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이 관객의 스트레스를 끌어올리는 법
*이 글에는 영화 <서울의 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울의 봄>을 본 다음 날까지도 유독 한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이태신 장군의 부대까지 제압해 드디어 반란에 성공한 ‘그 사람(극 중 이름은 전두광)’이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며 킥킥대고 웃던 모습이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 소변을 보느라 구부러진 등과 허리. 그리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헤어스타일. <서울의 봄>은 44년 전의 사건을 관객이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연출한 영화지만, 그 장면에서는 기이한 에너지를 모은 듯 보였다.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끝까지 보게 만들려고 애쓴 느낌. 상업 영화의 선택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과격하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지금 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는 중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를 포함한 관객이 어떤 감정으로 극장을 나온 건지 궁금해졌다.
<서울의 봄>이 관객에게 선택받는 가장 큰 이유는 분명 이 영화가 매력적인 장르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의 봄>은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결을 하나의 공성전처럼 그려냈다. 전두광(황정민)이 이끄는 반란군은 북한의 남침에 상시 대비해야 하는 전방 부대까지 서울로 진입시키고, 이태신(정우성)은 그런 반란군 세력을 혈혈단신으로 막아낸다. 한쪽에서 승기를 잡았을 때, 다른 한쪽은 또 다른 전략으로 상대를 노심초사하게 만든다. 그런 공방의 반복이 관객을 긴장시킨다. 하지만 그런 장르적인 흥미만으로 <서울의 봄>의 매력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이건 좌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감정에서나 전두광의 폭소는 승자의 미소다. 여기까지 영화를 함께 본 관객은 패배했고, 그는 이긴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로 흥행한다는 건, 지금의 관객이 이 영화에서 어떤 감정적인 울림을 받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것은 무엇일까? 자문자답을 반복한 끝에 떠오른 영화는 휴 잭맨,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 <레미제라블>(2012)이었다. <레미제라블>의 인물들 또한 결국 무너지지만, 당시 관객은 그들의 고난과 고통에 절절하게 공감했다. <서울의 봄>을 보는 관객이 경험하는 것 또한 맥락상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서울의 봄>을 보면서 느끼는 고통은 당연히 전두광에서 시작한다. 다만 이 영화가 처음부터 그를 대놓고 악질인 인물로 묘사하는 건 아니다. 초반부에서는 출세의 야욕을 가진 ‘밉상’ 정도다. 아무리 44년 전이라고 해도 복도에 피우던 담배를 그냥 던져버린다든지, 각 부서의 차관들을 모아놓고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예의와 격식 따위는 무시한다든지…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상황에서 다급해지는 모습까지 담고 있다. 전두광에 대한 울분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은 총리 공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문을 열던 운전기사를 그대로 들이받는 장면이다. 사실 이건 실제 역사에는 없는 부분이다. 어디까지나 영화적인 연출이다. 그래서 이 장면의 전두광은 (황정민이 연기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성수 감독의 전작 <아수라>의 박성배 시장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 속 모습으로만 놓고 보자면 전두광과 박성배는 ‘내일’을 생각지 않는 빌런이다. 그렇게 오늘만 사는 빌런만큼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는 빌런도 없다.
‘전두광’이 고통의 씨앗이라면, 이 고통을 울분으로 전달하는 건, 이태신(정우성)의 역할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전두광에 대항하는 이태신의 감정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가 홀로 행주대교에 서서 공수부대원들을 막아설 때, 그리고 행정병과 취사병까지 동원해 직접 출동하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사실 이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없었던 부분이다. 실제 이태신 장군의 모델이었던 장태완 장군이 부대원들과 출동하려고 했던 건 맞지만, 그는 부하들이 목숨을 잃게 될 거란 생각에 결국 출동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이태신은 반란군의 근거지 앞까지 출동하고 대기 중이던 야포부대에 발사 준비까지 명령한다. 이것을 역사와 다른 과장된 연출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의 행동은 오히려 전두광 덕분에 설득력을 갖는다. 이 정도의 빌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의로운 쪽도 모든 걸 내던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태신은 홀로 철조망을 건너 전두광과 대면한다. 이때 이태신은 말한다. “당신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자격이 없어.” 이때 이태신의 행동은 명확하게 이 영화를 함께 본 관객의 입장을 대변한다.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담아낸 한마디의 외침. 그리고 그 끝에 소변을 보며 낄낄대는 전두광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이다. 어떤 공격으로도, 어떤 말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것 같은 빌런의 모습. 안 그래도 울고 싶은 관객에게 뺨까지 때리는 순간이라고 할까? 이러니 <서울의 봄>을 본 관객이 스마트워치로 스트레스 지수 챌린지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납득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분노와 스트레스를 그렇게라도 유머로 바꾸는 게 삼키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그 웃음은 또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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