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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모스키노, 아드리안 아피올라자의 장난기

2025.05.07

새로운 모스키노, 아드리안 아피올라자의 장난기

아드리안 아피올라자가 모스키노를 앞으로 이끌고 있다. 그만의 리더십은? 셀 수 없이 수집한 별의별 아카이브 의상에 자신만의 장난기를 더하는 것.

2024년부터 모스키노를 이끌고 있는 아피올라자와 모델 마틸드(Matilde)를 밀라노의 모스키노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밀라노 중앙역 부근에 있는 모스키노 사무실 계단을 오르자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밀로의 비너스’와 닮은 머리 없는 그리스 조각상이 나를 맞이했다. 이는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에 조각된 1980년대 후반 광고 캠페인의 패턴이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드리안 아피올라자(Adrian Appiolaza)는 지난해 1월 브랜드에 부임하며 건물 입구에 그 동상을 세우고 빈티지 캠페인 이미지를 그의 첫 패션쇼에 접목했다.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아피올라자가 자신의 최근 작품에 영감을 준 1980~1990년대 모스키노 작품으로 가득 찬 크고 밝은 위층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1992년에 제작된 옐로 스마일리 가죽 재킷, 1994년 나폴리 방언 ‘Yo, Mary!’라 외치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그려진 셔츠, 이 브랜드의 창립자 프랑코 모스키노의 아이 같은 드로잉을 수놓은 1993년 제작된 또 다른 재킷, 교황이 쓸 법한 1994년산 모자 등이 방 안에 신선하고 직관적으로, 생동감 넘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종교 의상에 빠져 있어요”라고 52세의 아피올라자가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라면서 할머니와 함께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갔죠. 하지만 기도보다 수녀와 사제의 옷에 더 관심이 많았답니다.” 다양한 색상의 넥타이, 목걸이, 브래지어와 함께 도발적이고 아이러니한 모스키노의 상징인 정치적 표현, 미소, 종교 풍자 등이 곳곳에 넘쳤다. 프랑코는 잘 알려진 대로 “혼돈이 없는 창의성은 없다(Non c’è creatività senza caos)”고 말했다. 아피올라자는 무질서 속에서 비슷한 기쁨을 느낀다. “프랑코의 혼돈에 대한 감각을 제 것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아카이브 탐색에 몰두하는 이들은 패션계의 고고학자다. 그리고 그를 모스키노에 더 가깝게 이끄는 것은 아피올라자가 품은 이런 발굴에 대한 열정이었다. 이 브랜드의 아카이브에는 창립한 1983년부터 현재까지 하우스가 제작한 거의 모든 작품이 있다. “블라우스 세 벌과 드레스 네 벌 정도 찾을 줄 알았는데, 없는 게 없더라고요.” 아피올라자는 이것저것 탐구하며 자신의 비전을 바탕으로 구축할 수 있는 영감을 찾으려고 애썼다. 한편으로는 아피올라자의 새 작품이 전설적인 프랑코와 협업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제가 그 금고를 열어 발견한 것입니다. 프랑코가 매우 미래지향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아피올라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쇼를 보면 그는 아주 많은 레퍼런스를 한데 모아놓았어요. 1990년대와 컨셉추얼하고 아방가르드한 디자이너들에 대한 제 열정 때문에 그에게 즉시 끌렸죠. 제가 패션을 공부하는 동안 함께 자라온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거든요.”

내가 이탈리아에서 자라던 1980년대, 프랑코 모스키노는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는 문화 선동가였다. 패션쇼 초대장으로 속옷을 보냈고, 때로는 변장한 채 광고에 출연했다. 그리고 단추를 바람개비로 교체하고, 수저를 클래식 수트에 꿰매고, 판매 가격을 우아한 블랙 시스 드레스에 수놓았다. 그의 가장 강렬한 작품 중 일부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 시절 이탈리아에서 일기 시작한 자본주의 열풍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격렬하던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는 아피올라자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품에도 비슷한 용기를 불어넣었고, 창업자의 유산을 영리하고 재치 있게 해석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Money Doesn’t Make the World Go Around(돈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수가 새겨진 문구 아래 1,000리라 지폐 뒷면이 프린트된 흰색 재킷을 가리켰다. 근처에는 아피올라자의 패션계 데뷔 시기였던 1994년에 발표된 모스키노 컬렉션의 이탈리아 국기 테마 드레스가 있었다. “제 버전은 드레스 윗부분을 해체하고, 국기를 드레스에 드레이핑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좀 더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늘 뭔가를 비틀어보려고 노력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오리지널을 알아보죠.”

한편 1988년에 만든 유명한 블랙 브라 드레스는 아피올라자의 손길을 거쳐 시크한 칵테일 드레스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모스키노의 신성한 원형 몇 가지도 작품에 접목했다. 그 유명한 투비노 드레스를 꼽을 수 있다. 프랑코가 도발적인 아이디어의 광고판처럼 사용하던 우아한 시스 드레스다. 아피올라자는 “지난 패션쇼를 해체된 투비노 시리즈로 마무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매우 단순한 것과 다른 시대의 것을 병치하고 싶었습니다.” 1991년 제작된 프랑코의 밀리터리 스타일 서바이벌 재킷도 그런 예다. 재킷 주머니마다 무기 대신 뷰티 제품이 들어 있었다. 내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매니큐어병을 열어 빈티지 화학물질 냄새를 맡자 그가 웃었다. “도시에서 살아남기를 주제로 하는 그 재킷 버전을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며 펜, 노트, 독서용 안경으로 가득 찬 주머니가 특징인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다음 내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작품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1994년 제작된 멋진 비닐봉지 드레스였다. 그것은 아피올라자가 컬렉션을 위해 재고할 작품이었다. “모스키노는 진짜 쓰레기봉투를 사용했어요. 그는 ‘럭셔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죠. 저는 럭셔리라는 개념을 적용해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패브릭뿐 아니라 옷 입는 방식, 물건 만드는 방식에 관한 것이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란 아피올라자의 패션에 대한 첫 번째 레퍼런스와 모델은 그의 어머니, 할머니, 이모였다. 하지만 10대가 되자 새로운 도전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와 친구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더 큐어(The Cure), 더 스미스(The Smiths), 해피 먼데이즈(Happy Mondays)가 주축이던 영국 음악를 좋아했다. 아피올라자는 “런던으로 이주해 그들이 호흡하는 세상의 일부가 되는 꿈을 꿨어요”라고 예전을 떠올렸다. 그는 어른이 되자마자 학업과 보험회사 일을 모두 포기하고 영어도 거의 못하는 상태에서 직장도 계획도 없이 런던으로 날아갔다. 런던의 활기찬 클럽을 드나들며 니콜라 포미체티, 킴 존스와 친해졌다. 킴 존스는 그에게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지원할 것을 권했다. 그다음 역사를 써 내려갔다. 곧 알렉산더 맥퀸, 미우미우, 루이 비통, 끌로에, 얼마 전까지 로에베에서 일했다.

아피올라자가 품은 패션을 향한 거의 원초적인 사랑은 디자이너인 파트너 라이언 베나서(Ryan Benacer, 두 사람은 2016년에 서로 아는 친구들을 통해 만났다)와 함께 소유하고 운영하는 빈티지 매장 ‘20 Age Archive’에도 반영되어 있다. “패션은 개인적인 표현의 형태지만 사회적, 문화적 역사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통해 배울 것이 늘 너무 많습니다.” 아피올라자는 설명했다. 빈티지 메종 마르지엘라와 꼼데가르송, 발렌시아가, 셀린느 등의 컨셉 작품 수집을 향한 공통된 열정으로 시작된 것이 순식간에 4,000여 점을 확보한 아카이브로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것들을 스타일리스트, 잡지, 밴드 등에 대여했다. 아피올라자는 수집과 일상 업무 외에도, 재즈와 클래식부터 팝 음악까지 다양한 음악을 듣고 누아르 영화와 빈티지 호러 영화를 보는 데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음악이 일상의 분위기를 결정합니다.”

아피올라자는 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골동품 가게로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곳은 트램 선로 아래 인근 산업 지대에 있었다. 첫 번째 장소 ‘크레이지 아트’에서 보물찾기를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산호와 고서, 심지어 빈티지 진공청소기 섹션 전체를 둘러보며 서로 눈짓을 건넸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탈리아와 여러 나라에서 제작된 가구가 전시된 길 건너편 ‘마가치노 76(Magazzino 76)’에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다. 아피올라자는 웹사이트에서 본 4단 메탈 책장을 찾고 있었다. 수북이 쌓인 의자, 램프, 테이블 사이에서 또 다른 보석이 계속 나오자, 우리의 눈빛은 함박웃음으로 바뀌었다. 무질서와 혼돈, 그에 상응하는 기쁨이 이곳에서도 지배적인 것 같았다. 아피올라자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VK)

    사진
    Federico Ciamei, Acielle(Style Du Monde) / Courtesy of Moschino
    Chiara Barz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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