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 지대에서 만나는 무편집된 우리

2026.06.12

무중력 지대에서 만나는 무편집된 우리

누군가를 직업과 나이로만 설명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누락될까요? 사회적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존재는 얼마나 자유롭고 취약할까요? 3개의 전시가 포착한 경계의 틈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만나보세요.

무편집본 인생
<장면이 되기 전>

‘장면’에는 언제나 연출자의 의도가 개입됩니다. 이근민 작가는 진단 역시 일종의 연출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25년 전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병명과 함께 입원 생활을 했던 작가는 질병 코드가 인간을 재단하고 분류하는 방식에서 폭력성을 감지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병명’이라는 장면으로 편집되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죠. PKM 갤러리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장면이 되기 전 Before It Becomes a Scene>은 그 편집 이전의 상태를 화면 위로 불러옵니다. 작가가 환각 속에서 마주한 파편화된 신체, 이름 없는 생명체들은 ‘Organic Plate’와 ‘Connected Body’, ‘Psychiatrist’s Head’ 같은 작품에서 정교한 연속체로 다시 태어납니다. 흥미로운 점은 화면을 채운 근육과 장기, 혈흔이 특수한 존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와 무관하게 누구나 지니고 있으면서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신체 내부죠. 밑그림 없이 손이 가는 대로 그린 자동기술법 드로잉 연작 ‘Refining Hallucinations’는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선으로 둥글게 감싸안습니다. 약 3m 높이의 대형 회화 ‘Deposition of Unreality upon Real, the Boundary’를 포함한 신작 23점이 국내 최초로 공개되며, 6월 10일 열린 전시는 7월 25일까지 이어집니다. 장소 PKM갤러리 예매 화~일 무료 관람 인스타그램 @pkmgallery

Keunmin Lee, ‘Psychiatrist's Head’, 2025~2026, Oil on canvas, 182×227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Keunmin Lee, ‘Connected Body’, 2026, Oil on canvas, 100×10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Keunmin Lee, ‘Organic Plate’, 2026, Oil and plastic wrap on canvas, 162×13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Keunmin Lee, ‘Refining Hallucinations’, 2026, Ink on paper, 20.7×29.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모두가 부유하는 무중력 속에서
<Living a Dream>

캐서린 브래드포드(Katherine Bradford)의 화면 속 인물들이 하나같이 중력에서 벗어나 부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물속에서는 모든 것이 무게를 잃고, 위치는 비고정적인 것이 됩니다. 브래드포드의 삶은 매번 조금씩 관습이라는 사회적 중력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1942년생인 그녀는 이혼 후 두 아이와 함께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로 이주해 37세에야 붓을 들었고, 40대 중반에 석사 학위를 받았죠. 7월 12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한국 첫 개인전 <Living a Dream>은 신작을 중심으로 한 회화 20여 점을 통해 그 부유의 감각을 펼쳐 보입니다. 수영장과 침대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출발한 장면들은 얇고 반투명한 아크릴물감 레이어가 수개월, 때로는 수년에 걸쳐 쌓이며 우주적인 깊이를 담아냈죠. 얼굴이 지워진 인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자의 고독 속에 놓여 있어, 유머와 비애, 친밀함과 쓸쓸함이 한 화면에 공존합니다. 돌봄의 복잡한 감각을 다룬 ‘Mothers Group’(2025)과 일상의 신비를 드러내는 ‘Sleep and Pool Swimmer’(2024), 떠오르는 태양 앞에 선 인물들을 그린 ‘Greeting the Sun’(2023)까지. 윤곽이 흐려진 그의 사람들은 규격 밖 인간이 얼마나 자유롭고도 취약한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장소 갤러리현대 예매 화~일 무료 관람 인스타그램 @galleryhyundai

캐서린 브래드포드, ‘Sleep and Pool Swimmer’,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122.3×91.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 현대 제공.
캐서린 브래드포드, ‘Greeting the Sun’,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101.8×76.1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 현대 제공.
캐서린 브래드포드, ‘Mothers Group’,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182.9×152.7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 현대 제공.
캐서린 브래드포드, ‘River Swimmers’, 2026, 캔버스에 아크릴릭 203.3×172.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 현대 제공.

무력감을 견디게 하는 꿈
<낮에 꾸는 꿈>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세상과 의식적으로 교감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상태를 ‘낮의 몽상’이라 불렀습니다. 전쟁과 기후 위기, 급격한 기술 변화처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흐름 속에 무력감이 일상이 된 지금, 전시 <낮에 꾸는 꿈>은 ‘낮의 몽상’, 즉 능동적 상상에서 무력감을 견딜 창조적 에너지를 찾습니다. 현실의 틈새에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 저항으로서의 꿈인 셈이죠. 그간 공예를 통해 ‘만듦’의 미학을 물질적으로 탐구해온 우란문화재단이 정신으로 영역을 확장한 이번 전시에는 김지선, 박시월, 양정욱, 임선구, 전현선, 최수진 작가 등 6인이 참여합니다. 김지선 작가는 비닐이라는 연약한 소재로 빛과 공기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빚고, 양정욱 작가는 나뭇조각과 실, 모터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움직이는 구조물을 만들었습니다. 종이와 흑연으로 삶의 흔적을 켜켜이 안착시키는 임선구 작가처럼, 이들은 공통적으로 연약한 재료에 견고한 서사를 심어 넣었죠. 밝은 ‘산관’에서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수관’의 심연으로 이어지는 우란1경의 동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몽상이 됩니다. 전시는 7월 8일까지. 장소 우란문화재단 우란1경 예매 월~토 무료 관람(일요일·공휴일 휴관) 인스타그램 @wooran_fdn

'낮에 꾸는 꿈' 전시 모습. ©우란문화재단
'낮에 꾸는 꿈' 전시 모습. ©우란문화재단
'낮에 꾸는 꿈' 전시 모습. ©우란문화재단
'낮에 꾸는 꿈' 전시 모습. ©우란문화재단
김성화

김성화

프리랜스 에디터

<보그> 컨트리뷰팅 에디터로 전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오디너리>와 기내지 <아시아나>에서 여행과 문화, 미식을 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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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PKM Gallery, 갤러리현대, 우란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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