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는 왜 재미있는가
드라마 <악귀>에서 도드라지는 건 민속학이라는 소재다. 초반 매회 민속학의 정의, 가치, 연구 방법, 연구 내용, 심지어 연구자들의 행태까지 주인공 염해상(오정세)의 말과 행동으로 설명된다. 그 직설이 지루하지 않은 건 상대가 자신에게 붙은 악귀를 떨치기 위해 설명을 필요로 하는 비전공자 구산영(김태리)이기 때문이다. 한국 민속을 시청자들이 잘 몰랐던 덕도 있다. 막연히 알던 것이라 더 흥미롭고, 조상들이 믿던 것이라니 더 진짜 같고, 등장하는 귀신 이야기마다 그 배경에 깔린 정서가 쉽게 공감 간다. 김은희 작가는 <킹덤>을 쓰면서 <악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한국 코스튬 드라마가 세계에서 먹히는 것을 직접 경험한 작가답게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자신감 있게 밀어붙인다.
김은희 작가는 한반도 민간 설화를 응용한 드라마 <전설의 고향>(1977~1989)을 보고 자란 세대다. 제목처럼 전설이 된 이 드라마에는 대개 슬픈 사연을 안고 다른 인간에게 살해당한 불쌍한 귀신이 나왔다. 그들은 사연을 들어달라고 인간에 다가가지만 인간은 그들을 오해해 겁에 질린다. 그러다 누군가 원한을 풀어주면 귀신들은 깨끗한 얼굴을 하고 사라진다. 구미호나 우렁각시 같은 동물 변형 설화에서는 간절한 열망을 품은 존재가 인간의 무지, 탐욕, 금기 위반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신이 세운 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마에 기반해 영원한 퇴치가 불가능한 서양 귀신, 인간을 괴롭히는 것 자체가 목적인 일본 귀신과 다르다. <악귀>의 귀신 이야기를 관통하는 정서도 한국 설화 고유의 억울함과 슬픔, 말하자면 ‘한’이다. 한국 설화의 정서가 이러했던 건 그 구전에 협력한 민중의 생활이 억울하고 슬펐기 때문일 것이다. <악귀>는 그와 유사한 현대의 가난한 민중을 이야기 전면에 등장시킨다.
<악귀>는 민담과 설화에서 착안한 귀신 이야기를 납량 특집류의 일회성 자극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은유하는 장치로 활용하고, 수사 추리물의 구조를 가미해 극적 재미를 더했다. 일자리를 좇아 대도시 슬럼가에서 버티고는 있지만 삶의 변수에 대처할 안전장치가 전무한 청년들, 그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고리대금업자, 공공 기관이 외면한 가정 폭력 피해 아동, 조손 가정,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 마을에서 도시가 집어삼킨 자녀를 그리워하며 쇠약해져가는 노인 등이 여러 에피소드에 나뉘어 등장한다. “민속학은 궁궐 밖 민중의 삶과 기록을 다룬다”는 염해상의 강의에 따르면 이 드라마도 훗날 2023년 대한민국을 연구하는 민속학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또 이 드라마의 악귀들은 세계를 정복하려는 거대한 악이 아니라 인간의 취약함을 파고들어 미움을 먹고 자라는 사적인 망령이다. 이건 현대 한국인의 행동 양식을 대표하는 피해 의식과 불링 문화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도 악귀 하나씩은 달고 사는지 모른다.
구산영에게 붙은 악귀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 매회 다른 귀신 에피소드를 끼워 넣고, 형사들이 좇는 연쇄 사건과 이를 절묘하게 중첩시키는 대목에서는 개연성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천착과 노련함이 돋보인다. 극의 뼈대가 무게감을 더해가는 동안 다양한 곁가지가 지루함을 덜어주고, 그 곁가지가 다시 구산영과 염해상의 이야기로 수렴되면서 극을 풍성하게 해주는 구조다. 예컨대 3화에서 구강모 교수(진선규)의 행적을 따라가던 구산영과 염해상은 과거 강모를 만난 적 있는 여대생이 실종 상태임을 알게 된다. 미스터리 사건에 관심이 많은 고참 형사 서문춘(김원해)과 특진을 노리는 경찰대 수석 출신 이홍새(홍경)는 원룸촌 연쇄 자살 사건을 파헤치다 실종 여대생을 찾아 나선다. 이 사건은 이홍새의 현실적 세계관으로도, 염해상의 오컬트 세계관으로도 해석 가능하도록 결론이 난다. 두 세계관의 중간자이자 중재자 서문춘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서로 악이나 쓰면서 지루한 평행선을 그리는 대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해당 에피소드는 산영에게 씐 악귀를 표면으로 끌어내면서 납량물다운 공포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김은희 작가는 <사인>, <시그널>, <킹덤>의 성공으로 ‘장르물의 대가’라는 수식을 얻었다. 하지만 <사인>과 <시그널>은 한국 드라마가 아직 국내 리그에 머물던 시절 새로운 시도라서 가산점을 받았고, <킹덤>은 원작이 있었다. 이제 장르 드라마가 시도만으로 칭찬받는 시대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작 <지리산>이 부진했으니 작가로서 압박이 심했을 걸로 짐작된다. 반갑게도 <악귀>는 그가 진정한 장르물의 대가로 올라섰음을 입증하는 작품이 될 듯하다. 주제 선정 방식, 꼼꼼한 취재, 그 결과를 극적으로 풀어내는 기술까지, 모든 면에서 한층 성숙해졌다. 투자를 받아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단계의 작가들은 가질 수 없는 집념과 야심, 그리고 자기 명성에 부합하려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연출과 연기도 여기에 완벽히 조응한다.
<악귀>는 작은 캐릭터에도 서사를 부여하느라 종종 전개가 느려진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김태리의 풍부한 감정선과 정교한 연기, 강렬한 눈빛 덕분에 정중동의 긴장이 생겨난다. 가난하고 억척스러운 공시생 구산영으로서 슬럼가를 터벅 걸음으로 돌아다닐 때 그의 모습은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젊은 여성과도 다르고, 악귀가 발현할 때의 신비로운 매혹과도 다르다. 몰입인지 고도의 계산인지 즉흥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전신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지는 디테일한 변화는 어떤 앵글에서든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든다. 구산영이 악귀에 잠식당하는 과정이 공포 비주얼의 핵심인데 이 위험한 전략을 김태리가 잘 구현하고 있다. 김원해, 오정세, 진선규는 어디서나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려주는 배우들인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홍경이 거기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도 놀랍다. <약한 영웅>에서 허약한 희생자였다가 배신자가 되는 격한 변화를 설득력 있게 연기한 그가 이번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매력적인 뉘앙스를 지닌 배우다.
곁가지가 많아 어수선해질 수 있는 전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연출도 주목할 만하다. <악귀>는 한강, 도시, 시골 마을, 학자의 방, 경찰서 등 공간의 특성이 중요한 드라마다. 각각의 공간이 캐릭터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하고, 와이드 앵글이나 빼곡한 소품에 묻히듯 존재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여러모로 미장센에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난다. 아무리 실력 좋은 배우라도 일상과 오컬트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연기 톤이 균일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연출이 긴 호흡으로 전체 흐름을 장악한다는 인상이다. 과장된 사운드나 시각 효과를 절제하고 우아하게 초반 분위기를 잡아가는 것도 자신만만해 보여 좋다. 이것이 강렬한 파국을 위한 포석이기를 기대한다.
<악귀>는 2주 차에 순간 최고 시청률 13%대를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다. 구산영에게 붙은 악귀와 염해상이 대면하고, 산영 어머니의 비밀스러운 과거에 조명을 드리우고, 악귀가 태자귀일 가능성도 제시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다. 아직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해상의 할머니(김해숙)가 어떤 역할을 할지도 궁금하다. <악귀>가 끝까지 아귀가 맞는 드라마로 남아주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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