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봉의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찬 공간 #친절한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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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의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찬 공간 #친절한 도슨트

2022-11-22T17:25:52+00:00 2022.11.23|

중견 작가 이기봉의 회화는 그 표면과 내면을 집요하게 관찰하게 합니다. 일견 안개 낀 습지를 표현한 듯한 그의 작업을 보고 있자면, 희뿌연 안개 이면에 또 다른 풍경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죠. 흐릿한 입체감이라는 고유한 효과는 그의 작업이 두 개의 레이어로 이뤄진 데서 발생합니다. 작가는 캔버스와 파이버라는 얇고 불투명한 천을 중첩해 하나의 화면을 만듭니다. 이 두 재료 사이의 공간은 고작 1cm인데, 흥미로운 건 이 미미한 여백이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에 영겁의 깊이감을 선사한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비어 있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고나 할까요. 허파에 빈 공간이 있어야 소리를 낼 수 있듯, 세상도 빈 공간 덕분에 순환하고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이 작업이 평면이 아니라, 더 깊숙이, 심지어 발을 들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일종의 몰입감은 얄팍한 착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진실이라 믿는 한 미술가가 만들어낸 환영의 미학이죠.

이기봉(b. 1957), ‘Where You Stand Green-1’,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86×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기봉(b. 1957), ‘Where You Stand D-1’,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86×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기봉(b. 1957), ‘Deeper than Shadow ᅳ Purple’, 2021, Wood, Silicon, Thread,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241×18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기봉(b. 1957), ‘Stand on Shadow No. 9-3’, 2022, Acrylic and Polyester Fiber on Canvas, 110×11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오는 12 31일까지 국제갤러리 서울점(K1, K2)과 부산점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와 흐름을 탐구해온 이기봉의 근작을 선보입니다. 그의 작업 속 풍경은 그림자와 실체, 언어와 비언어, 감각과 이성 등 상반된 개념이 충돌해 도출된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얇은 막()은 이 풍경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작가가 이 재료를 본인 상상 속의 투명한 막이라 전제하는 이유 역시그 막 없이는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풍경 속 나무, 안개, 물 등 자연적 요소는 막의 존재를 드러내는 장치이자 무한의 공간으로 진입하기 위한 문고리입니다. 단순히 시각적 효과를 넘어 인간과 사물, 세계가 관계 맺는 메커니즘을 가림으로써 오히려 드러내는 역설적 요소인 셈이죠. 만약 몽환적이고도 신비한 이 풍경이 익숙한 동시에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마음 또는 세상의 영토를 은유하기 때문일 겁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풍경화가 아니라세계화()’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제갤러리 1관(K1)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2관(K2)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2관(K2)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부산점 이기봉 개인전 ‘Where You Stand’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전시의 제목 ‘Where You Stand’는 내가, 당신이,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곧 세계라는 작가의 철학을 반영합니다. 그의 그림처럼, 비록 알아볼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며, 불확실한 데다, 사라지기 쉬운 것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도 말이죠. 오히려 명료함과 투명함이 더 가상적이라 간주하는 작가는 늘 이 흐릿함과 혼란함의 한가운데에 서 있기를 자처해왔습니다. 그는 무상함과 덧없음에 매료되고, 그림자와 환영을 칭송합니다. 보이지는 않되 세상을 구동하는 원리로서 엄연히 존재하는 흐름, 즉 세상의 복잡성을 예술을 통해 가시화하고자 하는 그의 작업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내 안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맹렬하게 나아가느라 앞만 보거나, 후회하며 뒤를 돌아보거나, 타인을 의식하며 옆을 흘깃거리느라 정작 내 몸이 서 있는 이곳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토록 흐릿하고 혼란한 그의 작업은 존재 의식을 확장하는 데 꽤 요긴한 이정표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