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와 발효의 교차점, 피치 못할 사정들의 부풀림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오는 7월 20일까지 열리는 정연두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이 현재 부산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2008년 이후 국제갤러리에서 실로 오랜만에 선보이는 작가의 전시라 큰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사진과 영상, 사운드, 조각, 퍼포먼스, 설치 같은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정연두 작가의 진가를 확연히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연두는 거대 서사와 개별 서사, 기억과 재현,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를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질문을 작품으로 풀어냅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를 향해 있으며, 이들의 서사와 역사적 상황을 기막히게 직조하는 솜씨를 발휘합니다. 서사와 역사가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일상적이고 감각적으로 보는 이의 일상에 각인된다는 것이 정연두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일 겁니다.

작가는 블루스 음악과 발효의 리듬을 교차해 전시장에 부려놓습니다. 아마 전시를 보지 못했다면, 블루스와 발효가 대체 어떤 관계인지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블루스는 흑인들의 애환과 역동적인 즉흥성에 바탕한 음악이고, 발효는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신의 영역에 가까운’ 미생물의 경이롭고 신비로운 작용이죠. 작가는 낯선 이 두 가지를 독특한 방식으로, 고유한 화법으로 엮어냅니다. 이번 전시는 크게는 블루스 음악의 각 파트를 연주하는 5명의 연주자를 중심으로 꾸려지는데요. 각각의 사연을 품은 이들의 몸짓과 음악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함과 동시에 마주해서 배치된 발효 영상의 리듬에 맞춰 진행되기도 합니다. 발효 중인 밀가루 반죽이 음악 소리에 맞춰 부풀었다 잦아들길 반복하는 영상을 보고 있자면, 이 절묘함과 공교로움이 마치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삶처럼 읽혀 어쩐지 웃음이 납니다.
정연두 작가는 블루스와 발효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세상의 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무언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 여유가 생기죠. 그래서일까요, 이번 전시에서는 엄중함보다는 유쾌함이,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이 더 진하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다양한 형태로 발효 중인 메주를 촬영한 사진 연작은 그럴듯한 초상 사진처럼 다가오고, 고려인 후세를 다룬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블루스 가사는 결코 처량하지 않습니다. 특히 27점에 이르는 신작 중 가장 회자되는 작품은 ‘은하수'(2025)입니다. 이 우주적 풍경이 알고 보면 흔한 밀가루를 검은 대리석 위에 털어내며 만든 이미지라는 걸 안 순간,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이 우주의 신비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다는 깨달음을 경험했다고나 할까요. 더 나아가 저마다의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염원과 희망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시적 면모와 음악적 시도, 그리고 연극의 언어가 두루 공존하고 있습니다. 정연두의 혼성적 작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저는 ‘작가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다양한 존재와 다층적 목소리,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와 염원의 순간이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요소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이를 통해 작가만의 애정 어린 시선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다섯 연주자의 영상과 연주 소리가 유난히 생동감 있게 느껴진 건 단순히 고성능 스피커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영상이 아니라 가벽 안에 실제 사람이 들어가 있는 듯 입체적인 생생함은 그들과 우리가 함께한다는 걸 얘기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요. 여전히 이 복잡미묘한 전시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명확히 알게 된 건 있습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인정과 소통의 가능성, 그리고 공감의 순간을 소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섣부른 힐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실로 다정한 현대미술입니다.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