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런웨이를 타고
사랑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매력적인 주제죠. 무대를 런웨이로 옮기면 할 말은 더 많아집니다. 패션 역시 언제나 사랑을 노래해왔거든요. 옷을 빌려 세상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 하우스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포장지 삼아 패션에 대한 사랑을 쏟아낸 디자이너도 있습니다. 런웨이에서 사랑은 결코 멈추거나 고인 적이 없어요. 수많은 디자이너의 손길을 타고 늘 새로운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아 부지런히 흘러왔죠. 이렇게요.
생 로랑 1970 & 2002 S/S Couture
2002년 1월 22일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이브 생 로랑의 마지막 꾸뛰르 컬렉션이 펼쳐졌습니다. 이날 등장한 룩 278벌은 1962년부터 2002년까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세상에 내보인 스타일의 총집합이었죠. 패션을 향한 그의 40년간의 사랑이 한 벌 한 벌 재빨리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중 42번째로 등장한 웨딩 코트는 그가 사랑을 얼마나 다채로운 빛깔로 바라보는지 알려줬죠. 1970 F/W 컬렉션에 처음 등장한 이 코트는 흔히 ‘웨딩’ 하면 떠오르는 하얀색이 아니었습니다. 알록달록한 패치워크와 전면의 ‘LOVE ME FOREVER’ 문장을 매듭짓는 뒷면의 ‘OR NEVER’라는 위트 있는 문구까지, 통통 튀는 사랑의 활기를 담아냈죠. 그는 평생 사랑을 모티브로 삼아왔습니다. 하트와 심장 모양부터 비둘기, 레터링 등 사랑과 관련된 디테일을 부적처럼 활용했죠. 공교롭게도 1970년은 생 로랑이 고객에게 보내는 첫 축하 카드, 일명 ‘러브 카드’를 처음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카드는 2007년까지 계속됐습니다).
생 로랑 F/W 2016 RTW
‘사랑’을 향한 생 로랑의 사랑은 에디 슬리먼이 선보인 마지막 쇼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패션과 생 로랑의 유산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버무려낸 컬렉션으로 쇼의 마무리를 담당한 코트는 등장과 동시에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코트의 통통한 하트 모양은 생 로랑이 평생 말해온 사랑과 스캔들 컬렉션이라 알려진 1971년 생 로랑의 Libération/Quarante 컬렉션의 녹색 코트를 참조한 것이죠.
존 갈리아노 1994 S/S RTW
패션계의 로맨티시스트이자 이야기꾼 존 갈리아노! 특히 신화와 역사 속 이야기를 런웨이에 풀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녔죠. 이번 컬렉션은 존 갈리아노가 직접 구상한 이야기입니다. 러시아에서 스코틀랜드로 도망친 루크레티아 공주의 여정을 캣워크에 그려냈는데요.
몰래 탈출을 감행하는 공주가 호화스러운 후프 스커트를 입고 런웨이를 내달리는 것으로 쇼는 시작됩니다. 이후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한 공주는 풍성한 드레스 대신 미니스커트, 슬립 드레스 등 한결 가뿐해진 차림으로 파티와 자유를 만끽하죠. 걸음걸이도 어느새 여유롭고 당당해졌고요. 쇼 후반부에서는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공주가 마침내 새로운 사랑을 만나 방황을 마무리 짓습니다. 존 갈리아노의 전매특허, 바이어스컷 드레스로 우아함을 뽐내면서요. 한 편의 동화에는 여성복에 대한 존 갈리아노의 사랑과 찬사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드레스와 스커트, 팬츠와 란제리, 모든 종류의 여성복이 다채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일깨워주는 컬렉션이었죠.
발렌시아가 1998 S/S RTW
발렌시아가를 논할 때 블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시작에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실제 연애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죠. 사생활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그에게는 모자 제작자이자 사업 파트너이며 평생의 사랑이었던 브와지오 야보로프스키 다탱빌(Wladzio Jaworowski d’Attainville)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8년 다탱빌이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맙니다. 발렌시아가는 하우스 접는 걸 고려할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그해 나온 컬렉션 드레스는 온통 검은색이었죠. 발렌시아가는 그 후에도 블랙을 눈에 띄게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고요. 죽은 연인을 향한 사랑과 애도, 자신의 슬픔을 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렌시아가의 블랙이 더 널리 퍼지게 된 계기라는 평이 있고요.
위에 소개한 룩은 1998년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에서 처음 선보인 컬렉션입니다. 오프닝부터 피날레까지 블랙으로 일관하며 하우스의 DNA를 이어갔죠. 예의 위상을 잃어가던 발렌시아가에 새 숨을 불어넣은 결정적인 쇼였고요. 그가 발렌시아가를 맡기 몇 년 전, 발렌시아가 일본 라이선스를 위해 결혼과 장례 예복을 디자인했다는 것이 어쩐지 절묘하게 느껴지는군요.
디올 2000 F/W Couture
존 갈리아노가 파리의 난민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컬렉션. 쇼는 세상 모든 형태의 사랑과 에로티시즘을 담아낸 듯했습니다. 교황의 옷차림으로 엄숙하게 포문을 연 오프닝과 초반의 호화로운 결혼식 행렬이 무색해질 정도로 솔직하고 적나라했죠. 결혼과 사랑은 마냥 고상한 게 아니라는 듯이요. 가지각색의 모습을 한 커플들이 등장한 후에는 페티시에 대한 탐구가 이어졌습니다. 목에 키스 마크가 선연한 메이드, 채찍과 밧줄을 비롯한 BDSM을 연상케 하는 디테일, 가면을 쓴 쇼걸 등 논쟁적인 룩으로 가득했죠.
빅터앤롤프 2005 F/W
사랑은 고된 현실의 아늑한 피난처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듀오 빅터 호스팅과 롤프 스뇌렌은 사랑의 그런 포근한 면모를 일명 ‘베드 로맨스(Bed Romance)’로 승화시켰죠. 머리 뒤에 받친 베개, 침대 시트를 휘감은 듯한 셔츠와 드레스, 퀼팅 이불로 만든 양복 등 ‘침실’에 대한 단서로 가득했습니다. 모델들은 꿈꾸듯 나른한 걸음걸이로 런웨이를 누볐고요. 화룡점정은 붉은 글씨로 ‘I Love You’라 새긴 실크 드레스와 침대맡에 꽃을 놓아둔 듯한 디자인의 드레스였죠. 그랜드피아노 반주와 함께 울려 퍼진 싱어송라이터 토리 에이모스의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부드러웠고요. 롤프 스뇌렌은 컬렉션에 대해 “메시지는 간단해요, 사랑이죠”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질 샌더 2012 S/S RTW
결혼과 사랑처럼 패션과 웨딩드레스도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인생의 사랑 앞에 입는 드레스는 디자이너에게 하우스와 자신의 미감을 온전하되 압축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집니다. 웨딩드레스가 대체로 꾸뛰르 컬렉션의 피날레를 담당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질 샌더의 2012 S/S 컬렉션 끝에 등장한 네 벌의 웨딩드레스는 ‘질 샌더에서 결혼하는 여자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라프 시몬스의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컬렉션은 라프 시몬스의 ‘꾸뛰르 3부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죠. 깨끗한 화이트 컬러와 간결한 라인, 최소화한 장식은 화려한 웨딩드레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투명하고 단단한 사랑의 핵심만 드러낸 듯했죠. 웨딩드레스의 순수함과 질 샌더의 명료함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앤 드멀미스터 2016 & 2017 S/S Menswear
남성복에 담긴 사랑의 모습은 어떨까요? 2014 F/W 컬렉션을 끝으로 하우스를 떠난 앤 드멀미스터. 그 빈자리를 채운 세바스티앙 뮤니에르는 기존과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대체로 무채색, 특히 블랙의 향연이던 하우스에 과감히 컬러를 칠하기 시작했어요. ‘사랑에 대한 연구’였다는 2016 S/S 컬렉션도 그 시도가 적용됐습니다. 뮤니에르는 전통적인 사랑의 개념보다는 활기차고 신선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죠. 이어진 2017 S/S 컬렉션은 사랑을 한 발짝 더 가까이 들여다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컬렉션을 “사랑에 빠진 반항아”라 설명하며 “사랑은 다채로운 감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수줍어지고, 얼굴이 빨개지곤 한다. 그 순간의 감성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죠. 이 감성은 옷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무채색 베이스에 레드를 포인트 컬러로 활용했고, 실크와 시스루 소재를 통해 어딘가 연약해 보이면서도 낭만적인 모습을 그려냈어요. ‘I AM RED WITH LOVE’라는 문구와 함께요.
발렌티노 F/W 2019 RTW
피엘파올로 피촐리는 2019 F/W 컬렉션에 사랑을 어느 때보다 꼼꼼하고 치밀하게 채워 넣었습니다. 쇼의 모든 좌석에는 스코틀랜드 시인이자 아티스트 로버트 몽고메리를 비롯한 시인들이 참여한 ‘Valentino on Love’라는 시집이 놓여 있었어요. 의상은 더 직접적이었습니다. 사랑을 상징하는 장미와 로댕의 조각 작품 ‘더 키스’에서 따온 듯한 그래픽 프린트가 주를 이루었죠. 사랑의 시를 새겨 넣은 드레스도 등장했고요. 피날레에는 “The people you love become ghosts inside of you and like this you keep them alive.” 몽고메리의 시구가 새겨진 조명이 반짝였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낭만으로 가득한 쇼였죠.
MM6 메종 마르지엘라 S/S 2020 RTW
MM6 디자인 팀은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결혼식, 그리고 신혼여행 대신 선택한 평화 시위 ‘베드인’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할 때면 자주 언급되는 커플이지만 이렇게 옷에 직접적으로 표현한 경우는 드물었어요. 수트와 란제리, 셔츠와 튤 스커트, 면사포와 청바지 등 모든 룩은 충돌과 묘한 조화로 가득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요. 하우스 특유의 위트도 잊지 않고 가미됐습니다. 깡통 굽으로 만든 부츠에서는 웨딩 카 뒤에 매달곤 하는 깡통이 생각났고, 드레스 후면에는 ‘JUST MARRIED’ 대신 ‘JUST MARGIELA’가 적혀 있었죠.
자크뮈스 S/S 2021 RTW
코로나19 시기, 자크뮈스는 약 100명의 게스트를 파리 외곽의 밀밭으로 초대했습니다. 자크뮈스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컬렉션이었죠. 주제부터 ‘라무르(L’Amour, 프랑스어로 사랑)’였거든요. 자크뮈스는 시골 마을의 결혼식이나 수확 축제처럼 사랑과 축하 가득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고 이야기했죠. 그래서일까요? 흔한 하트 모양이나 핑크빛 의상은 한 벌도 없었어요. 오히려 그 반대였죠. 실루엣은 한없이 목가적이고 가뿐했으며, 컬러감은 햇볕에 바랜 듯 자연스러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아늑한 시간, 자크뮈스가 그린 사랑은 모두가 가슴 한구석에 간직하고 꿈꾸는 장면이었습니다.
#THE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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