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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관한 초단편소설_정이현 ‘모래 인형’

2026.05.08

가족에 관한 초단편소설_정이현 ‘모래 인형’

집에 돌아가면 나는 딸이 된다. 할머니는 천국에 갔지만 여전히 나의 할머니다. 오늘 우연히 만난 당신과도 가족이 될지 모른다. 여러 세대의 소설가들이 가족에 관해 쓴 초단편소설 8편.

모래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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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정희의 세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앞의 두 아이 모두 아들이었으므로 남편을 비롯한 시가에서는 이번엔 딸이길 바랐다. 정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태아의 성별이 딸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진짜 내 편이 생긴 거니까.

지연은 그 말을 생일마다 반복해 들었다. 어떤 이야기는 되풀이되며 견고해진다. 그 속에서 지연은 저절로 자기 자리를 익혔다. 유년 시절, 엄마는 자주 아픈 사람이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데다 아이 셋을 낳아 키우느라 늘 기운이 달린다는 거였다. 새하얀 낯빛의 엄마가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 머리맡이나 발치에 쪼그려 앉아 있던 어린 자신의 모습을 지연은 환영처럼 기억했다. 지연은 엄마를 지키는 중이었다. 엄마가 모래 인형처럼 스르르 무너져 내릴까 봐, 몸은 그대로 둔 채 다른 무엇만 사라져버릴까 봐.

지연은 그 불안감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랬다면 엄마는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 평소에도 그녀는 자식을 버리거나 책임지지 않는 나쁜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자신은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강조하곤 했다.

오빠들은 일찌감치 집을 떠나 타지로 갔다. 지연 역시 서울로 진학하고 싶었다. 대학을 정할 무렵 정희가 쓰러졌다. 큰 병은 아니지만 앞으로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지연은 고향에 남았다. 그 뒤로 쭉 부모 곁에 머물렀다. 정희는 지연이 사귀는 남자들을 모두 싫어했다. 표면상 이유는 매번 달랐다.

대학 시절 첫사랑에 대해선 능력이 없다고 했다. 그는 지연과 같은 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 말은 억지, 반대를 위한 반대로 들렸다. 아직 학생일 뿐이고 미래를 위해 준비 중이라는 지연의 항변은 공중에 흩어졌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이 정희의 논리였다. 그 논리에 따르면 젊은 시절 사랑에 취해 ‘자기보다 못한’ 남자를 고른 여자들은 제 꾀에 넘어가거나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 오래지 않아 후회로 뒤덮인 삶들. 철모르는 딸을 위해 정희는 자신이 아는 사례를 끝없이 끌어올 수 있었다. 몇 년 후 지연이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정희는 고소해하거나 혀를 차는 대신, 우는 딸을 꼭 껴안았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왜 몰랐니, 이렇게 될 줄을. 처음부터 나는 다 알았는데.

지연을 정말 놀라게 한 일은 그다음에 있었다. 그 무렵 정희가 자신의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가? 왜? 지연은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희는 당당했다.

-그럼 엄마가 돼서 가만히 있니?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예의는 지켰다고 했다. 관계를 이런 식으로 끝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우리 애가 꽃다운 시절을 그쪽과 통째로 보냈는데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왜 그랬을까. 지연은 이상하기만 했다. 언제나 그 만남이 깨지기만을 노골적으로 바라왔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직장 선배가 소개해준 남자의 사진을 보더니 대뜸 얼굴을 찡그렸다. 복 없게 생겼다고 했다. 생쥐를 연상시키는 인상이라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런 남자를 너에게 소개한 선배에게 악의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엄마의 말에, 지연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어리숙해서는. 그리고 이것 좀 봐. 너무 말랐잖아. 이런 남자 옆에 있으면 덩치 큰 여자는 거인으로 보이는 법이야.

정희가 지연의 등을 툭 쳤다. 지연은 기가 죽었다. 아빠처럼 뼈대가 굵어 큰일이라는 말을 어릴 때부터 숨 쉬듯 듣고 자랐다.

-날 닮았으면 얼마나 좋아?

그 말을 들으면 지연은 여전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30대 초반에 사귀게 된 남자 또한 정희의 반대에 부딪혔다. 누나들이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라 당연히 안 된다고 했다. 결혼을 고려할 만큼 진지한 관계임을 알게 되자 ‘당연히’가 ‘절대로’로 바뀌었다. 정희는 데이트하러 가는 지연을 가로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딸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명절에 만난 친척들이 의례적으로 연애나 결혼 계획을 물어오면 자신이 끼어들어, 좋은 사람 있으면 얼른 소개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투가 너무 간곡하고 천연덕스러워서 지연은 토를 달 수 없었다.

서울의 오빠들은 가정을 이루었고 조카들도 생겼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정희와 지연은 자연스레 둘이 살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정희는 부쩍 외로움을 탔다. 지연의 퇴근 무렵이면 어김없이 언제 오느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간혹 지연에게 저녁 약속이 생기는 날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혼자 먹으니 입맛이 없어 물에 말아 대충 때웠다는 말을 들으면 지연은 가슴이 조여왔다.

어느 일요일 낮, 지연이 방에 누워 있는데 정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딸의 화장대를 주섬주섬 치우면서 혀를 찼다.

-방 꼬라지 좀 봐라. 너는 어떻게 평생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니.

지연이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정희도 칠순을 맞았다. 오빠들이 가족을 데리고 집에 모였다. 여기도 재건축 얘기가 있더라고 큰오빠가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내 생전에 되겠냐.

정희의 대답이, 부엌 가스레인지 앞에 있던 지연의 귀에도 들렸다.

-나중에 나 죽어서라도 그리되면야 너무 좋지. 번듯하게 몇십 층짜리로 올라가면, 우리 손주들 골고루 나눠 가져야지.

지연은 반쯤 익은 고깃덩어리를 조용히 뒤집었다.

정이현 문학 독자 중에 정이현을 사랑하지 않았던 이가 몇 있을까.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 <안녕, 내 모든 것>,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노 피플 존> 등이 있다.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그래도 가족

김나랑

김나랑

피처 디렉터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매번 배웁니다. 집에 가면 요가를 수련하고 책을 읽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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