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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선묘하고, 선득한 재능의 발견이자 선언

2023.02.08

by 민용준

    ‘애프터썬’ 선묘하고, 선득한 재능의 발견이자 선언

    그리면서도 멀어지는 운명에 관한 감각적 체험, <애프터썬>이라는 비범함에 관하여.

    시간은 그 자체로 기억의 연금술이다. 기억이란 떠밀려 연금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지만, 결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단언의 감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월을 머금은 기억이란 대체로 반짝이고 그리운 것만 같다. 미화되거나 완화된다. 기쁨도, 즐거움도, 슬픔도, 노여움도, 힘겨움도, 외로움도, 기이하게도 지나고 보면 대부분 그릴 수 있는 무언가로 단단하게 여물거나 유연하게 풀어진다. 허물어지듯 망각되는 시간 사이에서 잔존한 기억의 형체를 더듬고 되짚을 수 있다는 건 그래서 때론 다행스럽고, 한편으론 서글픈 일이 된다.

    어떤 기억은 선명한 듯 온전하지 않아 애가 타지만 일렁이면서도 거듭 떠올라 돌이킬 수밖에 없다. 보이는 풍경과 품은 마음이 잡힐 듯 잡히지 않고 희미하게 맴돈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찍고, 영상도 찍는다. 덕분에 이런 영화도 나온다.

    조악한 화질의 캠코더 영상 속의 남자는 춤을 춘다. 이것은 지나간 시간이 영사된 기록이다. 흘러간 기억의 증언이다. 그렇게 시간을 되감아 돌아가듯 찾아낸 오래된 캠코더 영상에는 오래전의 나와 오래전의 아빠가 있다. 영상 너머에서 몸을 흔드는 아빠를 향해 오래전의 어린 나는 묻는다.

    “난 열한 살이고 아빠는 130살이었다가 이틀 뒤면 131살 된대요. 그래서 아빠가 열한 살이라면 지금 뭐 할 거 같아요?” 아빠는 답이 없다. 답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영상은 정지됐고, 정지된 영상 위로 화면 밖에 자리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친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을 붙잡듯 정지된 화면 너머로 그때로부터 멀리 지나와버린 지금의 시간이 반사돼 투영된다.

    <애프터썬>은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 영국인 부녀가 함께 보낸 며칠의 기억을 되짚는 영화다. 열한 살 무렵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함께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 소피(프랭키 코리오)는 아빠가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캠코더 카메라로 아빠와 자신을 찍곤 한다. 이상할 정도로 혼자 흥겹게 들떠 춤을 추다가 곧잘 가라앉는 아빠는 한없이 다정하다가 가끔씩 무심하게 쓸쓸해진다.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아빠를 각별한 시선으로 따르고 지켜보는 소피는 때때로 아빠와 떨어져 호텔에서 만난 자기 또래 혹은 자신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10대들과 어울리며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혼자가 된 캘럼은 종종 알 수 없는 우울감으로 고립되고, 아빠와 떨어져 새로운 시간을 보내는 소피는 자신의 어린 나이를 거듭 실감하고 타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다.

    튀르키예 호텔에 도착한 캘럼과 소피는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일광욕과 물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스쿠버다이빙을 하거나 시내로 관광을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부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교감하는 것 같지만 그로 인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재확인되기도 한다. 아빠의 유년 시절에 관해 묻는 어린 딸의 발랄한 질문은 뜻밖의 우울로 수렴되고, 스쿠버다이빙을 하기 위해 아빠가 딸에게 건넨 수경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사실 엄마 없이 아빠와 딸만 여행하는 건 부부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기 때문이다. 소피가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는 아빠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런던에 사는 캘럼에게는 더 이상 일말의 미련도 없는 과거일 뿐이다. 젊은 아빠에게 고향은 반드시 돌아갈 이유가 없는 과거의 영토지만 아빠의 고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어린 딸은 그곳에서 아빠의 부재를 거듭 체감하며 살 것이다.

    사실 소피는 아빠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좋다. 아빠와 떨어져 지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아빠와 같은 태양 아래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낀다는 어린 딸의 말은 그저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진심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빠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 시간 자체를 만끽한다. 난데없이 식당에서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자는 제안에 따라 달리고, 필요한지 알 길이 없는 호신술을 가르치는 아빠의 느닷없는 권유를 받아들이며 딱히 할 마음이 없는 수구를 하자고 종용하는 아빠를 따라 수영장에 들어가 우왕좌왕한다.

    그런 와중에 아빠와 함께 부를 노래를 신청하고 무대에 올랐으나 끝까지 객석에서 내려오지 않는 아빠가 원망스러워서 끝내 뼈 때리는 말을 하며 부녀 관계는 소원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아빠에게 벗어난 소피는 호텔에서 만난 10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관계를 전전하고 탐색하며 관찰한다.

    캘럼은 휴가지에서 서른한 살 생일을 맞을 예정이다. 열한 살 먹은 딸을 여동생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젊은 아빠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고향을 떠나 런던에 정착하려 애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아직 직업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인 것 같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그에게는 손쉽게 우울의 기미가 드리운다. 평소 춤추기를 좋아하는지 자주 몸을 흔들고, 태극권 초식 같은 동작을 어디에서나 거리낌 없이 한다.

    그만큼 활동적인 성격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상냥하며 밝은 면모가 엿보이지만 그래서 곧잘 침체되고 속 모를 표정으로 침묵하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창문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거나 버스가 가까이 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건너며 어두운 밤바다를 홀로 걸어 들어가는 등 보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조마조마할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벌이거나 무심하게 지나친다.

    <애프터썬>을 채우는 러닝타임 대부분은 성인이 된 소피(실리아 롤슨 홀)의 플래시백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모든 회상이 소피의 기억에서 추출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여행 중 소피와 떨어져 혼자 시간을 보내는 아빠의 모습은 온전히 소피의 유년 시절 기억에서 추출된 정보일 리 없다. 소피가 목격했을 리 없는 아빠의 개인적인 모습은 사실상 소피가 아닌 관객만 아는 정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애프터썬>은 소피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그 시절의 추억담이 아니다. 그 어린 시절의 소피가 보지 못했고, 어른이 된 소피가 여전히 알 수 없는 캘럼에 대한 모습을 재현하는 영화일 것이다.

    호텔 방에서 벌거벗은 채 홀로 울음을 터트리는 캘럼의 모습을 소피는 모른다. 관객만 볼 수 있다. 물론 소피와 마찬가지로 관객 역시 캘럼에게 스며든 깊은 우울의 근원을 알 수 없다. 영화는 캘럼의 우울에 관한 인과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캘럼의 우울을 정황으로 목격한 관객은 이를 바탕으로 소피와 캘럼의 거리감을 인지하게 된다. 젊은 아빠와 어린 딸 사이에 결코 전할 수 없는, 전해질 수 없는 심정과 사연이 존재한다는 막연한 추측을 얻게 된다. 모든 걸 물어도 상관없고 많은 것이 궁금한 어린 딸의 심정과 어떤 말도 온전히 하기 힘든 젊은 아빠의 심정은 손쉽게 뒤섞이기 어렵다.

    <애프터썬>을 연출한 감독 샬롯 웰스는 자신의 데뷔작을 유년 시절의 자전적 기억에서 길어 올렸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휴가 중인 부녀 관계, 더 정확하게는 오빠로 오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이 함께 휴가를 떠나고 가벼운 범죄를 공모하는 등 자잘한 사건을 함께 겪는 영화를 구상했다. 하지만 점차 이야기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아빠와 함께한 시간이 환기되기 시작했고, 어떤 추억이 떠올랐다.

    그런 영향력이 영화에 반영되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온전히 자전적 경험이 반영된 영화라고 명명해야 하는 영화를 만들 생각 또한 없었다. 자기 경험이 일부 반영될 순 있겠지만 그것을 지난 감정의 거울처럼 보이는 결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를테면 샬롯 웰스 역시 에든버러 출신이며 그의 아빠 또한 젊은 시절에 자신의 오빠로 오인받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소피와 캘럼처럼 열 살 무렵 아빠와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기 경험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었지만 실상 그것은 샬롯 웰스의 삶을 재현한 결과는 아니었다.

    “나와 아버지를 바탕에 둔 이야기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우리의 성격적인 특성이 캘럼과 소피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초적인 특징이 된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내 기억이라고 말한다면 좀 웃길 거 같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실제로 나눈 대화나 상호작용을 기반에 둔 사건은 대부분 영화에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영화에 담긴 감정이나 영화에서 표현하는 슬픔은 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시 일종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샬롯 웰스 감독의 말처럼 <애프터썬>은 그녀의 자전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채워진 영화지만 온전히 그 삶을 반영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이런 창작자의 변은 자신의 영화를 온전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국한해 설명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종의 반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추측을 넘어 <애프터썬>이 보여주는 영화적 형식성이 그 주장을 어느 정도 납득하게 만드는 덕분이기도 하다.

    <애프터썬>은 캠코더 영상으로 보존된 직접적인 기록을 통해 선명해지는 기억의 영화다. 그런데 캠코더 영상이 촬영자라는 주체를 비교적 명확하게 대변하는 것과 달리 20년 전 튀르키예에서 보낸 캘럼과 소피의 여름에 관한 기억의 주체는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온전히 소피의 시점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명확한 기억을 통해 증언된 재현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현재 시점에서 20년 전 여름을 기억하는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소피가 보지 못하는 기억을 관객이 대신 보는 영화일 것이다. 물론 소피가 기억하는 것이 대부분 포함된 순간을 재현하는 것이겠지만 영화가 재현하는 순간에는 소피가 결코 볼 수 없었고,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든 추측할 수도 없는 순간이 그려지고 제시된다. 그런 의미에서 <애프터썬>은 뒤늦게 아빠를 이해하는 딸에 관한 영화가 아닐 것이다.

    그 시절 아빠의 나이로 접어든 딸이 뒤늦게 비로소 아빠의 우울을 짐작하고 짚어보는 영화일 수는 있겠지만 소피는 캠코더에 기록된 영상만 보고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추측할 것이다. 결국 아빠가 혼자인 순간에 대한 기억은 부재할 수밖에 없다. 홀로 밤바다에 들어가고, 홀로 방에서 울고 있는 아빠의 모습은 소피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그런 개인의 심상을 목격할 수 있는 관객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소피는 끝내 알 수 없는 것을 관객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보적 차이는 끝내 나이가 들어서도 좁힐 수 없는 소피와 캘럼의 거리감을 목도하는 정서적 체험으로 전환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끝내 다다를 수 없었던 부녀간의 마음의 거리를 목도하게 되는 경험이 될 것이며 한편으로 창작자 입장에서는 지극히 사적인 관계 안에 자리한 정서적 괴리를 통해 각자의 경험을 이입하게 되는 기이한 영화적 공감대를 마련하는 작업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창작자에게도 근본적인 질문으로 다가오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거울이나 수면 혹은 테이블 유리 등 반사되는 이미지에 자리한 인물의 상을 자주 등장시키는데 이는 경험의 거울 같은 기억에서 추출해낸 심정이 반영된 이미지처럼 보인다. 진짜를 반영했다 해도 그것은 결국 진짜처럼 비친 허구의 풍경이자 심경일 수밖에 없다는 의식을 구체적인 상으로 투영한 것 같아서 흥미롭다.

    동시에 클로즈업 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프레임 외곽에 자리하거나 거듭 프레임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듯 인물을 포착하는 방식 또한 인물에게 내재된 심리를 추측하게 만드는 강력한 단서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촬영술 자체가 이 영화를 비범하게 만드는 주요한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캘럼의 내적 불안이나 결핍에 대한 인식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단서를 제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물을 불안정하게 포착하는 카메라 앵글을 선택하는 방식이나 카메라 이동을 통해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곧잘 배제해버리는 방식을 통해 거듭 강화된다.

    그럼으로써 <애프터썬>은 인물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감정적으로 전이하는 감각의 영화가 되는 인상인데 감상을 설득하는 대신 건드리는 방식으로 좀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의 미스터리한 내면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만큼 신선한 영화적 화술의 체험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실로 놀랍고 과감한 성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러의 ‘Tender’나 퀸의 ‘Under Pressure’, R.E.M.의 ‘Losing My Religion’ 등 해당 신의 감정에 밀착하는 가사로 점철된 유명 넘버를 활용하는 방식도 인상적인데 이 역시 직접적인 대사로서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정보와 정서를 통해 극적인 감정을 쌓아나가는 연출적 전략처럼 보인다. “영화 제작자들이 어떻게 기억을 묘사하고 관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탐구하고자 했다”는 샬롯 웰스 감독의 말처럼 언어로 구술하거나 장면으로 묘사하는 대신 점멸하는 기억 사이사이에 켜켜이 감정을 쌓아나가고 감각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교감을 제시하는 것만 같다.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춤을 추는 아빠를 끝내 위로할 수 없었던 딸도, 그렇게 딸을 멀리서 지켜보면서도 뒤돌아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빠도, 그렇게 각기 보존되는 시간으로서 유한하게 자리하며 그 거리감은 순전한 안타까움으로 치환돼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기이하면서도 특별한 체험이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도 그렇게 위로가, 위안이 된다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전할 수 있는 재능은 분명 드물다. <애프터썬>은 그런 운명을 공명의 감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선묘하고, 선득한 재능의 발견이자 선언이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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