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최초의 에투알이 된 발레리나 박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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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최초의 에투알이 된 발레리나 박세은

2021-12-12T17:19:11+00:00 2021.12.13|

파리오페라발레의 별이 된 박세은. 더 이상의 증명은 필요 없고 자신의 춤을 추게 된 그이지만 오로지 관객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멀티 컬러 비즈를 수놓은 슬리브리스 롱 드레스는 주하이르 무라드 오뜨 꾸뛰르(Zuhair Murad Haute Couture).

거대한 볼륨의 블루 실크 드레스 자락을 연결한 검정 벨벳 점프수트. 블랙 실크 뷔스티에의 가슴은 장미꽃 장식을 가미했다. 드레스는 스키아파렐리 오뜨 꾸뛰르(Schiaparelli Haute Couture), 골드 메탈 초커는 아넬리스 미켈슨(Annelise Michelson).

멀티 컬러 비즈 장식 톱에 거대한 튤 스커트를 매치한 드레스는 알렉시스 마빌 오뜨 꾸뛰르(Alexis Mabille Haute Couture).

루렉스 메시 케이프는 돌체앤가바나 알타 모다(Dolce&Gabbana Alta Moda), 물결 모양 골드 메탈 더블 드레이프드 링은 아넬리스 미켈슨(Annelise Michelson).

박세은은 지난 6월, 자신이 주역으로 선 <로미오와 줄리엣> 개막 공연 후 파리오페라발레(POB)의 에투알로 지명되었다.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별이라는 뜻으로,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를 일컫는다. 외국인 단원 비율을 5%로 제한하는 이곳에서 동양인 최초의 에투알이다. 10년 전 박세은은 국내외 발레단의 솔리스트 제안과 안정된 행보를 뒤로하고, 파리로 날아가 POB의 오디션을 보았다. 2011년 준단원으로 입단, 2012년 정단원 카드리유(군무), 2013년 1월 코리페(군무 리더), 2013년 11월 쉬제(군무와 주역을 오가는 솔리스트), 2016년 프리미에 당쇠르(제1무용수), 2021년 6월 에투알이 되었다. 9월 24일 밤, POB 단원과 발레학교 학생 등 250여 명이 서열에 따라 줄지어 퍼레이드를 펼치는 데필레(Défilé, 행진)에 이어 갈라 무대에 오르며 박세은은 정식으로 그날의 별(에투알)이 되었다. 집과 POB 연습실을 오가며 단순한 일상을 보내는 그가 <보그>를 위해 잠시 외출에 나섰다.

요즘 어떤 작품을 연습 중인가요?

안무가 프레더릭 애시튼(Frederick Ashton)과 음악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의 작품 <랩소디(Rhapsody)>를 준비하고 있어요. 파리오페라발레가 ‘러시아의 밤’을 맞아 선보이는 세 편의 작품 중 하나죠. <랩소디>는 1996년에 올린 뒤 15년 만에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올리는 작품이기도 해 부담이 크죠.

매일이 무척 규칙적일 텐데요. 일과에서 꼭 지키려 애쓰는 부분도 궁금해요.

오전 10시 30분에 클라스(몸을 푸는 단계)를, 12시에서 1시 30분까지 리허설을 해요. 에투알이 되면 발레단이
정해주는 연습량이 적어져요. 지금까지 해온 연습량의 3분의 1 정도죠. 발레단에선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이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항상 개인 연습 시간을 갖죠. 연습이 끝나는 저녁에는 재활 치료를 받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어요. 말하고 보니 단순한 일상이네요. 또 하나, 매일 빼놓지 않는 것은 모닝커피예요.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잠을 깨는 버릇이 들었어요. 좋은 습관은 아니죠?(웃음)

오뜨 꾸뛰르를 입고 <보그> 화보 촬영을 했어요. 발레복이 아닌 의상을 입고 춤동작을 하면 어떤 느낌인가요?

오뜨 꾸뛰르, 오뜨 주얼리 촬영을 꽤 해봤지만 여전히 어려워요. 발레는 몸을 곧게 펴려 하는데, 패션 촬영은 거꾸로 어깨를 안쪽으로 가져와 굽히는 듯한 포즈를 원해요. 이쪽 세계는 이렇구나, 배우면서 따라가죠. 발레 의상은 몸 선을 드러내는 딱 맞는 형태도 있지만, 오뜨 꾸뛰르처럼 볼륨 있기도 해서 의상 자체가 어색하진 않아요. 촬영 슛이 들어갈 때면 연습복에서 발레 의상으로 갈아입고 무대에 나설 때의 기분 같기도 하죠.

9월 24일, POB 단원과 발레학교 학생 등 250여 명이 퍼레이드를 펼치는 데필레에 참가했죠. 에투알로 소개되는 공식적인 자리였는데요, 기분이 어땠나요?

에투알들이 한결같이 이런 얘기를 해요. 데필레는 마법 같은 순간이면서 기분 좋은 스트레스의 연속이라고요. 저 역시 데필레를 앞두고 설레기만 하다가, 막상 나서니 잔뜩 긴장했어요. 테크닉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행진인데도 말이죠. 아마 그날 저녁에 공연이 있어서 더 그랬나 봐요. 무척 감동적이었지만 사실 기분이 어떻다 느낄 새 없이 빨리 지나갔어요.

에투알이 되고 “이제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돼, 너의 춤을 춰”라는 축하 인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죠. 콩쿠르에 나가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편안하게 무대에 오르나요?

아직 에투알로서는 오프닝 갈라 무대에만 섰어요. 12월 1일 <랩소디>를 할 때 두고 보려고요. (웃음) 나만의 춤, 나만의 예술을 보여드린다는 마음으로 즐기면서 출 거 같아요. 프리미에 때부터 나의 춤을 좋아해주는 팬이 생겨났어요.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기에 힘이 되죠. 발레리나에게 관객은 매우 중요해요. 저는 관객을 위해서 춤을 춰요.

투명한 러플 튤 코트에는 크리스털 리본을 장식했다. 튤 코트는 지암바티스타 발리 오뜨 꾸뛰르(Giambattista Valli Haute Couture), 크리스털 후프 클립 귀고리는 헬렌 주벨디아(Hélène Zubeldia), 가죽 부츠는 로저 비비에(Roger Vivier).

강인함을 숨긴 발레리나의 가녀린 팔과 손가락에 걸친 해초 잎 모양의 은도금 반지는 아넬리스 미켈슨(Annelise Michelson).

많은 댄서가 ‘나를 위한 춤’을 말하곤 하는데요.

나를 위해 춤추지 않아요. 관객에게 나의 춤을 전달하고, 그들이 영감을 받아 내게 되돌려줄 때 춤추는 이유를 깨닫죠. 그래서 공연이 끝나면 관객과 선생님들의 피드백에 굉장히 신경 써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어떻게 닿았을지 궁금하죠. 발레는 정답이 없는 예술이지만, 저는 작품마다 관객과 소통하려고 해요.

관객과의 소통이 발레리나로서 사명인가요?

고전부터 현대까지 여러 무용수의 춤을 많이 봐요. 그의 춤은 무엇을 얘기하려 할까, 춤의 원동력은 뭘까, 살피죠. 선후배들과 영상을 공유하고 각자 느낀 점을 얘기하기도 해요.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관객에게 춤을 전달하고자 하는 무용수가 있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가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전자처럼 관객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사명감이 갈수록 커져요.

POB에서 춤추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국내와 네덜란드 발레단의 솔리스트 입단 제의를 뿌리치고 프랑스로 갔죠. 오디션에 응시하던 당시 여자 무용수만 100여 명이었는데 3등을 했어요. 1등만 정단원이 되지만, 준단원으로 입단 제의를 받게 되죠. 그 결과가 당시는 어떻게 느껴졌는지 궁금해요.

3등을 확인한 날에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어요. 근처에서 좋아하는 발레 DVD를 사면서 차분히 다음 기회를 기약했죠. 저를 과소평가하는 편이에요. 결과가 좋지 않다고 힘들어하기보다 그럴 수 있다고 여기죠. 과거에 힘들었던 일을 누가 물어보면 기억나지 않을 정도죠.

2011년 준단원으로 입단, 2012년 정단원 카드리유, 2013년 코리페에 이어 쉬제, 2016년 프리미에 당쇠르, 2021년 6월 에투알이 되었습니다. 10여 년의 세월을 돌아보면 기분이 어떤가요?

다른 발레단에 갔다면 더 빨리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지 모르죠. 어찌 보면 불확실한 꿈을 향해 계속 모험을 했어요. 제가 에투알이 되기 전인 서른 살 생일에도 꿈을 간절히 꿨고, 그런 꿈이 있다는 것 자체로 감사했어요. 꿈을 이룬 지금은 너무 좋죠. 지난 10여 년의 고생을 누군가 알아준 것 같고요. 생각해보면 참 파란만장했어요. 러시아 춤을 마스터했다가 프랑스 춤을 해야 했고, 영어에 이어 프랑스어도 배워야 했고, 한국 문화도 잘 알지 못하는데 프랑스 문화도 익혀야 했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도움이 되었고, 재미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POB는 1993년 첫 내한 공연 이후 방한이 없었죠. “내한 공연을 하게 된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오고 싶다”고 말했죠. 가장 좋아하는 작품과 배역인가요?

처음 <로미오와 줄리엣>을 봤을 때는 재미있지 않았어요. 어느 날 이 작품을 잘 표현한 무용수의 영상을 보면서, 매력을 알았죠. 그 후 파고 파서 저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린 기억이 나요. 이 작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어려우면서도, 감정선이 깊어 여러분께서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열 살 때 국립발레단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반짝반짝하는 의상이 예뻐 보여 국립발레단 문화학교에 들어갔어요.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겠어요.

여태껏 반짝이는 발레 의상에 끌린 줄 알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차이콥스키의 음악 영향도 컸던 거 같아요.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차이콥스키와 쇼팽이에요. 제 춤의 원동력은 음악이에요. 멋진 클래식이 나오면 가만히 있지 못하겠어요. 당장 춤을 추고 싶죠.

연습 외에 집에서도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나요?

그렇지 않아요. 공연을 앞둔 음악만 계속 듣거든요.

가수들이 자기 노래도 계속 들으면 질린다는데, 그런 적 없나요?

전혀요. 들으면 들을수록 한 마디 한 마디 음악 색깔이 달라지고, 몰랐던 부분을 발견해요. 그 정도로 들어야 좀 더 편하게 춤을 출 수 있어요. 보통 아침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연습한다고 하지만, 저뿐 아니라 다른 발레리나들은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없을걸요. 발레는 일상의 연속이거든요. 길을 걷는 중에도 머릿속에 있고, 지하철을 탈 때도 공연 음악을 들으며 박자를 익히죠. 가끔은 잠을 못 잘 정도라 괴롭기도 해요.

프레더릭 와이즈먼(Frederick Wiseman) 감독이 파리오페라발레를 담은 다큐멘터리 <라 당스(La Danse)>에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Maurice Bèjart)의 이 정의가 나와요. “댄서의 반은 수녀, 반은 복서다.” 다큐멘터리에선 댄서는 육체적인 힘, 노력, 에너지도 갖춰야 한다고 해석하죠. 당신에게 댄서, 발레리나는 어떤 의미인가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지금 제게 발레는 관객과의 소통이에요. 다만 관객에게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면 예술가의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단번에 단정 짓지 않았으면 한다는 거예요. 물론 예술은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 사람이 왜 저렇게 춤을 출까, 한번은 생각해봐주세요. 앞서 “너의 춤을 춰”라고 말씀해주신 선생님과의 에피소드가 있어요. 어느 무용수가 <오네긴>의 타티아나를 표현하는 영상을 보면서, 나의 타티아나가 틀린 것 같았어요. 내 연륜이 부족해서 감정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고 여겨졌죠. 이 부분에 대해 선생님은 “아니다, 너만의 아픔을 너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감정을 크게 터트리지 않고 절제된 슬픔을 표현한 제 의도를 알아봐주셨죠. 이렇게 내 예술을 알아주는 관객이 있다면 너무나 행복할 거예요. 관객이 보시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무대도 있겠지만, 무용수마다 표현이 다를 수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나아가고 싶어요. 세상을 보는 관점도 그렇잖아요. 좋은 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나은 삶으로 이끌 수 있죠. 발레는 내게 인생 철학이기도 해요.

당신의 미래는 어떨까요?

발레만 생각하지 미래 계획을 따로 세우지 않았어요. ‘오늘의 발레’를 하기에도 바쁘거든요. 돌이켜보면 열심히 발레를 하다 보니 기회가 왔고, 선택해야 할 때 확신이 있었어요. 이거 할까, 저거 할까 고민하지 않았죠. 그만큼 예술은 준비된 자에게 자연스럽게 길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은퇴 후에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발레와 연관됨은 분명하고, 확신에 차서 선택하리라 믿어요. (VK)

한 송이 꽃 같은 옐로 컬러 미니 드레스와 가죽 장갑은 발렌티노 오뜨 꾸뛰르(Valentino Haute Couture), 펌프스는 피에르 아르디(Pierre Hardy).

실크 새틴 자수를 더한 루렉스 메시 케이프는 돌체앤가바나 알타 모다(Dolce&Gabbana Alta Moda).

크리스털과 플렉시글라스로 장식한 헤드피스는 돌체앤가바나 알타 모다(Dolce&Gabbana Alta Mo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