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무결한 그녀, 박규영
박규영과 함께 뛰어보자 폴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스튜디오의 조명이 초를 쪼개며 쉴 새 없이 터지는데도 박규영의 눈빛은 움츠러들 줄 몰랐다. 조명이 꺼지자 스태프의 스마트폰 카메라를 보며 멋쩍은 웃음으로 돌진한다. 눈썹을 한껏 치켜세우고 눈을 반쯤 감더니 “이건 요즘 제가 미는 표정이에요”라는 말을 남기고 막 피려는 목련처럼 웃음을 띠운다. 다시 돌아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박규영은 숨을 참았다,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말아 접었다를 반복했다. 시시각각 기운이 변하는데도 모든 순간이 자연스럽고, 무엇보다 분방하다. 그는 내내 편안해 보였다.
박규영은 현재 방영하는 tvN 드라마 <악마판사>의 촬영을 끝내고 KBS2 <달리와 감자탕>의 촬영 막바지를 지나고 있다. 이 두 드라마에 앞서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와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에서 얼굴과 이름을 크게 알렸고, 그 후 펼쳐진 상승 곡선 위를 천천히, 차분하게, 차곡차곡 걷는 중이다. 지난 2015년 <대학내일> 표지에 처음 등장한 후 곧바로 엔터테인먼트사에 스카우트되고 웹드라마와 단막극을 시작으로 화제성 높은 드라마의 조연으로 자주 얼굴을 비치다 드라마에서 각인될 만한 캐릭터를 맡았다. 배우라면 모두 걷고 싶은, 크게 가파르지 않지만 그리 답답하지도 않은 계단을 오르며 경력을 쌓고 있는 셈이다. 9월에 방영할 <달리와 감자탕>은 지상파 첫 주연작이자 박규영이 많은 부분을 이끌고 나가야 하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비슷한 또래의 상대역 김민재와 합을 맞춘다.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명문가의 딸이지만 세상 물정에는 약한 주인공 역할을 맡았습니다. 어떤 면에선 조금 전형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지만, 박규영이 연기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새롭게 다가오기도 해요. 제가 맡은 김달리는 어느 날 갑자기 자산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일하게 남겨진 미술관 하나를 지키면서 고군분투하는 캐릭터예요. 제가 맡아온 캐릭터과 완전히 달라요. 그동안 털털하다, 시원시원하다, 이런 평을 듣는 캐릭터가 많았잖아요? 풀어져 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도 했고요. 그런데 달리를 연기할 때는 반경을 많이 좁혔어요. 좀 정제된 느낌으로 연기했어요.
야구 배트를 휘두르던 <스위트홈>의 지수나 술주정 부리던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주리와 비교하면
확실히 분위기도 호흡도 다를 것 같아요. 이 캐릭터를,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요? 여태까지는 어떤 캐릭터인지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성격이 어떻지? 나와 닮은 지점이 많나? 연기하면서 ‘척을 하는 순간’보다 진짜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나올 수 있을까?”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면 재밌거든요. 사실 이야기 전체를 보는 안목까지는 없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좀 달라졌어요. 이 작품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혼자 생각도 많이 하고. 그래서 <달리와 감자탕>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본이 진짜 재밌어서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빨리 결정한 것도 있고요.
박규영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정리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연기가 자연스럽고 표현이 전형적이지 않다.” 아, 그런 코멘트를 많이 들었어요. 그 부분 때문에 절 찾아주는 감독님들도 계셨고, 스스로도 그 부분에서 재미를 많이 느꼈고요. 너무 좋죠. 하지만 요즘은 전형적인 것의 대단함에 대해 또 새롭게 알게 됐어요. 전형적인 연기가 실은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것인지에 대해서요. 자연스럽기만 한 연기로 카메라 너머의 대중을 힘 있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두 가지 스타일 모두를 버무릴 수 있다면 힘 있는 무기가 될 것 같아요.
촬영장에 들어설 때 주먹을 불끈 쥐는 스타일인가요, 아니면 생각과 고민이 많아지는 스타일인가요? 사실 현장에선 아무것도 피할 수가 없어요. 어려운 문제가 있고, 정말 못할 것 같아도 주저하면 손해 보는 건 저밖에 없다는 생각이에요. 일단 돌파해보는 스타일이에요. 저 자체는 굉장히 나약하고, 한계도 자주 느끼지만 일을 못해내는 것은 또 싫어요. 현장은 ‘연습’이 아니고 ‘일’이잖아요. 제가 이것을 돌파하지 않고 적당히 뒤로 빠져버리면 제가 뭘 한 건지, 대중은 뭘 본 건지 의미가 없어져버리니까요.
승부욕보다는 책임감이군요. 남과 비교하거나 누구보다 내가 더 잘해야지, 이런 느낌은 아니고 그냥 저에 대한 승부욕인 것 같아요. 저랑 싸워서 지고 싶지가 않고, 뭔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느낌을 받는 게 좀 별로예요. 사실 현장이라는 게 많은 시선이 있고 변수도 많지만, 그럼에도 그 한계를 넘는 저를 볼 때 쾌감이 있는 것 같아요.
지난 인터뷰를 보면 늘 “일을 잘하고 싶다” “진정성 있게 일하고 싶다”라는 언급이 많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 연기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저의 성향 자체가 하는 일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살자는 쪽이에요. 뒤처지는 걸 좋아하지 않고요. 물론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제가 한 일에서는 부끄럽지 않고 싶어요. 애매하게 하는 것보다 일단 최선을 다하는 게 좋으니까요.
배우로서 나의 차별점 혹은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아, 어려운 질문이에요. 제가 좀 생각을… 저도 고민을 많이 하는 부분이라서요. 인터뷰 끝날 때쯤 대답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뭐예요? “피곤하지?” “힘들지?” 이런 말 많이 들어요. 아직 주변 사람들은 제가 배우가 되었다는 사실을 신기해해요.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되게 많이 보이더라?” 이러면서요.
그럼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은요? “요즘 몸과 마음이 어때?” 전 그게 궁금해요. 안부 인사인 것 같아요. “몸 아픈 데 없으면 마음은 괜찮냐?” 이렇게 자주 물어요. 둘 다 건강한지가 가장 궁금하거든요.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사는 얘기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박규영의 몸과 마음은 요즘 어떤가요? 둘 다 모두 건강한 것 같아요. 생각보다 체력도 괜찮은 것 같고. 촬영이 많이 없는 날엔 꾸준히 발레를 하려고 해요. 몸 관리를 하고 근육에 텐션이 들어가면 마음이 더 좋아져요. 운동을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그 정도 운동은 필수인 것 같아요. 마음도 가끔 불안정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중심으로 돌아오는 회복력이 좋은 것 같아요. 평정심을 찾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그런 면에선 자부심이 좀 있고요.
비법이 있나요? 무언가 물리적 행동을 한다기보다는 내가 오늘 잘한 것, 나를 칭찬해줄 만한 것을 많이 찾아봐요. 막 거울 보면서 “너 잘했어” 이러진 않지만 오늘 아침의 나보다 일과 후의 내가 조금 달라졌네? 이 정도는 해냈네? 하면서요.
최근에 자신을 칭찬한 일이 있다면 자랑해주세요. 연기라는 것이 감정을 쓰는 일이다 보니, 내가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나 변수 때문에 감정이 안 나올 때가 있는데 그것을 이겨낸 적 있어요. “너 되게 집중 잘했다”고 칭찬해줬죠. 모든 일이 다 어렵겠지만, 시선 속에서 하는 저의 이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에 영화 <미드소마>를 인상 깊게 봤는데, 정말 천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아리 애스터 감독도 좋았지만 플로렌스 퓨의 연기도 진짜 좋았어요. 감정의 폭을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수많은 스태프 앞에서 저런 폭으로 연기할 수 있지…
배우로서 크게 성공한 나를 상상해본 적 있나요? 최종 목표랄까, 최고 정점이랄까, 그런 상상을 할 때 박규영은 어떤 모습인가요? 아주 자유로운 모습이에요. 심리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운 상태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있는 모습이 저에겐 성공인 것 같아요. 배우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건 아니지만, 제가 상상하는 성공이라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근데, 이게 매해 달라요. 얼마 전에는 캐스팅만 돼도 얼마나 좋을까, 대본이 들어오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작품에서 이 정도 롤을 맡으면 걱정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매번 변하더라고요. 요즘 저의 목표는 이렇습니다.
좋아하는 배우를 케이트 블란쳇, 제이크 질렌할 등 매번 다양하게 언급한 점이 인상적이어서 요즘의 ‘롤모델’은 누군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요. 요즘은 캐리 멀리건입니다. 제가 감히 한 번에 따라갈 순 없겠지만, 그 배우가 주는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랑스러우면서도 온화하고 중심이 되게 강하게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되면 참 좋겠어요.
광고 촬영이 겹쳐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머물렀고,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인터뷰가 끝났는데도 박규영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녹음기의 전원을 끄는 순간까지도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강점이 뭔지 다시 묻지 않았다. 그가 내내 보여준 모습과 말이 하나의 덩어리로 단단하게 뭉쳐 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편한 소파 자리를 권하는 친절에 “저는 어떤 자리든 편합니다!”라고 답변하는 야무진 모습, “제가 캄(Calm)한 편입니다”라고 말할 때의 귀엽게 풀어진 표정까지도 자유롭고 강인한, 그래서 자연스러운 박규영 그 자체였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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