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고 거닐 수 있는 조각, 혹독한 계절에도 정원을 지탱하는 나무들
실로 오랜만에 리움미술관 야외 덱에 새로운 작품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멕시코 출신 미술가인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정원’이죠. 제목이 명시하듯, 리움이 지난 2004년 개관 이래 처음으로 시도하는 커미션 정원 프로젝트입니다. 아마 갤러리나 아트 페어 부스에서 소개된 그의 대표작을 만난 분들도 많을 텐데요. 특히 ‘사무라이 트리’나 ‘안테나’ 같은 평면 작업을 보면, 금색과 원색의 원 혹은 반원 모티브들이 우주적이고도 명상적인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로즈코는 이번에도 상징적인 원의 배열을 가장 핵심적인 모티브로 활용합니다. 하나의 원에서 출발한 기하학적 패턴이 약 500평 규모의 덱 전체로 확장되고, 크고 작은 원들이 서로 연결되어 ‘플라자’라는 이름의 연속된 공간 열 개를 만들어내는 식인데요. 각 플라자는 바닥, 패턴, 식재, 벤치의 고유한 조합을 각기 다르게 펼쳐 보이며, ‘정원’만의 고유한 예술성과 독창성을 강조합니다.

가브리엘 오로즈코는 지난 10여 년 동안 다양한 곳에서 ‘정원’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습니다. 이번 리움 작업은 그 세 번째이자 가장 종합적인 버전인 셈이죠. 2016년 사우스런던 갤러리에서는 방치된 부지를 교차하는 원형 패턴의 영구 정원으로 변환한 정원을 만들었고요. 2019년부터 6년간 무려 242만여 평에 달하는 멕시코시티 차풀테펙 공원의 환경적, 문화적 마스터플랜의 설계와 총괄을 맡아 도시 규모의 공공 조각을 완성했는데요. 이번 리움 ‘정원’ 작업에는 동아시아의 전통 정신이 본격적으로 차용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세한삼우(歲寒三友, Three Friends of Winter)’의 개념을 바탕으로, 가장 혹독한 계절인 겨울에 절제된 방식으로 정원을 지탱하는 나무들을 식물학적 골격이자 작업 철학의 뼈대로 삼습니다. 소나무 15주, 대나무 1500주, 매화나무 11주를 심었고, 이 외에도 백당나무, 설유화, 찔레나무, 물매화 등 흰 꽃 중심의 식물들을 함께 식재해 ‘삼우(三友)’, 세 벗과 함께 어우러집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리움 미술관의 야외 덱에 자리한 위풍당당한 기념비적 대작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알렉산더 칼더의 ‘거대한 주름'(2004~2005), 루이즈 부르주아의 ‘엄마'(2005~2012), 아니쉬 카푸어의 ‘큰 나무와 눈'(2012~2023)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완성한 대형 조각 작품들의 무대가 되어왔지요. 이들 조형물은 리움이라는 미술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꼭 만나야 할 작품으로 꼽혔습니다. 하지만 오로즈코의 ‘정원’을 계기로 이곳의 장소성은 변화할 것 같습니다. 대단한 무언가가 놓이거나 거대 작품을 올려다봐야 하는 전시 공간이 아니라, 관람객 혹은 누구든 와서 걷고 머물며 시간을 보내는 환경으로서의 공간이 되는 거지요. 늘 불쑥 솟아 있던 리움의 조각적 전통은 앞으로는 수평으로 펼쳐지는 정원 안에서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낼 겁니다.

‘정원’은 리움의 변화인 동시에 현대 미술계의 변화를 증명하는 시도로 읽힙니다. 아무리 스타 작가라 해도 이젠 기념비적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겠다는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는 힘든 시대니까요. 게다가 오로즈코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바닥 위에 빈 신발 상자 하나를 놓고, 같은 해 시트로엥 DS를 세로로 3분의 1을 제거한 조각으로 국제 미술계에 등장했습니다. 이후 멕시코시티, 뉴욕, 도쿄, 파리를 오가면서 각 장소에서 발견한 사물의 잠재된 질서를 드러내는 작업을 선보이면서 완결된 답보다 질문을 던져왔지요. ‘정원’은 그런 작가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순리, 그리고 여기서 펼쳐질 이들의 모든 시간을 존중하고자 하는 태도를 중심에 둔 작업입니다. 결국 이 정원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미술관의 의지가 아니라 이곳에서 관람객이 꾸려갈 일상의 경험과 삶의 이야기를 뿌리 삼아 더욱 강력하게 돋아날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계절을 거듭하며 혹서와 혹한, 비바람을 겪은 후에도, 부디 ‘정원’이 생기 있게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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