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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여왕’, 10년에 걸쳐 강화된 박지은 작가의 여자들

2024.03.18

by 강병진

    ‘눈물의 여왕’, 10년에 걸쳐 강화된 박지은 작가의 여자들

    tvN ‘눈물의 여왕’

    <눈물의 여왕> 이전에 <내조의 여왕>(2009)과 <역전의 여왕>(2010)이 있었다. 모두 박지은 작가의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들의 여주인공은 모두 유부녀다. 하지만 이전의 여왕들과 <눈물의 여왕>은 다르다. 그 사이에 <별에서 온 그대>(2013)와 <프로듀사>(2015), <푸른 바다의 전설>(2016), <사랑의 불시착>(2019)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송이, 신디, 윤세리는 모두 그 시점의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였다. 모두가 선망하는 미모와 재력을 가졌고, 이를 지키려 예민하게 살던 그들은 어딘가로 불시착한다. 그곳은 하필 외계인의 옆집이든가, 최고 스타인 자신에게 야외 취침을 시키는 예능 프로그램 현장이든가, 북한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그동안 몰랐던 의외의 식성 또는 그동안 고민해본 적 없었던 감정 등등. 이때 그들이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을 조금씩 허무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이 열광했다. 남한에서는 무엇을 먹어도 단 세 입밖에 먹지 않았던 윤세리(손예진)가 설탕 뿌린 누룽지를 끊지 못한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건 캐릭터와 설정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이 모두 최고의 스타라는 점이 중요하다. 치킨에 집착하는 천송이가 재밌는 게 아니라, 그게 전지현이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들은 드라마의 외피를 쓴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같기도 했다. 리얼 예능에는 출연하지 않을 최고의 스타들을 TV 드라마로 불러내 리얼 예능의 상황에 던져놓는 형태라고 할까?

    tvN ‘눈물의 여왕’
    tvN ‘눈물의 여왕’

    <눈물의 여왕>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작가의 전작만큼 드라마틱한 상황 변화를 겪는 건 아니지만, 주인공 홍해인(김지원)도 몰랐던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여자다. 그녀가 맞닥뜨린 첫 번째 변화는 질병이다. 하필 전 세계 의료진 누구도 아직 치료법을 찾지 못한 불치병에 걸렸다. 여기에 더해진 또 다른 변화는 결혼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다시 남편에게 설렌다는 것이다. 1조 클럽 가입을 눈앞에 둔 백화점의 주인으로서 평생을 도도하게 살았던 그녀의 벽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배시시 웃거나,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의 몸을 보고 화끈거리거나(“야심한 밤에 너무 고자극이다”). 또 비 맞는 길고양이에게 우산을 씌워주는가 하면 암에 걸린 부모 때문에 힘들어하는 직원의 사연을 엿듣고는 눈물까지 흘린다. 자신의 변화가 난감한 그녀는 이게 다 병 때문이라고 여긴다. “누가 아프거나 말거나 울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왜 자꾸 공감이 되죠? 이거 다 이 병의 증상인가요?” 시한부 환자가 주인공인데, 이렇게 킥킥대도 되나 싶었다.

    <눈물의 여왕>의 홍해인은 그 자체로 박지은 작가의 승리 공식인 캐릭터다. 하지만 김수현이 연기하는 백현우도 그에 못지않은 공식이다.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에 미남인데 시골 과수원집 아들다운 순박함까지 갖춘 남자.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원래 검사를 하려다가 PD가 된” 설정이었던 <프로듀사>의 백승찬이 방송국이 아니라 유통 기업에 들어갔다면 그대로 백현우가 되었을 것이다. 백승찬, 백현우, 여기에 <사랑의 불시착>의 리정혁(현빈)까지 일렬로 세워놓고 볼 때, 이들은 모두 여성 앞에서는 어리숙해진다는 무기를 갖고 있다. 물론 능력도 있고, 외모도 좋은데, 어리숙해서 그게 무기라는 것이다. 그런 어리숙함 덕분에 항상 치열하고 예민한 세상에서만 살아왔던 여자 주인공은 그 남자의 세계에서 위로와 안식을 얻는다.

    tvN ‘눈물의 여왕’

    다만 백현우가 다른 남자들과 다른 점은 그가 남편이라는 것이다. 홍해인이 재벌가의 딸인 줄 모르고, 그녀를 사랑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재벌가의 사위가 된다. 처가 식구들의 온갖 송사를 도맡아야 하고, 친아버지 회갑 잔치는 못 가도 처가 제사에는 참석해야 하는 처지다. 이미 백현우도 급격한 변화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처럼 <눈물의 여왕>은 박지은 작가가 지난 10년에 걸쳐 쌓고 반복한 공식을 두 배로 강화한 작품이다. 여기에 더해 박지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내조의 여왕>에서 보여준 부부의 끈끈한 감정까지 담아낼 듯 보인다. 4화에서 홍해인은 백현우의 사랑을 의심하는 윤은성(박성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행복한 걸 함께하면서 달콤한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싫어서 죽을 것 같은 걸 함께 견뎌주는 거야.” 자신의 빈틈을 노리는 재벌가에서 백현우는 홍해인에게 그처럼 함께 견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남편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빌런들의 움직임을 볼 때, 3년 만에 서로에게 다시 반한 부부는 결국 손을 마주 잡고 그들의 공격에 대응할 것이다. 주인공의 시한부 설정을 어떻게 풀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병을 극복해낼 것이다. 처음부터 이겨내지 못할 위기는 만들지 않는 것도 박지은 작가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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