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봉의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찬 공간 #친절한 도슨트
중견 작가 이기봉의 회화는 그 표면과 내면을 집요하게 관찰하게 합니다. 일견 안개 낀 습지를 표현한 듯한 그의 작업을 보고 있자면, 희뿌연 안개 이면에 또 다른 풍경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죠. 흐릿한 입체감이라는 고유한 효과는 그의 작업이 두 개의 레이어로 이뤄진 데서 발생합니다. 작가는 캔버스와 파이버라는 얇고 불투명한 천을 중첩해 하나의 화면을 만듭니다. 이 두 재료 사이의 공간은 고작 1cm인데, 흥미로운 건 이 미미한 여백이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에 영겁의 깊이감을 선사한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고나 할까요. 허파에 빈 공간이 있어야 소리를 낼 수 있듯, 세상도 빈 공간 덕분에 순환하고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이 작업이 평면이 아니라, 더 깊숙이, 심지어 발을 들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일종의 몰입감은 얄팍한 착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진실이라 믿는 한 미술가가 만들어낸 환영의 미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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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b. 1957), ‘Where You Stand Green-1’,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86×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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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b. 1957), ‘Where You Stand D-1’,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86×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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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b. 1957), ‘Deeper than Shadow ᅳ Purple’, 2021, Wood, Silicon, Thread,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241×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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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b. 1957), ‘Stand on Shadow No. 9-3’,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10×11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오는 12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 서울점(K1, K2)과 부산점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와 흐름을 탐구해온 이기봉의 근작을 선보입니다. 그의 작업 속 풍경은 그림자와 실체, 언어와 비언어, 감각과 이성 등 상반된 개념이 충돌해 도출된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얇은 막(천)은 이 풍경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작가가 이 재료를 본인 상상 속의 투명한 막이라 전제하는 이유 역시 “그 막 없이는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풍경 속 나무, 안개, 물 등 자연적 요소는 막의 존재를 드러내는 장치이자 무한의 공간으로 진입하기 위한 문고리입니다. 단순히 시각적 효과를 넘어 인간과 사물, 세계가 관계 맺는 메커니즘을 가림으로써 오히려 드러내는 역설적 요소인 셈이죠. 만약 몽환적이고도 신비한 이 풍경이 익숙한 동시에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마음 또는 세상의 영토를 은유하기 때문일 겁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풍경화’가 아니라 ‘세계화(畵)’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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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1관(K1)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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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2관(K2)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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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2관(K2)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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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부산점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전시의 제목 ‘Where You Stand’는 내가, 당신이,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곧 세계라는 작가의 철학을 반영합니다. 그의 그림처럼, 비록 알아볼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며, 불확실한 데다, 사라지기 쉬운 것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도 말이죠. 오히려 명료함과 투명함이 더 가상적이라 간주하는 작가는 늘 이 흐릿함과 혼란함의 한가운데에 서 있기를 자처해왔습니다. 그는 무상함과 덧없음에 매료되고, 그림자와 환영을 칭송합니다. 보이지는 않되 세상을 구동하는 원리로서 엄연히 존재하는 흐름, 즉 세상의 복잡성을 예술을 통해 가시화하고자 하는 그의 작업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내 안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맹렬하게 나아가느라 앞만 보거나, 후회하며 뒤를 돌아보거나, 타인을 의식하며 옆을 흘깃거리느라 정작 내 몸이 서 있는 이곳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토록 흐릿하고 혼란한 그의 작업은 존재 의식을 확장하는 데 꽤 요긴한 이정표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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