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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커정이 창조한 디올의 금빛 초상

2023.08.25

프란시스 커정이 창조한 디올의 금빛 초상

조형적 디자인과 관능적으로 피어나는 후각의 마찰, 한 편의 시처럼 은은한 잔향. 디올 퍼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란시스 커정이 창조한 금빛 초상.

JULIA NONI

일류 디자인 하우스의 주요 직책에 중용된 이들이 그랬듯, 프란시스 커정(Francis Kurkdjian) 역시 소문난 책벌레다. 2021년 새로운 크리스챤 디올 퍼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발표를 앞둔 어느 날, 그는 그림과 사진이 많이 실린 두꺼운 서적과 수십 장의 포스트잇으로 가득 찬 트렁크를 끌고 그라스로 향했다. 그리고 칼 라거펠트의 기지 넘치는 말을 떠올렸다. “당신이 그것을 할 운명이 아니면 하지 마세요. 할 운명이어야 합니다.” 디올 그리고 향수라는 막중한 임무를 진두지휘할 능력이 차고 넘치는 그마저도 브랜드의 상징성, 품질, 매력, 매출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고루 갖춘 ‘쟈도르(J’adore)’의 새 향수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미션에 적지 않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용자로 하여금 독특한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상업적으로 성공한 블록버스터를 창출하는 능력은 커정의 장기다. 30년간 향수 제조 분야를 평정한 그는 어쩌면 디올로 향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활동 초창기에 커정은 지보단(Givaudan)의 마스터 조향사 칼리스 베커(Calice Becker)와 함께 일했는데, 그녀는 ‘쟈도르’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커정은 문득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일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 모든 것이 다 우연일까?

또 디올은 그가 구축해온 세상의 한 조각으로 공존했다. 커정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친구는 당시 크리스챤 디올의 패션 디자이너였다. ‘프랑수아즈 비(Françoise B)’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녀는 그의 집에 들러 이런저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장 콕토의 화이트 밍크 편애 성향부터 손쉽게 패브릭을 고정하는 법까지 흥미진진한 후일담으로 가득했죠.” 커정은 지금도 스토리텔링을 위한 세부 정보가 필요하면 휴대폰을 열어 팔순이 다 된 프랑수아즈의 번호를 누른다. “그녀는 제게 책이나 영화에서 얻을 수 없는 다른 뭔가를 일깨워요. 무척 소중한 경험이죠.”

디올 쟈도르와 프란시스 커정. 두 세계관의 만남은 낯설지만 섹시하고 신비롭다. 먼저 1999년 출시된 디올의 역작 쟈도르는 단순히 뷰티, 향수의 영역을 넘어 패션과 여성성을 상징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유산을 존중하고 무모한 도전을 즐기라’는 크리스챤 디올 정신에 부합하는 선구적 디자인과 꾸뛰르 감성, 물결치듯 일렁이는 플라워 어코드가 조화를 이루는 쟈도르. 올가을 쟈도르의 명맥에 또 하나의 혁신이 될 새 향수가 당신을 찾아간다. 기존 특성은 유지하되 차이는 포용하고, 유연한 재접근으로 마침내 조화를 찾아낸 ‘쟈도르 로르(L’Or de J’adore)다. 커정은 프랑스어로 ‘금’을 뜻하는 ‘로르(L’Or)’를 핵심어로 장엄한 플로럴 노트의 서막을 연다. “24K 골드가 그 자체로 순수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골드의 가장 순수한 특징을 얻으려면, 액체 상태가 될 때까지 금을 완전히 녹이고 불순물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 가열해야 합니다.” 그리고 커정은 ‘쟈도르 자체를 가열하면 어떻게 될까?’라고 자문했다. “불필요한 요소가 사라진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금은 냄새를 지니지 않죠. 그래서 저는 그것을 눈에 보이는 뭔가로 바꿔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각적인 것을 감정, 냄새로 해석해야 했죠.”

Coloured Sketches by Creation Packaging Studio of Parfums Christian Dior

이토록 복잡다단한 과정을 통해 얻은 쟈도르 로르는 기존 쟈도르와 비교해 더 부드럽고 균형적으로 개선된 모습이다. 향의 핵심인 플라워 부케가 손끝에 만져질 듯 더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금을 녹이면 가장 순수한 본질만 남는 것처럼 커정은 꽃을 세분화하고, 핵심이 되는 꽃의 본질만 남겨 플로럴 어코드의 농도를 확연히 높였다.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재스민과 센티폴리아 로즈 노트. 은방울꽃과 바이올렛 역시 눈부시게 빛나며 명백히 본연의 색깔을 드러낸다. 날카로운 후각적 특징은 완화되고, 재스민, 장미, 은방울꽃과 제비꽃의 아름다운 향이 풍성하고 감미로운 하나의 농축액이 되어 빛을 발하는 형상. 커정의 말처럼 그 향은 어깨 라인에 맞닿은 ‘햇살’과 같다.

여기에 거창한 보석 장식 없이도 꼿꼿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만으로 눈부신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암포라는 쟈도르의 또 다른 즐길 거리. 진귀한 금빛 새 향기를 감싼 쟈도르 로르의 암포라 역시 고유함은 유지한 채 우아한 형태로 재해석했다. 그 시작인 네크리스는 향수가 지닌 따뜻함과 풍성함을 동시에 담아낸 관전 포인트. 유리병을 따라 흐르는 리퀴드 골드처럼 풍요롭고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메탈과 유리 소재를 결합한 리드(Lid) 역시 관전 포인트. “쟈도르가 지닌 본연의 힘과 신비로움 덕에 대담함, 아름다움, 정교함 같은 디올의 정신을 되새기며, 온 세상의 모든 꽃을 소유하는 듯한 특별한 상상을 펼칠 수 있었어요. 쟈도르에서 쟈도르 로르로 넘어가며 저는 불필요한 요소가 사라진 순수한 향기의 정수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쟈도르의 상징적인 플로럴 터치를 간결하면서도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접근으로 재해석하기 위한 의도였죠. 다채로운 터치로 가득 찬 인상파 화가의 걸작처럼요.”

그렇다면 쟈도르 로르가 어울리는 사람은 누굴까? 그가 환히 웃으며 물음에 답했다. “조향사로 일하면 누군가로부터 늘 향수 뿌리게 될 사람을 염두에 두라는 조언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향수를 빗대어 ‘그녀는 이렇습니다, 그녀는 저렇습니다, 그녀는 BMW를 몰아요’라고 묘사하죠. 저 역시 이런 비유에 흥미를 느꼈어요.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전혀 납득이 되지 않더군요.” 그라스에서 파리로 돌아온 그는 가장 먼저 자료실을 방문해 크리스챤 디올의 생전 녹취록을 경청했다. 무슈 디올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크리스챤 디올은 ‘세상의 모든 여성이 제 모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향수를 만든다’는 뜻이기에,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죠.” 텅 빈 자료실에서 커정은 조용히 되뇌었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VK)

    Kathleen Baird-Murray, 박세미
    사진
    Julia Noni
    그림
    Coloured Sketches by Creation Packaging Studio of Parfums Christian D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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