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관계의 타성을 지독하게 해부한 드라마
구씨(손석구)가 미정(김지원)에게 말한다. “개구리 터져 죽은 얘기 같은 거 말고, 여자들 수박 겉 핥는 얘기를 정성껏 할 줄 알아야 돼. 지겹고 지겹게. 그래서 남자가 지겨워서 죽고 싶게.” 이 대사는 박해영 작가의 최근작에서 도드라지는 과묵한 주인공들을 이해하는 단서다.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를 아우르는 관성적 소통에 대한 거부감, 그에 대한 주인공들의 집요한 저항, 그것이 시청자에게 불러일으키는 해방감을 이야기해보자. 이 시대 한국인이 원하는, 그러나 결핍된 무언가가 거기 담겼을 가능성이 크다.
<나의 아저씨>의 지안(이지은)은 타인과 소통이 안 되는 인물이다. 엄청난 삶의 무게를 견디는 중인 건 알겠다. 정규직도 아닌데 다른 직원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스몰토크를 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동료들이 “복사 용지 떨어졌냐”거나 “그 파일 네가 갖고 있냐” 물을 때 “네”, “아니요” 정도는 대답을 해줘야 회사 일이 돌아가고 사회가 돌아가는 거 아닌가. 지안은 그 정도 대답도 안 한다. 자신이 필요한 말 외에는 묵언 수행하는 승려처럼 입을 닫는다. 보고 있으면 시청자도 속이 터지는데 동료들은 오죽할까. 지안의 과묵함은 종종 동료들과 마찰을 유발한다. 지안의 짧은 평생 처음으로 지안을 사람 대접해준 인물이라는, 그리하여 지안의 추앙을 받는 아저씨(이선균)가 진짜 좋은 윗사람이 되려면 ‘적어도 회사에서는 대답 정도는 하고 살라’는 조언을 해줘야 하지 않나 싶은데 이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걱정조차 ‘꼰대질’처럼 느껴진다. 철저히 혼자고 아웃사이더였던 지안이 사회에 그럭저럭 녹아들었다는 뉘앙스를 주는 마지막 회에서마저, 지안은 동료들의 호명에 대답하지 않는다. 속 터진다. 그런데 속 터진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잘못된 건 아닌가 반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박해영의 드라마에는.
<나의 해방일지>에는 공허한 일상적 사교에 대한 반감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정이 다니는 카드 회사는 ‘행복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직원들의 동호회 활동을 강요한다. 미정, 태훈(이기우), 상민(박수영)은 거기 끝까지 저항한다. 미정은 <나의 아저씨>의 지안보다는 사회화된 인물이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는 걸 힘들어한다. 그는 동료들의 호명에 응답은 하지만 자기 감정, 생각, 정보 등을 묻는 질문에는 “그냥”이라고 말을 흐리며 빠져나가기 일쑤다. 동료들은 “그놈의 그냥”이라고 웃어넘기거나 대화를 이어보려 애쓴다. 그럼에도 미정의 성공을 빌어준다는 점에서 좋은 동료처럼 보이지만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 미정을 따돌린다거나 자신의 사내 불륜을 위해 미정을 이용하는 식으로 그를 배척한다. 타성에 젖은 관계의 공허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미정과 동료들의 에피소드다.
싱글 대디인 태훈은 아이를 봐야 한다는 이유로 에둘러 동호회를 거부한다. 그나마 부장이라 위계가 높은 상민은 인간이 지긋지긋하고 얄팍한 관계가 역정 난다는 걸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미정, 태훈, 상민은 사내의 ‘검은 양’ 무리다. 그런데 그들이 동호회 가입 압박을 피하기 위해 얼렁뚱땅 만든 ‘해방클럽’ 활동을 통해 그들이 진짜 원한 것들이 드러난다. 그들은 ‘조언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털어놓고,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옆 사람의 말을 들어준다. 그들이 정말 원한 것은 ‘나 좀 내버려둬’라는 식의 일방적 단절이 아니라 길고 지루할지 모를 생각을 끈기 있게 들어주고, 서로를 침범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사려 깊은 소통이었던 것이다. 다른 동호회를 구경하거나 동료들의 커피 토크에 낄 때 멀찍이 소외된 관찰자처럼 보이던 미정은 해방클럽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급기야 검은 양 무리를 감시하던 행복지원센터 팀장마저 행복을 가장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해방클럽에 가입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불필요한 말은 너무 많이, 필요한 말은 너무 적게 하고 산다. 무의미한 말은 너무 많고 진심은 너무 적다는 편이 옳을 수도 있겠다. 그 현실에 적응하는 게 사회생활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해영의 주인공들은 고집스럽게 이 타성을 거부한다. 진심 없는 대화,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사교, 나를 이해할 마음이 없는 타인에게 이해받고자 나 자신의 일말을 내비치는 미련을 집어던진다. 그건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인들은 힘들어하지만 끝내 자신을 이해해주는 누군가를 찾아낸다. 그것이 박해영 드라마가 그려내는 판타지다. 이 주제의 핵심에 있는 것이 이지안과 해방클럽 멤버들이라면, 이런 인물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 <나의 아저씨>의 동훈(이선균)이나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와 염씨 남매들이다. 동훈과 구씨가 그들이 안전하게 느끼는 사적 거리를 지켜주고 그들의 속도에 맞춰 거의 정지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곁을 지키며 느리게 가까워지는 방식을 알려준다면, 염씨 남매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진정성’이다.
<나의 해방일지>의 염기정(이엘), 염창희(이민기)는 말수가 적은 편이 아니다. 식물처럼 다소곳한 인간형도 아니다. 사회생활도 곧잘 하고, 여기저기 부대끼면서 주도적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캐릭터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이용해 타인을 자기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타인의 중심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쪽을 택한다. 기정은 “애타고 간질간질하고… 다 불쾌 아닌가요? 유쾌가 아니라”라며 밀당 따위 거부하고 짝사랑 상대에게 무한한 애정을 퍼붓는다. 창희는 외로운 고객이 하루 2시간씩 전화로 하소연을 늘어놓아도 거부하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이다. 기다리기, 들어주기, 재지 않기,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소시오패스가 아닌 한 누구나 조금씩은 타인과의 소통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지안이나 미정처럼 극단적이진 않아도 가끔은 ‘이런 내가 틀린 걸까?’ 자문하고, 그래서 가끔은 외롭다. SNS 팔로워 숫자와 화려한 저녁을 증명하는 사진, 소위 ‘네트워킹’이 능력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혼자 뒤처지거나 튕겨나간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수박 겉 핥는 얘기’을 정성껏 재미나게 하는 것도 이 시대에는 능력이다. 그게 힘겨운 사람들에게 박해영 작가는 말한다. “잠깐 쉬세요.” 이건 기정이 데이트를 하다 말고 차를 빼러 갔다가 헐레벌떡 돌아온 태훈에게 한 말이다. “좀 쉬세요. 1분만 쉬세요.” 따져보면 ‘쉼’이야말로 TV 드라마의 주요한 기능이다. 극적인 멜로, 미스터리, 우스꽝스러운 해프닝,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판타지가 모두 거기에 봉사한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건 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쉼’인가. 다시 말해 우리는 현실에서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가.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에는 그 ‘무엇’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무엇’을 우회하는 대신 드라마의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위험천만하고 불편한 설정인 ‘섹시한 폭력배’ 구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나의 해방일지>가 대중의 추앙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정에게 감정 이입하여 자기 연민에 빠지는 대신 나만큼 외로운 누군가를 위해 창희나 기정이 되어주는 상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의 해방일지>는 2022년 봄의 가장 편안한 쉼이었다.
- 글
- 이숙명(칼럼니스트)
- 이미지
-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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