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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엄마, 아빠

2023.04.28

by 류가영

    길에서 만난 엄마, 아빠

    서울의 멋쟁이 엄마, 아빠들을 불러 세우고 <보그> 렌즈맨이 그들 곁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많은 것이 허물어졌다.

    동묘에서 만난 김진규∙윤정숙 부부는 카리스마 넘치는 라이더 커플이었다. “두 분 젊었을 때 진짜 멋있으셨을 것 같아요”라는 말에 호탕하게 웃던 어머님과 팔에 할리데이비슨 타투를 한 아버님의 에너지가 대단했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 아빠에게 바라는 것이 줄어든다. 요즘 같은 날씨에 꽃구경 좀 다니고, 가끔은 낯선 곳으로 홀연히 떠나기도 하면서 그저 둘이서 즐겁게 노는 듯 살았으면 싶을 뿐이다. 얼마 전, 부모님이 처음으로 둘이서 다낭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평소보다 해사한 옷을 입은 아빠가 엄마의 어깨를 곰살갑게 감싸거나 베트남 전통 모자 ‘논라’를 쓰고 소박하게 웃는 사진이 한두 장씩 전송되어올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졌다. 기나긴 추억을 공유한 커플이자, 같은 문화와 유행에 열광하던 동시대인이자, 서로의 ‘나이 듦’을 보듬어온 동반자로서 자연스럽게 동화된 31년 차 부부가 주고받는 편안한 에너지가 마냥 좋아 보였다. 그건 노력하는 딸의 입장으로도 채워줄 수 없는 기쁨 같았다.

    여의도공원에서 촬영한 이응진∙김혜리 부부는 여전히 설렘 가득한 연인처럼 사랑스러웠다. 이응진 아버님은 젊었을 때 월급의 반을 옷 사는 데 쏟아부을 정도로 패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이셨다.
    동대문에서 마주한 김담경∙안묵향 부부의 밀리터리 룩 스타일링은 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2021년 5월, 서울의 거리에서 맞닥뜨린 패셔너블한 여인들을 소개한 칼럼 ‘Lady First’로 <보그>와 머리를 맞댄 사진가 김동현이 이번에는 관록의 패션 센스가 엿보이는 커플 사진을 여러 장 보내왔다. 함께한 세월만큼 놀랍도록 비슷한 차림새와 인상을 자랑하는 부부 열 쌍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첨부된 설명을 애틋한 마음으로 읽었다. ‘포스’ 넘치는 라이더 커플로 “왕년에 우리 정말 장난 아니었지”라며 너스레를 떨던 김진규∙윤정숙 부부. 천연 염색 커플 룩을 선보인 이덕형∙유은숙 부부. 근사한 밀리터리 룩을 차려입은 김담경∙안묵향 부부. 진짜 연애 중인 것처럼 보이던 사랑스러운 이응진∙김혜리 부부. 미술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김한영∙박인재 부부. 아내는 기다란 꽃다발을, 남편은 아내의 가방을 든 채로 사진에 찍힌 백승면∙신경란 부부. 사진가 김동현의 휴대폰 속에 ‘힙스터’ 아버님과 어머님으로 저장된 이라하∙굿핑크(Gooodpink) 부부. 한가로운 공원 데이트를 즐기던 임경섭∙조미숙 부부. 찬란한 청춘 시대로부터 갑자기 소환된 듯한 차림의 전대원∙이경원 부부.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에서 마주한 우아하고 살가운 채명희∙김석현 부부까지. 서로의 개성과 취향에 시나브로 스며든 어머니, 아버지들의 일상적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무엇보다 행복해 보였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다시금 서울 거리를 누빈 김동현은 매번 “저는 사진 찍는 일을 하는 김동현입니다. 두 분처럼 스타일이 멋진 분들을 찍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다가갔다. 더 쑥스러워하는 쪽은 대개 어머님으로, 그럴 때 묵묵히 손을 잡아주거나 “이 사람 젊을 때 인기가 정말 대단했지”라며 아내를 두둔하는 아버님을 볼 때 그의 마음에 어느새 훈기가 밀려들었다.

    최대 관심사인 패션에 관해 김동현이 가장 감탄한 지점은 좋아하는 것을 고수하는 용기였다. 남편과 사별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한 번도 빼본 적이 없어 어느새 살과 동화되어버린 결혼반지가 자신의 친할머니에게 유일한 패션이듯이 김동현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매력적인 것에 집중하는 멋진 어른들의 소신에서 오랜만에 패션의 순수한 즐거움을 맛봤다.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 동묘에서 우연히 만난 멋쟁이 할아버지를 카메라로 담을 때부터 사실 그는 시니어의 ‘멋’을 아카이빙하는 일의 가치를 직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그>와 함께 그런 비전을 달떠서 실현한 몇 년 사이에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그의 확신은 한층 견고해졌다. “여전히 우린 칼 라거펠트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패션을 열렬히 숭배하잖아요. 그러면서 주변의 나이 든 사람의 매력을 과소평가하는 건 어쩐지 모순으로 느껴졌어요. 시니어 모델이나 노후의 삶에 대한 콘텐츠가 소소하게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길을 가다가 근사한 스타일을 뽐내는 어르신을 만나면 누구나 저처럼 감탄하겠죠. 하지만 거기서 끝인 게 아쉬워요. 좀 더 개성적인 인간으로 대하고, 이들의 삶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김동현은 피사체를 대할 때 항상 패션보다 삶에 대해 먼저 물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에서 오랜만에 반갑게 재회한 채명희 어머님은 아주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해서 20대에는 작은 숍을 열어 직접 만든 옷을 판매하기도 하셨대요. 70대가 넘어 은퇴했다가 2년 전, <보그>의 ‘Lady First’ 칼럼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일을 계기로 용기 내어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셨죠. 지금도 열심히 모델 아카데미를 다니고 계시고요.” 살면서 한 번도 스스로를 꾸미는 일을 게을리해본 적 없다고 털어놓은 채명희 어머님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보라색 헤어스타일에 스모키 메이크업이 매력적인 모습으로 김동현의 사진에 담겼다.

    남대문에서 촬영한 백승면∙신경란 부부 역시 <보그>로 맺은 인연이다.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자연스럽게 어머님의 가방을 들어주던 아버님은 대단한 로맨티시스트였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에서 촬영한 채명희∙김석현 부부. <보그> 2021년 5월호 칼럼 ‘Lady First’로 인연을 맺은 채명희 어머님은 아직까지도 종종 연락하며 지낸다.

    뒤늦게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를 물으며 나는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와 어떤 식으로 더 친밀해질 수 있을지, 때로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던 양쪽 세대가 어떻게 서로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은 느낌도 들었다.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 중요한 건 이것이었다. 또 한 번의 5월을 맞이하며 <보그>가 오랜만에 사진가 김동현을 부른 이유는 서울 거리에서 포착한 멋쟁이 엄마, 아빠들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다낭에서 어떤 생경한 즐거움을 느꼈는지 낱낱이 듣고 싶다. 그렇게 우린 한 발짝 가까워진다. (VK)

    사진가 김동현은 인터넷 검색으로는 찾을 수 없는 보물 같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을 스트리트 사진의 매력 중 하나로 꼽는다. “멋진 분들에게서 듣는 더 멋진 이야기. 스트리트 사진이 아니었다면 결코 접할 수 없었던 세상입니다.”
      포토그래퍼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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