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의 디바’를 보면서 겪은 생각의 흐름 9단계
1. 예고편을 봤을 때는 ‘무인도에서 15년간 표류한 가수 지망생 이야기’인 줄 알았다. 물론 <무인도의 디바>는 무인도에서 15년 만에 구조된 가수 지망생 서목하(박은빈)가 다시 가수가 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이니, 예상이 틀린 건 아니다. 다만, 기대한 것과 달랐다. 이 드라마의 예고편에서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또 다른 버전을 기대한 사람은 나뿐일까? 15세 소녀가 무인도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과정, 그런 가운데에서도 삶의 의지와 가수를 향한 꿈을 잃지 않는 모습 등등. 하지만 서목하의 무인도 생활은 1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어른 서목하의 모습과 그녀의 움막 풍경으로 짧게 요약된다. 이 장면에서 시청자는 서목하가 각종 쓰레기로 집기를 마련하고, 감자와 해산물을 채취하며 15년을 버텼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여기서도 기대의 포인트를 바꾸지 않았다. <캐스트 어웨이>에서도 주인공 척 놀랜드(톰 행크스)의 표류 생활은 4년의 시간을 건너뛴다. 15년을 건너뛴 이 드라마에서도 서목하의 무인도 생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하다못해 그녀가 이 섬을 벗어나기 위해 뗏목을 만들려고 애쓰는 장면이라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바로 2화에서 서목하는 강우학(차학연), 강보걸(채종협) 형제에게 구조되었다.
2. 제목에 ‘무인도’를 내걸고 있지만, 이 드라마는 사실 ‘무인도’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15년 동안 세상과 단절되었던 캐릭터가 필요할 뿐이다. 15년간 고립되었던 서목하는 그 덕분에 아직도 10대 시절 우상이었던 윤란주(김효진)를 사랑한다. 윤란주는 이미 연예계에서 잊힌 사람이나 다름없지만, 그 덕분에 서목하와 팀을 이룬다. 서목하가 무인도에 갇혀 살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또 다른 우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윤란주가 성대결정을 겪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도 최고의 디바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서목하와 팀을 이룰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이 드라마에서 ‘무인도’는 그처럼 여러 인물의 운명을 바꾼 설정이지만, 사실상 냉동 인간을 보존하는 냉동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3. 다소 기대에 어긋난 드라마지만, 그럼에도 <무인도의 디바>에는 박은빈이 있었다. 박은빈은 이 드라마에서 단지 주인공을 묘사하는 배우가 아니다. 어딘가 억지스러운 설정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존재다. 2화에서 더덕축제에 간 서목하가 윤란주 대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사실 아직 6화까지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때 박은빈이 보여주는 표정은 모든 감정을 이해시킨다. 15년간 무인도에 살면서 느꼈을 외로움, 그럼에도 잃지 않은 윤란주를 향한 사랑, 거의 평생을 그리워한 사람을 만난 뭉클함 등등. 박은빈의 전작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법무 법인 한바다의 대회의실에 걸린 거대한 고래 사진을 보던 우영우의 표정을 다시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나 <무인도의 디바>에서나 박은빈은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감정을 진심으로 전달하는 힘을 발휘한다. 무인도 생활을 기대하며 본 드라마였지만, 이때부터는 서목하의 꿈을 응원하며 보게 되는 것이다.
4. 이 드라마가 ‘무인도’를 제목에만 넣은 건 아니었다. 서목하는 끊임없이 무인도에서의 생활을 떠올린다. 세상과 인연을 끊으려던 찰나에 발견한 아이스박스, 그 안에 있던 라면. 그리고 멧돼지에게 쫓기다가 결국 멧돼지를 잡아버렸던 기억. 서목하에게 무인도의 기억은 위기를 대하는 태도를 만든다. 6화에서 윤란주와 대결하게 될 은모래의 존재감에 압도된 서목하는 멧돼지를 잡았을 때처럼 정면 승부한다. 이후에도 서목하는 분명 무인도에서 체득한 또 다른 삶의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2화에서 서목하는 강우학에게 이렇게 말했다. “란주 언니 만나겄다고 배 탔어요. 그리고 15년. 15년을 헤매다 왔는디, 다시 여기 눌러앉으라고요? 그럼 내 15년 세월, 말짱 도무룩 되는 거잖아요. 내 인생이 너무 허무하잖아요.” 예정된 결론이기는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15년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것이다.
5. 그런데 <무인도의 디바>에는 그런 박은빈도 어쩌지 못하는 게 있다. 서목하를 도와주다가 사라진 정기호에 관한 미스터리, 그리고 이와 관련되어 있는 강우학, 강보걸 형제의 정체다. 드라마의 서사라는 게 어느 정도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좀 심하다. 이들은 우연히 청소 봉사를 하러 간 무인도에서 서목하를 구조한다. 그런데 이들은 각각 방송국의 기자이고 예능 프로그램 PD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우연은 선을 넘었다. 15년 전 서목하를 도와주었고, 그래서 서목하가 15년간 애타게 찾던 정기호가 바로 이 형제 중 한 명이라는 설정이다. 게다가 여기에 한때 일일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던 기억상실 설정까지 있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는데, 기억상실까지 콤보를 이루다니. 굳이 왜 이렇게 억지스러운 설정을 한 걸까.
6. 그러고 보니 <무인도의 디바>는 이 드라마를 집필한 박혜련 작가의 2013년 작품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상당히 닮았다. 어린 시절 함께 거대한 위협을 느꼈던 두 남녀. 그들의 이별과 재회는 곧 장혜성(이보영)과 박수하(이종석)의 서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서목하-정기호만이 아니라, 서목하-윤란주하고도 닮았다. 한때 빛나는 디바였으나 지금은 잊힌 가수 윤란주, 그리고 어린 시절 당차고 정의로운 태도로 위기에 처한 소년을 구했으나, 지금은 돈 때문에 국선 변호사로 일하는 장혜성. 여기에 그들을 오랫동안 사랑했던 박수하와 서목하.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무인도의 디바>의 가공할 ‘우연성’은 납득이 안 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박수하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도와준 혜성을 잊지 않고 그녀를 찾아다닌 끝에 결국 그녀를 만났다. 박수하의 의지가 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무인도의 디바>에서 정기호와 서목하가 한집에 살게 되는 과정에는 누구의 의지도 없다. 이 형제들은 그저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그녀가 딱해서 도와준 것이고, 서목하는 당장 오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7. 6화를 보니, 이들의 만남에도 누군가의 의지가 있었다. 정기호는 강보걸이었다. 강보걸이 정기호라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 (이전에 억지라고 여겼던 것들이 다 해소된 건 아니지만) 2화의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강우학, 강보걸 형제가 서목하가 있는 무인도에 온 이유는 강보걸이 무인도를 돌며 쓰레기를 줍는 봉사 활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설정이다. 방송국 예능 PD인 강보걸은 왜 소중한 주말에 섬을 돌며 봉사 활동을 했을까.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았지만, 강보걸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설정이라면, 분명 그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 모르는 서목하를 찾기 위해 ‘봉사’ 명목으로 무인도를 돌아다녔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2화의 부제는 ‘우연 vs 필연’이었다). 또 자기가 혼자 쓰려고 했던 옥탑방을 서목하에게 내준 것도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후 회차 중 어딘가에는 강보걸(aka. 정기호)이 무인도에서 서목하를 발견한 순간, 그가 혼자만 느낀 기쁨과 반가움, 동시에 생겨난 여러 고민에 관련된 장면이 나올 것이다. 15년 동안 찾아 헤맨 목하를 드디어 만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2화의 강보걸은 너무 덤덤했고 시크했으니 말이다.
8. 제작진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들도 이런 전개 방식 때문에 ‘억지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걸 걱정했을 것이다. 그런 걱정을 이겨낸 선택의 의지는 무엇이었을까. 정기호에게 형제가 있다는 설정을 하고, 그가 기억상실을 겪었다는 설정까지 더하며 관계를 꼬았을 때 얻는 건 무엇일까. ‘떡밥’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못하겠다. 시청자를 낚아서 계속 다음 회차를 보게 만드는 미스터리의 떡밥,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를 통한 삼각관계의 떡밥. 그리고 이제 시청자들은 강보걸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아니면 서목하가 그의 정체를 파악하고), 드디어 정기호와 서목하가 진짜 재회하는 순간을 기대할 것이다. 또 이 드라마의 최종 보스인 정기호의 친아버지 정봉완(이승준)이 끝까지 이들을 위기에 빠뜨릴 것이니, 긴장감까지 생길 것이다.
9. 결국 <무인도의 디바>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어린 시절 우상을 도와 자신도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 그리고 어린 시절에 느낀 공포와 마주해 싸우는 이야기. <너의 목소리가 들려>도 그런 이야기였지만, <무인도의 디바>에서 이 두 가지 이야기는 각각 다른 색깔의 장르로 진행된다. 한쪽이 서바이벌 예능이라면, 다른 한쪽은 사이코패스 범죄극이다. 인물이 연결되어 있을 뿐 각각의 서사가 지닌 색깔과 상관없는 듯한 느낌. 지난 1월에 방영된 같은 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이 떠올랐다. 매력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서사를 만들어놓고도 미스터리 연쇄 살인극 이야기를 무리하게 끼워 넣었다가 결국 찜찜하게 마무리한 사례였다. 이제 절반이 남은 <무인도의 디바>는 어떤 마무리를 보여줄까. 역시 마무리에서도 박은빈을 믿으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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