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손에 남은 건 글뿐

2026.05.16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손에 남은 건 글뿐

저는 현대미술 작가의 작업 방식이, 그리고 그렇게 꾸려진 이들의 삶이 글을 쓰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특히 작은 단서에서 시작된 여정이 온갖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나름의 세계로, 하나의 글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말이죠. 좋은 글 혹은 좋은 작품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어쩌면 그다음 문제일지도 모르겠군요. 7월 12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글짓, 쓰는 예술>은 이렇듯 미술과 글쓰기의 접점을 ‘미술적 글쓰기’와 ‘미술가의 글쓰기’로 보여줍니다. 미술가에게 글쓰기는 단순히 감상, 정보 전달 혹은 자기 성찰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재료이자 훌륭한 매체가 된다는 것, 영감을 발견하는 거대한 바다이자 사유를 현실화하는 기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 이들의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무수한 단상은 글을 통해 ‘물질화’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세상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글짓, 쓰는 예술’ 전시 모습.

전시 제목 ‘글짓’은 여러 형태의 움직임을 갖게 된 글의 몸짓을 의미하는데요. 전시에서는 10팀에 이르는 작가들의 몸을 통과해 작업화된 글의 다양한 몸짓과 형태, 생명력을 은유합니다. 이들의 글은 회화나 조각으로 구현되거나, 사운드를 입어 음악으로, 키네틱 퍼포먼스 형태로 전시장에서 부유합니다. 글자라는 기호의 형태로 등장하거나, 아예 이야기가 있는 문학으로 기능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활력을 발휘하는 글의 몸짓에 맞춰, 미술가들의 몸짓도, 실천도 자유롭게 모습을 달리하는데요.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극본이든 노랫말이든 상관없이 다양한 글이 펼쳐내는 갖가지 몸짓을 보고 있자면, 지금 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자리하던 어떤 생각이 한결 또렷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글짓, 쓰는 예술’ 전시 모습.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글짓, 쓰는 예술’ 전시 모습.

이번 전시에서 글은 미술 작업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작업과 보는 사람을 부드럽게 잇는 역할도 합니다. 다채로운 작품에 깃든 고유한 서사를 능동적으로 읽어낸다는 건 작가들의 여정을 ‘함께한다’는 이야기니까요. 그 공감의 과정에서 일상성을 획득한 글은 보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 현대미술을 향한 막연한 거리감을 한발 줄여줍니다. 예컨대 예술 작업을 하는 작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손 그림으로 작업한 애니메이션을 통해 펼쳐지는 안광휘의 고민은 비단 예술가만의 일이 아닙니다. ‘글 (잘) 쓰는 미술가’로 유명한 안규철은 오늘날의 미술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한 편의 우화로 그려냅니다. 차지량은 무게와 부피를 가진 글의 (목)소리가 시공간에 어떻게 배치되고 울리는지 떠올리며 한 편의 오케스트라로 구성하고요. 그 반대편에서 이민선은 과연 말로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단상이 존재할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합니다.

안규철, ‘미술 세계지도’, 2026, 캔버스에 아크릴릭, 91×65cm.
차지량, ‘텅 빈 오케스트라’, 2026, 다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123분.
이민선, ‘정확한 말’, 2026, 낭독극, 가변 크기.

AI로 몇 분, 아니, 몇 초 만에 글을 뚝딱 써낼 수 있게 된 요즘도, 작품만큼 전시장 벽에 붙은 작가의 말 혹은 글이 인기가 있더군요. 예술가라는 이들이 어떤 작품을 내놓는지 만큼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한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그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작가들의 마음이 더 궁금해졌는데요. 그래서인지 조소희의 설치 작품 ‘공백을 짜는 시간’에서 “글을 쓰고 만드는 행위 자체가 시간을 짜는 행위”라는 작가의 말이 와닿았습니다. 저도 며칠 내내 한 편의 글에 매달릴 때가 많은데요.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시간은 사라져버리고 내 손에 남은 건 글뿐이더군요. 하지만 내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직조했다고 생각하면, 없어졌다고 여긴 그 시간은 나의 글과 함께 되살아납니다. 미술가의 글이 작업 혹은 작품이 되듯 우리가 쓰는 짧고 긴 글은 삶이 됩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건 인간으로 살기 위한 가장 수행적인 행위 아닐까요. 야외 광장에 설치된 안규철의 신작 ‘내일’, ‘Tomorrow’라는 단어를 구성한 조약돌을 하나씩 옮겨놓으면서 위로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겁니다.

조소희, ‘공백을 짜는 시간’, 2026, 벽면에 흑연 드로잉, 오브제 설치, 가변 크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글짓, 쓰는 예술’ 전시 모습.
하솔휘

하솔휘

웹 에디터

2025년 4월 <보그>에서 시작했습니다. 패션 감각이 필요한 모든 분야의 글을 씁니다. 많이 듣고, 다니고, 읽고,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글을 재밌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더보기
정윤원(미술 애호가, 작가)
사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