘반전의 미학’ 대신 기본으로 회귀를 택했다. 그 시작은 ‘H24’다. 크리스틴은 ‘떼르 데르메스’가 대지의 기운을 향으로 빚었다면 ‘H24’의 근원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가 있다고 설명한다. “도심 한복판, 콘크리트 벌판을 뚫고 작고 여린 새싹이 자라나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감동적이지 않나요?” 생존의 공포가 무겁게 내려앉은 3월, 그가 희망 가득한 꿈의 정원을 선물한다.
‘트윌리 데르메스 오 프와브레’ 론칭 당시 여기 ‘도산 에르메스’에서 당신을 만났는데, 결국 줌(Zoom)으로 재회했군요. 당신을 곧 파리 공방으로 초대할 수 있기를! 앞서 전달해드린 향수 샘플과 원료 키트는 인터뷰가 끝나면 제 사무실로 되돌아올 거예요. 아직 모든 게 ‘극비’거든요.
‘H24’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제 작업실로 향하는 길이 남성복 공방 앞으로 나 있어요. 그곳을 걸을 때마다 에르메스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Véronique Nichanian)이 쌓아둔 원단을 보며 영감을 얻곤 했죠.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요. 둘 다 직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요. 특히 직물의 감촉, 그 텍스처. 첨단 소재와 천연 소재의 혼합을 즐기는 취향도 일치하죠.
‘H24’는 남성 향수 특유의 강렬하고 관능적인 분위기에서 탈피했더군요. 우드 향조 일색의 남성 향수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H24’에는 건초와 자른 허브 향이 나는 클라리세이지를 선택했죠. 이토록 매력적인 클라리세이지가 향수의 메인 향료로 활용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지속력이 짧기 때문이에요.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클라리세이지 에센스를 중심(Backbone) 원료로 사용하고, 여기에 클라리세이지 앱솔루트를 혼합하는 기법을 적용했죠. 에센스가 10분간 첫 향을 담당하고 앱솔루트가 바통을 이어받아 오래도록 만끽할 수 있습니다. 저는 향을 어떤 형태로 묘사하는 편인데, ‘H24’ 향의 하늘로 치솟아 오르듯 쭉 뻗은 실루엣을 결정지은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클라리세이지예요. 분위기는 정적이지만 열망과 힘이 숨어 있는 향이라 소개하고 싶군요.
나르시스 앱솔루트도 주요 향료로 꼽히죠. ‘남자의 꽃’이라 불리는 나르시스는 향수에 극히 소량 활용되는 원료예요. 야성적이고 다루기 까다로운 향을 품었거든요. 저는 이 나르시스를 길들여보고 싶었어요. 겉으로는 남성미 넘치지만 자상한 속내를 가진 모습으로. 그렇게 변화를 줄 수만 있다면 ‘H24’에 넘치게 넣고 싶은 재료였고, 결국 실현됐죠.
로즈우드 에센스라는 희귀 원료도 눈에 띄어요. 앞에 놓인 천연 로즈우드 원액의 향을 맡아보세요. 꽃향기는 아니죠? 신선한 향이 일품인 우드 향료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H24’는 클라리세이지라는 보태니컬 향으로 기틀을 잡았어요. 그 주변으로 개운한 로즈우드 향을 심었죠. 우드를 중심으로 플로럴 향조를 배치하는 일반적 공식과 반대 노선이죠. 의도한 반전은 아니지만, 제 ‘코’가 익숙함을 거부하더군요(웃음).
최근 몇 년간 천연 로즈우드 에센스를 이용한 향수는 전무해요. 맞아요. 대부분 브라질에서 생산했는데 아마존 밀림이 점차 훼손되자 해당 정부에서 로즈우드 채취를 금지했고, 향수업계에서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우리 팀은 오래도록 로즈우드 에센스를 그리워했고, 결국 페루의 아주 작은 마을에 거주하는 생산자를 찾아냈죠. 이분들은 잘 자란 로즈우드를 뿌리째 뽑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베어 납품하는 방법으로 자연과 공생하죠. 로즈우드 에센스를 다룰 수 있는 향수 공방은 에르메스밖에 없다고 말해도 무방해요.
생명공학 기술로 원료의 품질을 개량하거나 응용하는 분야에 관심이 많은 조향사 중 한 명입니다. 로즈우드 에센스와도 연결 지어 고민할 수 있는 주제예요. 기술을 통해 재료의 향을 최대한 증폭시키거나 복제할 수 있다면 천연 원료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죠. 지금도 향료의 대부분을 아틀리에 주변 도시나 가까운 동유럽에서 조달해요. 에르메스는 작은 것 하나도 브랜드의 가치관은 물론 지속 가능 차원의 사회문제까지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결정합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으로서 이를 지키는 선례를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이러한 소명은 단순히 향을 선보이는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요.
그런 맥락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원료가 있죠. 스클라렌(Sclarene). 여기서 베로니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가 스클라렌의 향을 맡자마자 “내 공방에서 나는 향기야!”라고 소리쳤거든요(웃음). 캐시미어처럼 섬세한 직물을 다림질할 때는 위에 얇은 천을 덧대는데, 그 순간 뜨거운 금속 열판과 아래 놓인 천이 만나며 피어나는 향과 유사합니다. 흔히 ‘메탈’ 하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와닿는데요. 뜨겁게 달궈진 철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던하고 관능적인 분위기를 뿜어내죠. 스클라렌도 첫 향은 은은합니다. 아주 미세하고요. 하지만 시향지에 뿌려두었다가 2~3일 뒤에 한 번 더 맡아보세요. 오늘보다 한층 증폭된 향이 풍길 거예요. 향이 계속 살아난다는 점은 굉장한 일이죠.
‘빛의 공간’, ‘감각적인 투명함’, ‘정교한 짜임과 드러나지 않는 이음매’ 등 ‘H24’의 수식어와 에르메스 제품 디자이너 필립 무케(Philippe Mouquet)의 보틀은 일맥상통해요. 초창기에는 필립에게 ‘미래적인 무언가’를 원한다고 추상적으로 설명했어요. 상의를 거듭한 끝에 향수병을 위에서 누른 듯한, 필립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기역학적 라인이 돋보이는 지금의 ‘H24’ 보틀이 탄생했죠. 이러한 방식은 에르메스만의 독보적 프로세스입니다. 조향사가 향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아요. 매달 크리에이티브 팀 전원이 만나 회의를 하는데, 향수를 포함한 모든 에르메스 제품에 대해 일관성과 가치를 합의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H24’를 제작할 때도 저와 베로니크 니샤니앙, 필립 무케를 비롯,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 알렉시 뒤마(Pierre-Alexis Dumas)와 퍼퓸 & 뷰티 부문 최고경영자 아녜스 드 빌레르(Agnès de Villers) 모두 한자리에 모여 상의했죠. 향에 어울리는 보틀과 박스 패키지, 광고 비주얼, 마케팅 요소까지 함께 의논하고 조향사로서 제 의견도 적극 피력했습니다. 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은 제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상상이 눈앞에 현실화되는 경험으로 돌아오고 늘 벅찬 감동을 줍니다. 공동 작업물인 ‘H24’ 보틀 이야기로 돌아와 덧붙이자면, 현대 남성의 도약과 에너지를 매끈한 선으로 구현했습니다. 리필 가능하고, 종이 박스는 100% 재생지예요. 회색빛 패키지를 장식한 라임 그린 컬러의 선은 공간의 경계를 한정하는 동시에 안팎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H24’란 이름도 그 회의에서 정해졌겠군요. 네, 자연스럽게요. 시간(Hour), 남성(Homme), 에르메스의 H, 그리고 하루와 에르메스 부티크가 위치한 파리 생토노레 포부르 24번가(24, Faubourg Saint-Honoré)를 뜻하는 숫자. 이를 아우르는 이름이 ‘H24’죠.
‘H24’를 예술 작품에 비유한다면? ‘녹색 벽’이라 불리는 패트릭 블랑(Patrick Blanc)의 수직 정원. 파리 ‘케 브랑리 제1 예술박물관(Musée des Arts Premiers du Quai Branly)’에 설치된 것이 유명하지만 최근작 또한 큰 울림을 줍니다. 도시라는 공간과 자연이 주는 생동감,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죠. ‘H24’처럼요.
직물 팔찌, 타투, 브로치, 종이 오브제 등 향을 즐기는 다채로운 아이템이 인기입니다. ‘H24’를 어딘가에 담는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피부. 식상한 답일 수 있지만 피부야말로 향을 간직하는 가장 완벽한 매개체입니다. 피부와 향수 사이에는 특별한 연결 고리가 존재하죠. 피부에 남은 잔향은 오직 나만의 고유한 향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피부에서 나는 향이 궁금하군요. 현재 개발하는 향수죠! 향수를 무척 사랑하지만 사실 평소에는 즐기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즐기지 못하죠. 제 피부는 ‘시향’을 위한 도구니까요. 오롯이 다음 향수를 바르고, 음미하고, 남기는 팔레트입니다. 향수를 뿌리기 위해서라도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여행이 힘든 시기입니다. 새로운 영감은 어디에서 받나요? 여행은 감각을 일깨우는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걸을 때마다 펄럭이는 인도 사리(Sari)의 색, 바위에 부딪히는 물결, 에르미타주 미술관(Hermitage Museum)에 전시된 그림… 주변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죠. 에르메스 하우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에르메스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제공해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깃든 장인들의 작품과 노하우 덕분이죠. 이를 가까이에서 누리는 특권을 가진 에르메스 조향사로서 사람들에게 ‘향’으로 평범했던 일상의 추억을 소환하고 희망을 전할 의무가 있어요.
- 에디터
- 이주현
- 사진
- Courtesy of Hermè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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