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백 년 전, 나는 제물포항에 서 있었다

2023.10.21

백 년 전, 나는 제물포항에 서 있었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프롤로그’, 2022, 무대 설치, 혼합 매체, 조명, 단채널 HD 디지털 비디오, 컬러, 사운드, 영상, 잉크젯 프린트, 터프팅, 종이에 잉크, 가변 크기, 35분 14초, 45Х60cm, 53Х70cm, 40Х42cm, 27Х27cm, 15.7Х22.8cm (6), 전시 모습,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내가 사는 나라, 땅을 잃는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추석 연휴 끝 무렵 식구들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난데없이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고향을 떠났던 이들이 전쟁이 끝나지 않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딸아이가 불쑥 꺼냈거든요. 우리가 내린 결론은 ‘누구도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의 이야기에 진정 공감하는 데 다름 아닌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하죠. 그리고 마침 연휴 직후에 찾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2024년 2월 25일까지)를 통해 새삼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연두 작가는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들의 서사, 40여 일의 긴 항해 끝에 유카탄주의 수도 메리다에 당도해 지난 120여 년을 생존해온 이주기를 펼쳐놓습니다. 모든 것이 척박했던 상황에서 이질적인 시공간을 일구며 살아낸 이들의 존재를 통해 ‘낯섦의 감각’을 상상하게 합니다.

정연두, ‘세대 초상’, 2023, 2채널 HD 비디오, LED 스크린, 컬러, 22분, 500Х350cm (2), 전시 모습,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정연두, ‘세대 초상’, 2023, 2채널 HD 비디오, LED 스크린, 컬러, 22분, 500Х350cm (2), 전시 모습,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어떤 시대든 거시사만 기억하고자 하지만, 우리가 각자 몸으로 겪어내는 역사는 미시사입니다. 정연두 작가는 그동안 전쟁, 재난, 이주, 국가, 이데올로기 같은 거시적 내러티브를 개인적 서사 및 신화, 설화 등으로 재구성해왔습니다. 이번에도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와 제주도에 뿌리내렸다 전해지는 ‘백년초 이동 설화’를 접한 작가는 이를 인간답게 뿌리내리기 위해 1백여 년 전 멕시코로 이주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펼쳐냅니다. 그중 ‘세대 초상’(2023)은 직접 멕시코에서 만나 인터뷰한 한인 2~5세, 10대부터 90대까지의 현 모습을 사진과 영상 사이 느릿한 화면으로 구현합니다. 개인의 인생을 고스란히 함축했다는 점에서 각국의 젊은이들을 등장시킨 사진 작업이자 그들의 꿈을 실현시켜준 작가의 대표 연작 ‘내 사랑 지니’가 연상되기도 하죠. 그러나 시간을 더욱 적극적으로 가로지르는 ‘세대 초상’은 오랜 세월 동안 타자의 허물을 벗고 융화된 이들의 존재와 세대 간의 관계성 등을 시각적으로 기록합니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2023, 비디오 설치, 4채널 HD 디지털 비디오, 컬러, 사운드, 혼합 매체, 48분, 가변 크기, 전시 모습,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정연두, ‘백년 여행기’, 2023, 비디오 설치, 4채널 HD 디지털 비디오, 컬러, 사운드, 혼합 매체, 48분, 가변 크기, 전시 모습,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전시의 중심에 있는 작품인 ‘백년 여행기’(2023)는 멕시코 열대식물을 형상화한 오브제 설치, 단채널 영상, 3채널 공연 영상 등 다양한 장치를 통해 역사와 타인을 향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합니다. 멕시코의 현재를 촬영한 영상은 한인 이민사와 관련된 기록을 기반으로 한 3개의 공연과 맞물려 상영됩니다. 1905년 멕시코를 향해 가던 배에서 태어난 최병덕의 ‘교포역설'(1973), 이민 2세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 할머니의 굴곡진 인생, 멕시코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보영주의 시 ‘나의 길’(1912) 등의 이야기가 각 공연의 음률에 맞게 펼쳐지죠. 이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동안 죽음과 상실로 점철된 이주의 삶, 혼성적인 디아스포라 같은 문제가 머나먼 땅의 낯선 냄새, 소리, 질감 등으로 생생히 각인됩니다. 아마 영상을 누워서 보게 한 건 단순히 영상 길이가 48분에 이르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이들의 험난한 이주기를 편안한 자세로 보는 것 자체가 감각을 배가할 수 있는 이중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이죠.

정연두, ‘날의 벽’, 2023, 설탕, 허니콤 보드, 흡음재, 75Х36Х18.5cm (25), 75Х49Х18.5cm (25), 75Х75Х18.5cm (58), 75Х101Х18.5cm (28), 75Х114Х18.5cm (22), 75Х153Х18.5cm (5), 가변 설치, 전시 모습,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정연두, ‘날의 벽'(일부), 2023, 설탕, 허니콤 보드, 흡음재, 75Х36Х18.5cm (25), 75Х49Х18.5cm (25), 75Х75Х18.5cm (58), 75Х101Х18.5cm (28), 75Х114Х18.5cm (22), 75Х153Х18.5cm (5), 가변 설치,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정연두, ‘상상곡’, 2023, 사운드 설치, 초지향성 스피커, 서브 우퍼, 앰프, 오디오 인터페이스, 흡음재 조형물, 와이어, 251.4Х306.2Х20cm, 300.5Х227.8Х20cm, 287.5Х158.6Х20cm, 250Х230.3Х20cm, 250Х73Х73cm, 72.2Х54.2Х54.2cm (6), 가변 설치, 전시 모습,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이번 ‘백년 여행기’는 특히 수미상관이 돋보입니다. 전시 마지막은 설탕의 달콤한 권력과 이를 촉발한 제국주의적 욕망을 실제 설탕으로 만든 농기구 형태 오브제로 채운 12m짜리 설치작 ‘날의 벽’(2023)이 장식합니다.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의 역사를 담은 통곡의 벽을 연상시키는 이 공간이 전시 맨 첫 번째 작품, 2023년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목소리를 담은 ‘상상곡’(2023)과 다시 연결, 되풀이되는 거죠. 한인들을 싣고 제물포항을 떠나던 배를 상징하는 뱃고동 소리와 한국에서 타자를 자처한 이들의 목소리가 붉은 열매 형상 작품에 내장된 스피커를 통해 겹쳐 들립니다. 한국에서 힘들었던 일, 가장 그리운 사람 등 작가의 질문에 이들은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헝가리어, 텔루구어 등 저마다의 모국어로 답합니다. 너무도 낯선 나머지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 “상상하라”는 한국어가 공간 전체에 가만히 공명합니다. 서로를 구분 짓고 반목하게 만드는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낯섦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작 과정마저 지난한 백 년 여행 같았을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가 여러분께 전하고자 한 마음일 겁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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