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집
이정배, 이진주는 직접 만들어 조각이 된 가구, 한국적인 선과 소재, 나무 냄새, 예술 작품, 아름다움으로 집을 채웠다.
만들어진 것은 아름다워야 한다. 이정배 작가가 가구, 조명, 공간을 완성할 때 염두에 두는 명제다. 그는 자신이 만든 가구가 쓰임으로 환대받고, 아름다움이 전해져, 사용자에게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예술이 무엇인지 답할 수 없지만, 보는 이에게 감동, 슬픔, 공허함 등 영향력을 주는 건 분명하죠. 제 가구도 조각품처럼 자리하며 쓰는 이에게 실용성 이상의 무엇을 전달하길 바랍니다.” 이정배는 평면을 넘어 입체적으로 동양화를 구현해온 예술가다. 그는 자신을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겉으론 동양화적이지 않은 작업을 하며, 여전히 동양화를 이야기하는 작가”라 설명한다. 아내인 이진주는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해온 화가이자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다. 둘은 부부면서, 함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2인전을 열기도 하는 예술적 동지다.
2018년 부부는 이정배의 어머니, 아들딸과 함께 살 목조 주택을 파주에 지었다. 면적 약 421㎡로 1층은 부부의 작업실, 2층은 방과 거실, 부엌 등이 자리한 생활 공간, 3층은 어른들의 놀이터이자 실험 공간이다. 3층은 여느 집에선 보기 힘든 공간이다. 벽 없이 한눈에 트인 약 100㎡의 거실은 언뜻 갤러리 같다. 작가인 부부가 자신들의 작품을 여럿 놓고 고민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또한 지인이 오면 함께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며 감성을 교류하는 놀이터기도 하다. 정면에는 나무 스피커가 자리한다. 로우더(Lowther) 스피커 유닛에 이정배가 직접 통을 제작했다. 그는 음악을 틀고 직접 만든 탁자에서 드립 커피를 내려 대접했다. 그의 삼베 조명에서 낸 빛이 봄볕처럼 부드럽다. 집에서 무엇이 됐든 그것은 이정배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집은 내가 원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무대죠.”
이정배는 2011년에 처음 가구를 만들었다. 이진주가 갤러리현대 16번지에서 전시를 하면서 놓을 탁자를 부탁해 동네 목공소 수업을 들었다. 이정배는 그때 처음 만든 나무 탁자의 감촉을 잊지 못한다. “나무를 만지자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꼈어요. 위안도 됐고요. 집 안의 체리 시트지 가구를 보면서 그 얇은 물리감이 견디기 힘들었는데, 진짜 체리(벚나무) 가구는 어떨까 궁금해졌죠. 그 뒤로 삶에 가구가 들어왔어요. 지금 우리 집 탁자는 진짜 벚나무죠.”
이 목조 주택을 거닐다 보면 한옥에 와 있는 듯하다. 그만큼 한국적인 미가 느껴진다. “우리 집에 들어섰을 때 ‘여기가 한국이구나, 아름답구나’라고 생각하길 바랐어요.” 이정배의 가구는 한국적인 요소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거실의 긴 탁자는 나무 동그라미가 받치고 있는데, 백제 박물관에서 본 궁의 치미에서 영감을 얻었다. 책장의 유려한 선은 한복 저고리가 떠오른다. 고개를 숙여 탁자 밑을 보니 다리에 버선을 신긴 듯 동그랗게 마감했다. 조명도 마찬가지다. 삼베, 천연 견으로 만든 조명이 포근한 빛을 낸다. “조명을 만들 때 ‘숨길 수 없으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명에 들어가는 부속품, 전선 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아름답게 보일지 고민하죠.” 그는 조만간 한지로 만든 들창을 창문에 덧댈 예정이다.
나무를 만지면서 국내 토종 나무와 꽃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관련 농원에서 종사자들을 만나며 배움의 기쁨을 느끼는 중이다. 조선 목가구에 쓰던 먹감나무는 산수화 같은 문양이 신비로운데 어렵게 자투리를 얻어 도마로 만들었다. 부엌에는 국보 도자기를 본뜬 모양의 도마가 작품처럼 놓여 있다. 정원에는 토종 들꽃이 피었다. 그가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내가 방에서 창밖의 매화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부부가 동양화를 전공했으니 집에 매란국죽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웃었어요. 지난해부터 울타리를 대신할 대나무를 가꾸려 했으나 쉽지 않더군요.” 사실 집 안에는 이미 대나무가 있다. 대나무 숲을 본뜬 형태의 책꽂이 ‘대숲’은 A4 용지를 세워 꽂을 수도 있다. 눕히거나 파일 사이에 끼워 보이지 않는 A4가 올곧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배의 가구에서는 나무뿐 아니라 돌도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스탠드 조명에서 돌은 중심을 잡는 추 역할을 한다. “아파트 살 때 돌 두세 개가 버려져 있었어요. 몇 달을 지나다녀도 그대로길래 집으로 가지고 와 가구에서 쓰임을 찾았죠. 나무와 돌이 참으로 조화로워요. 그때부터 돌을 수집하는데 쉽지 않아요. 그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 저만은 아니니까요.”
가장 애착이 가는 가구 중 하나는 아내를 위해 만든 낮은 탁자다. 만삭이던 아내가 유일하게 편안하게 앉던 라운지 체어에 맞게 높이를 낮췄고, 바닥을 얇게 샌딩해 쉽게 밀리도록 했다. 의자가 아닌 탁자를 밀고 일어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갤러리현대에서 구입해 현재 집에는 없다. 대신 중학교 1학년 아들,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딸은 아버지가 만든 긴 탁자에서 책을 본다. 벤치, 데이베드처럼 만든 탁자라 그 위에 누워서도 독서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정배는 생활 맞춤을 넘어서 상상력을 발휘한 가구로 자신이 바라는 삶에 한발 더 내딛는 것이다. “맞춤 정장을 입는 것처럼 꼭 맞는 무언가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면 무척 즐겁죠. 또한 가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나요. 내가 한계를 두고 바라보면 막힌 작품이 나오죠. 예술의 기본 덕목이 자유이듯이, 자유롭게 가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진주는 집에 있을 때면 가끔 모교인 홍대 인근의 반지하에 살 때가 생각난다고 말한다. “A4 정도 되는 크기의 햇빛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었죠. 그때부터 작품 세계를 펼치려고 고군분투해왔어요. 다행히 동지인 정배 작가가 함께했고, 그와 가족을 이루고 사랑하고 싸우며 우리에게 유리한 환경을 점차 만들어갔어요. 어느 순간 아주 넓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작업실, 사랑하는 가족과 붙어 있을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되었죠. 여전히 불확실하고 두렵지만 앞으로도 잘 살아가리라 믿어요. 그 물리적 바탕이 되어주는 공간이 집인 듯합니다.”
그가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가족이 가장 자주 모이는 식탁이다. 오래 머무는 곳은 1층 작업실의 멀바우 나무 책상. 역시 이정배 작가가 만들었다. “멀바우의 질감과 색감을 좋아해요. 월넛, 오크보다 약간 거칠면서도 묵직하고 깊이 있죠. 무척 마음에 들어 이 자리에서 공부도 하고 드로잉도 하고 손님과 이야기도 나누죠.” 이정배는 아내의 캔버스 제작도 전담한다. 이진주가 떠올린 작품 이미지에 충실한 화면 크기와 비례가 기성 캔버스에 없기 때문이다. 이진주 작가는 갤러리 소소가 을지로에 개관한 ‘갤러리 더 소소’에서 4월 2일까지 전시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정배는 가구를 선보일 수 있는 전시 공간을 찾고 있다. 조각과 가구의 경계이자, 쓰임새와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그의 작품을 집 밖에서도 만날 수 있길. (VK)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김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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