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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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의 품격

2022-09-20T16:41:34+00:00 2022.02.24|

설득과 타협은 없고 주장과 결론만 남은 시대. 잃어버린 언어를 그리워하다.

싸움은 기세다. 선제공격을 하고, 반격을 당해도 당황하는 기색을 들켜선 안 되며, 상대의 약점은 과감하게 물어뜯고, 지겠다 싶으면 규칙의 공정성이나 상대의 태도 따위를 물고 늘어져 판을 무효로 만들어야 한다. 몸싸움이나 말싸움이나 마찬가지다. 센서를 부착하고 기계로 채점하는 펜싱 경기가 아닌 이상 심판을 봐줄 제3자들은 대개 싸움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져도 이긴 척해야 한다. 혹시 내가 틀리면 어쩌나, 이렇게까지 품위 없이 굴어도 되나 하는 회의는 금물이다. 말문이 막히면 귀 막고 메롱 메롱을 하거나 사이렌 소리라도 내야 한다. 싸움이라면 그렇다. 어느 정도 이성을 내려놓아도 양해가 된다. 그런데 토론은? 토론은 싸움인가? 토론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인가? 토론에서 이기기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파렴치한 짓을 하는 건 괜찮은가? 이 무슨 유치한 질문인가 싶은데, 매일 토론인지 싸움인지 모를 것들을 여기저기서 보노라니, 근원적 회의가 드는 것이다. 도대체 토론이란 뭔가.

얼마 전 인터넷상에서 벌어진 논쟁을 지켜본 적 있다. 익명의 두 참가자는 정치권이 청년 세대를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 잘잘못을 논했다. 양쪽 모두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며 논리 정연한 문장을 구사했다. 흔한 방송 토론과 달리 인터넷 토론은 즉석에서 팩트 체크가 가능하고 다양한 레퍼런스를 활용할 수 있어 오히려 심도 있게 전개될 여지가 있다. 다만 그 정도 성의와 지력을 가진 사람들이 무급으로 인터넷 공론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얼마나 감사한 볼거리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참가자 사이의 논리, 지식 격차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예의 한쪽이 열심히 가르치고 다른 쪽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말을 꼬면서 중언부언하는 형세가 펼쳐졌다. 감정이 이성을 침범할 때가 온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역시 페미는 말이 안 통한다니까’ ‘알고 보니 이거 일베 아냐. 갈 길 가쇼’ ‘페미들은 지 마음에 안 들면 다 일베래’ 정도의, 말하자면 ‘얄라리 얄라셩’ 수준의 흔한 후렴구가 오간 후, 토론으로 시작한 대화는 언쟁으로 종료되었다. 슬픈 광경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언어가 점점 참혹해지고 있다고, 사회 여러 분야에서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고, 반지성주의와 과도한 자기애가 현대인의 병폐라고 한탄한다. 정치 성향, 국적, 경제 수준, 인종, 성별, 나이, 결혼 여부, 자녀 유무, 이용하는 커뮤니티, 은어, 하다못해 우연히 사용한 손동작 하나까지 따져서 각각의 그룹에 이런저런 라벨을 단 다음 모두를 타자화하고 소통을 포기한 채 즉각 혐오, 배척, 조롱으로 넘어가는 사회는 과연 두렵고 답답하다. 하지만 그게 어제오늘 일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페미’ 가 ‘빨갱이’를 대체하고, ‘전라도’에 ‘조선족’이 더해진 식이다. 다만 인터넷이라는 사고와 주장의 증폭기가 있고, 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더 크게 느껴질 따름이다. 그 난장판 속에 누군가는악행을 배우고, 누군가는 외려 정의를 배운다. 그러니 이 환경을 불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안타까운 것은 논리 정연하고 예리한 언어를 사용할 의무가 있는 자들조차 세태에 휩쓸려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사이버 렉카’와 경쟁하고 정치인들조차 깐족거려서 상대를 열 받게 만드는 게 토론을 잘하는 거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잠재적 지식인이 싸구려 밈을 공격용으로 휘두르는 낙차는 놀랄 일도 아니다. A는 악, B는 선, C는 동지, D는 적이라는 식의 생략과 단순화는 대중 언어의 특성이다. 그런데 요즘은 거기에 논리를 부여할 의무를 진 사람마저 대중의 언어를 흉내 내고 있다. 기침 한 번만 해도 정치, 사회,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그래서 한마디를 천금같이 써야 할 정치인이나 기업가조차 SNS에 앞뒤 잘라먹고 화두만 툭 던지고는 그것이 일으킨 난장판 속에 지지율과  팔로워 숫자를 계산하느라 바쁘다. 불타는 로마를 보며 시를 지었다는 네로 황제의 모습이 그려진다. 많은 사람에게 날벼락이 될 수도 있는 말을 할 땐 다짜고짜 결론으로 치닫는 게 아니라 설득하려는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게 아닌가. 급기야 대통령 선거를 하는데 후보 토론회조차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22년 벽두의 풍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대선 후보 토론회는 더 절망적이었다. 민감한 질문에 “이미 다 해명하지 않았냐. 왜 자꾸 같은 말 시키냐”고 역정 내는 사람, 팩트 체크가 어렵지도 않은 세상에 “그런 말 한 적 없다. 확인해보시라”고 기세 좋게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급기야 어느 후보는 상대에게 “답변을 길게 하시니 내가 질문할 시간이 없다”고 불평했다. 나의 질문은 사실 질문이 아니라 주장이며 네가 뭐라 답할지는 안중에 없다는 자백이었다. 초등학교 전교 회장 선거 유세장 같다는, 초등생에게 실례되는 관전평을 내놓은 시청자도 있었지만 주요 정당은 이날 토론에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각각 폭언과 실언으로 유명한 후보들이 무난하게 시간을 때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정권을 잡으려는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지는 미궁으로 남았다.

1차 대선 토론이 끝난 며칠 후, 양강 후보들은 일제히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이벤트에 나섰다. 그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황당한 현상이었다.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가 의아하던 차에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보고 단서를 얻었다. 사회자는 각 정당을 옹호하는 정치 해설가들을 앉혀두고 자주 노무현의 유명한 연설이나 토론을 인용했다. 그 비전이 실현되었는지, 그의 철학에 동의하는지와 별개로 아름답고 힘 있는 언어이긴 했다. 사회자가 “이런 연설도 있었지요”라고 운을 떼면 정치 해설가들은 각자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이야말로 그 철학을 실현할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고 보면 추모 이벤트는 제 입으로 국가의 비전과 정치 철학을 해설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이미지 덮어쓰기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대선 캠페인이 몇 달째인데 국민의 가슴을 울리는 명언 한마디 없는 상황을 고려하면 고인의 언어라도 훔치려는 조급함이 이해가 갔다.

흔히 한국인은 토론에 약하다고 한다. 유교적 위계에 길들여져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주저한다는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래서 토론을 이야기할 때면 언론에선 흔히 노예제 폐지를 끌어낸 링컨-더글러스 대논쟁이나, TV 대선 토론의 시초가 된 케네디-닉슨 토론 같은 해외 사례를 인용한다. 하지만 한국이야말로 세 치 혀로 거란을 물리치고 강동 6주를 받아왔다는 서희의 전설이 있는 나라이고, 조선 시대 임금과 신하들은 하루 세 번씩 토론을 하며 정책을 결정했고, 성리학의 대부 퇴계가 까마득한 후배 고봉과 8년 동안 서신으로 사단 칠정 논쟁을 벌인 역사가 있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에게 토론은 한 번도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전통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토론에서 중요한 건 승부가 아니다. 그것은 설득하고 설득당하면서 답을 찾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잃은 언어다. 설득과 타협을 위한 노력, 단숨에 눈에 띄는 구호가 아니라 지루할지언정 긴 시간 성실하게 진심을 전하는 태도, 치열한 고민을 통해 탄생한 정제되고 논리 정연한 말, 마음을 울리는 웅변,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공인의 언어조차 황폐해진 현실. 대체 누가 무슨 염치로 일상어의 타락을 꾸짖고 우려할 수 있단 말인가. 인내, 품위, 우아함은 정말 우리에게 사치일 뿐일까.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