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이혁의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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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이혁의 행진곡

2022-05-04T00:12:27+00:00 2022.05.06|

쇼팽 콩쿠르 파이널리스트 이혁은 다가올 시간이 더 반짝이는 피아니스트다.

회색 수트 재킷은 아더에러(Ader Error).

그래피티 레터링 재킷, 안에 입은 티셔츠와 바지는 아더에러(Ader Error).

오버사이즈 청 재킷과 바지, 운동화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지난 3월 열린 한국 공연 잘 봤습니다. 앙코르를 다섯 곡이나 해서 놀랐어요.

어렵게 시간 내서 리사이틀에 오신 청중께 최대한 앙코르를 많이 해드리려고 해요. 앙코르는 프로그램에 없는 곡을 들려드리는 서프라이즈라서 저도, 듣는 분도 즐거운 시간이죠. 오케스트라 협연의 경우 다른 연주자들도 계시기에 여러 곡은 힘들지만 제 솔로 리사이틀이라면 가능하죠.

연주할 때 땀에 흠뻑 젖어서 온몸으로 연주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체력적으로 소진된 상태에서 여러 번의 앙코르는 쉽지 않겠어요.

방전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즐기면서 연주하다 보면 2시간 리사이틀에 앙코르까지 3시간이 빨리 지나가요. 저의 스승이신 블라디미르 옵치니코프께선 제가 아직 젊어서 그렇대요(웃음).

연주가 끝나고 환하게 웃을 때면 정말 연주를 즐겼구나 느껴져요. 자신을 믿기 때문에 무대에서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요.

음악을 만난 순간부터 즐거웠어요. 연주자는 위대한 작곡가를 공부해서 청중에게 잘 전달해드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피아니스트인 제가 가장 중요시할 부분이고 음악을 배우는 이유입니다. 그 과정이 한 번도 괴로운 적 없어요. 피아니스트로서 언제나 행복하고 감사했어요.

연주자는 작곡가와 청중의 매개자라고 생각하는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곡가의 작품을 해석하고 연주하면서 느낀 감정을 청중에게 온전히 전달하고 싶어요. 그렇기에 무대에 설 때도 긴장하기보다는 설레죠.

2009년 리틀 모차르트 콩쿠르에서 우승 이후, 2012년 모스크바 국제 청소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 2016년 폴란드 파데레프스키 콩쿠르 우승, 2018년 하마마쓰 국제 피아노 콩쿠르 3위, 지난해 12월 쇼팽 작품만 연주하는 프랑스 아니마토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어요. 어릴 때부터 콩쿠르를 준비했는데, 특정 목표를 향해 연습을 반복하기가 힘들었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연습도 즐기면서 하거든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 과정이 어렵더라도 그리 힘들지 않잖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무대에 나갈 때든 콩쿠르든 마음가짐은 비슷하고, 콩쿠르를 하면서 나의 실력을 더 발전시키고 공부할 수 있어서 자기 계발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지난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8회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결선에 진출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어요. 그 콩쿠르가 무엇을 남겼나요?

쇼팽 콩쿠르는 특별하죠. 지난해 7월에 예선을 거쳐 본선 1차부터 4차까지 총 다섯 번 경연을 했어요. 우선 무척 즐겼어요. 라운드마다 심사위원이라는 청중을 둔 콘서트라고 생각했어요. 앙코르는 없지만요(웃음). 청중이 마음에 들어 해서 2차, 3차 콘서트를 연다는 마음이었죠. 또한 다른 참가자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저처럼 본선에 80여 명의 참가자가 3주 넘게 경연을 이어갔는데, 쇼팽을 향한 열정만큼은 모두 같았어요. 서로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런 해석도 있구나, 이곳을 이렇게도 접근하는구나 놀랐죠. 쇼팽이라는 공동체처럼 함께한 시간 자체가 기쁨이고 영광이었어요.

16세에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 입학해 수학해왔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2월에 귀국했어요. 침잠하는 나날일 듯합니다.

마음이 굉장히 아파요. 우크라이나에서 연주하던 홀도 파괴됐고, 그곳에 남아 있는 친구들도 너무나 걱정됩니다. 문자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상황에 공감하려고 노력하지만 정말이지 너무나 슬픕니다.

공연계에도 러시아에 대한 보이콧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예술가로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고민일 듯합니다.

글쎄요, 저도 많은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정된 폴란드 공연에서 러시아 곡을 연주하기로 했다가 취소했습니다. 여러 부분이 연주자로서 안타까워요.

오버사이즈 청 재킷과 바지, 운동화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세 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 홈 스쿨링과 연주를 병행하다 선화예술학교 예비 과정에서 음악교육을 받았죠. 언제 피아노가 깊게 다가왔나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접한 그 순간부터 이미 빠져들었어요. 악기를 직접 연주한다는 자체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어요.

설마 세 살 때를 기억하나요?

조금 기억나요. 다들 신기하대요. 악기를 만난 첫 순간은 아닐지라도 띵동띵동 건반을 만지던 순간이 떠올라요. 열 살 때 리틀 모차르트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서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어요.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서 큰 박수가 나왔어요. 처음 한 협연에서 환희를 느꼈고 그때 청중에게 음악을 들려드리는 연주자가 되고 싶었어요.

당시에 모차르트 의상과 가발을 착용하고 무대에 오른 꼬마 이혁의 사진을 봤어요. 그 후 터닝 포인트는 무엇인가요?

2016년에 폴란드 파데레프스키 콩쿠르에 나갔죠. 당시 16세로 최연소 참가자였어요. 쟁쟁한 형, 누나가 많아서 배우는 과정으로 여기며 1, 2차 정말 즐기면서 연주했어요. 세미파이널을 거쳐 파이널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연주했는데 다음 날 우승 소식을 들었어요. 그 콩쿠르가 어찌 보면 더 많은 레퍼토리를 쌓고 공부하고자 하는 기폭제가 된 것 같아요.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크리스티안 짐머만, 라파우 블레하츠를 꼽았습니다. 이유는 “음악에 대해 진실하기 때문”이라고 밝혔고요. 스스로 가장 중시하는 부분이겠죠?

그렇죠. 선생님께서도 많이 하는 말씀이에요. 연주할 때 연주자가 아니라, 해당 곡을 쓴 작곡가 중심이어야 한다고요. 그가 곡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연주할 음악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작곡가와 그가 남긴 음악에 진실함을 담아 얼마나 위대한지 청중께 전해드리는 것이 피아니스트의 의무라 하셨어요.

작곡가의 세계를 온전히 전하는 것도 피아니스트의 의무지만, 그것을 나의 세계로 재창조해서 청중에게 들려준다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말도 기억나요.

당연히 맞는 말이죠.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복사하듯 연주하는 건 연주가 아니죠. 저는 과도한 해석, 그러니까 자신을 더 중시해 작곡가와 악곡에 적힌 본래의 아이디어가 작아짐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곡을 해석할 때 작곡가와 해당 배경을 깊이 공부한다죠. 폴란드어를 배우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요?

폴란드에서 출판된 쇼팽의 악보를 샀는데, 그의 일기 발췌본이 같이 있었어요. 원문 옆에 영어 번역본도 있었지만 저는 그의 모국어로 읽고 싶었어요. 제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알기에, 같은 슬라브권인 폴라드어도 해보자 싶었죠. 현재 일상적인 글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오늘 함께 온 동생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함께 연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연이 열리면 동행해 음향을 체크해준다고 들었어요.

많이 의지가 돼요. 동생이 몇 년 새 키가 많이 컸어요. 덩치가 작으면 시도하기 어려운 곡이 있는데, 이젠 성인 몸집에 손도 커져서 연주 범위가 넓어졌어요. 1년 반 전부터 동생과 저의 듀오 레퍼토리를 쌓아왔고, 몇몇 녹음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도 올렸어요. 언젠가 듀오 콘서트를 열고 싶어요.

본래 바이올리니스트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제안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피아노뿐 아니라 바이올린도 연습하고 있나요?

피아니스트로서 더 레퍼토리를 쌓고 어느 기준점 이상 오른다면 바이올리니스트로서도 청중과 만나고 싶어요. 88개의 건반으로 이루어진 피아노와 네 개의 현이 주는 바이올린의 매력은 다르거든요.

일생을 바쳐 사랑할 존재가 두 개나 되다니 부럽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 어느 기준점 이상’이라 말했는데 어떤 목표인가요?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피아니스트로서 시작하는 입장이잖아요. 솔직히 죽을 때까지 한다 해도 피아노에 대한 공부를 끝낼 수 없을 거예요. 꾸준히 많은 공부가 필요해요.

이 답을 하면서 설레는 표정이네요.

피아노 말고도 죽을 때까지 모든 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움은 항상 설레고 기뻐요.

그래서 할 줄 아는 것도 많나 보네요. 체스도 국제 대회에 참가할 만큼 수준급이고 코딩 실력도 뛰어나 해외 IT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안까지 받았죠.

그건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웃음).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코딩까지 못해요.

어릴 때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준비를 잠시 했죠. 클래식뿐 아니라 여러 음악 장르에도 열려 있나요?

물론이죠. 특히 존 윌리엄스의 영화음악을 좋아해요. 길을 걸을 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 <쥬라기 공원> 등의 OST를 듣죠. 라흐마니노프가 사랑한 재즈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의 앨범도 즐겨 듣고요.

앞서 폴란드에서의 연주 일정을 언급했는데요, 올해 역시 공연으로 꽉 차 있겠죠?

기쁜 일이죠. 특히 6월에는 바르샤바의 와지엔키 공원에서 공연을 가져요. 그곳의 쇼팽 동상 앞에서 늦봄 무렵부터 여름까지 매주 일요일에 피아니스트들이 콘서트를 해요. 지난해엔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열렸지만, 이번엔 다를 듯합니다. 그 후에 쇼팽 생가가 있는 크라쿠프에서 협연을 갖고 9월에 독일과 프랑스, 10월에 일본에서 공연이 있어요. 그 사이 8월에 귀국해 한국 청중을 만날 듯합니다.

역시 촘촘한 일정이군요. 아무리 젊어도 자기 관리가 필수겠죠.

연주 전날엔 최대한 숙면을 취하고 많이 먹는 것이 제 루틴이라면 루틴입니다(웃음).

이혁 피아니스트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으면 좋을까요?

음악 자체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은 따뜻함과 온화함을 전하고, 어떨 때는 위로와 위안을 주죠. 인간의 모든 아름다운 부분이 담겨 있어요. 그런 사랑을 주는 음악가이고 싶습니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