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양혜규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2026.04.22

  • VOGUE

양혜규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로스앤젤레스 그랜드 애비뉴에 마주한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현대미술가 양혜규를 중심으로 손을 맞잡았다. 작곡가 고(故) 윤이상의 작업을 공감각적으로 되살린 프로젝트 〈양혜규: 엇갈린 랑데부〉는 시대에 상처 입은 거장을 향한 헌사이자 예술이 혼란의 시대를 위무하는 방식이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그랜드 애비뉴 문화지구는 도시의 명암이 공존하는 장소다. 원래 이 일대는 예컨대 <키스 미 데들리>(1955) 같은 누아르 영화에서 보듯 좁은 골목과 작은 집으로 가득했던 ‘벙커힐’이었고, 켄트 맥켄지(Kent Mackenzie)의 <추방자들>(1961)이 기록한 것처럼 이민자와 가난한 예술가 수천 명이 살던 삶의 터전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황량한 대지 위에 1986년 붉은 사암으로 지은 나지막한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과 벌집 모양의 더 브로드 미술관, 그리고 명문 음악학교인 콜번 스쿨과 전설적인 프랭크 게리,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LA 필하모닉)의 이중 명성으로 시종일관 번쩍이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수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 느슨한 사각형을 형성하는 동안에도, 이 지대는 역사상 가장 대담하면서도 잔혹한 도시 개발의 예로 종종 회자되었다. 그러므로 이들 기관의 임무는 태생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로스앤젤레스 문화 예술의 중심지라는 성공담, “동시대 예술가들의 흐름과 혁신, 그리고 그들의 비전을 따라가는” 공식적 궤적의 이면에서, 누군가의 지워진 역사와 잊힌 공동체를 잊지 않는 것.

3월 어느 밤, 나는 MOCA의 대각선 맞은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로 삼삼오오 향하던 인파 가운데 서 있었다. 지금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한국의 작곡가 고(故) 윤이상과 현대미술가 양혜규라는 사실, 두 사람의 ‘사후적 우정’이 만개하는 광경이야말로 야심과 모순으로 응축된 이 거리가 진정 고대해온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양혜규가 윤이상의 존재, 특히 ‘오보에, 하프와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이중 협주곡’(1977, ‘이중 협주곡’)에 영감을 받아 만든 베네치안 블라인드 설치작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Star-Crossed Rendezvous after Yun)’(2024)의 시각적 경험이 미술관 너머, 이제 곧 한국계 캐나다인 지휘자 이얼(Earl Lee)과 LA 필하모닉의 공연을 통해 완전체로 펼쳐질 참이었다. 기억은 실제 경험을 통해서 갱신된다. 아마도 이제 내게 그랜드 애비뉴는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섞이며 걷던, 일종의 퍼레이드 같은 밤의 풍경으로 각인될 것이다.

현대미술과 현대음악은 꽤 가까운 사이 같지만 서로에게 온전히 헌신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은 데다 지나치게 신중하다. LA 필하모닉의 107년 역사로 보자면 두 번째, 2003년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문을 연 후로는 처음 이뤄진 이번 협업 프로그램에 ‘엇갈린 랑데부’라는 제목이 붙었다. ‘랑데부’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요소의 운명적 조우를 뜻하고 여기엔 속도와 방향을 정교하게 맞추는 기술이 필요한 법이니, 꽤 절묘한 제목이다. 알려진 대로, 통영 출신의 윤이상은 동서양의 음악을 잇는 현대음악계의 거장인 동시에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 냉전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미국에서 양혜규의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를 선보인 건 처음이지만, 윤이상의 ‘이중 협주곡’ 역시 초연이었다. 한 예술가의 생애와 작업에 현대미술과 현대음악이 함께 헌사를 보내는 <양혜규: 엇갈린 랑데부(Haegue Yang: Star-Crossed Rendezvous)> 같은 프로젝트가 존재했을 리도 만무하다. 지금 로스앤젤레스에서 윤이상은 역사의 보편성 및 특수성의 간극을 무화시키는 인물로 재맥락화되고 있다.

공연에 앞서 로스앤젤레스의 많은 문화인, 애호가들이 미술관의 오프닝을 찾았다. 양혜규는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위트 넘치는 멘트로 행사를 마무리했는데, 오히려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전시장에 대각선으로 설치된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를 에워싼 관람객은 그저 조각 작품을 구경하고 마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음악극을 즐기는 듯 몰입했다. 현지인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미지의 인물을 ‘지금, 여기’에 잇는 데는 ‘퍼포머’들의 공이 컸다. 윤이상의 음악과 빛, 그리고 악보를 자처한 블라인드의 몸체가 어우러지며 빚어낸 안무, 물리적이고도 덧없는 이 요소들이 작업의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관람객으로 하여금 ‘랑데부’ 특유의 긴장감과 환희를 감각하게 했고, 더 나아가 예술과 역사의 관계를 사유하며 이 시간 자체를 환대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2024. 전시 ‘양혜규: 엇갈린 랑데부’ 설치 전경,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 2026.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는 각기 다른 색상과 구조의 블라인드가 다채로운 층위를 구성하며 상승하는 사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조각으로서는 흔치 않게 러닝타임을 갖는데, 대략 1시간 반을 훌쩍 넘어선다. 보통 협주곡은 하나의 독주 악기가 이끄는 반면, ‘이중 협주곡’은 오보에와 하프가 선율을 주고받으며 곡을 구성한다. 윤이상의 동료이자 실제 부부였던 오보에 연주자 하인츠 홀리거(Heinz Holliger)와 하프 연주자 우르술라 홀리거(Ursula Holliger)가 연주한 1985년 버전의 곡이 35분 40초간 흘러나온 후 그보다 긴 소강상태가 이어진다. 이에 맞춰 조명도 동기화된다. 개별적인 몸처럼 고요히 깜빡이며 스치던 두 개의 조명은, 음악과 함께 유기적으로 교차하고 뒤섞이며 강렬한 빛의 향연을 선보인다. 조명과 음악이 격하게 만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신기하게도 블라인드의 겹침과 그러데이션마저 다르게 감각된다. ‘이중 협주곡’ 자체의 대칭적인 구조부터 윤이상이 평생 간직한 통렬한 그리움의 정서까지 총체적으로 겹겹이 쌓인 블라인드 안팎으로 펼쳐지는 여정. 진지하게 자리를 지키던 목격자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체감상 음악과 조명이 역동적으로 어우러지는 대목보다 음악 없이 조명만 떠도는 부분이 더 길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이는 당연하다. 본래 만남보다 이별이 더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게다가 ‘이중 협주곡’은 한국의 옛이야기 ‘견우와 직녀’를 모티브로, 남북의 상황 혹은 이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시대인의 심정을 은유한 작품이다. 견우와 직녀는 1년에 한 번 오작교에서 만났지만, 실은 기약 없는 조우를 갈망하는 연인(혹은 대상)이 더 많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별의 상태, 윤이상을 지배한 절망과 희망은 양혜규에 의해 분열과 갈등, 만남과 화합이라는 보편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주제로 확장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식은 전시장 벤치에 앉아 재회의 기쁨이 도래하는 그 순간을 위해, 연인들의 공동체를 지지하며, 조명과 음악이 엇갈리는 침묵의 시간을 함께 견뎌주는 것이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2024. 전시 ‘양혜규: 엇갈린 랑데부’ 설치 전경,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 2026.

내가 미술품과 관람객의 상호 관계를 관찰하는 동안, 방송사 기자들은 현지 관람객에게 인터뷰를 받느라 바빴고 기자 몇몇은 그 와중에도 ‘이중 협주곡’의 선율과 빛의 조우 전편을 앉아서 관람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프로젝트의 시작을 궁금해했다. 전시를 기획한 MOCA의 총괄 디렉터인 클라라 김(Clara Kim)이 들려준 대답은 작금의 미술계에서 이러한 ‘사건’이 통상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한 함축된 답이기도 했다. “양혜규의 전시가 열린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 MOCA 후원자이자 LA 필하모닉 위원인 마가렛 모건(Margaret Morgan)과 함께 있었어요. 마가렛은 몇 년 전 두 기관의 팀을 한자리에 모으며 협업을 제안했었죠. 모든 것이 맞물린 듯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어요. 바로 그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양혜규가 제격이라고 여겼거든요.” 그렇다면 미술관 측에서 제안해 성사된 건가? “아니요. 늘 작가와 작품이 먼저였습니다.”

클라라 김은 이번 프로젝트의 또 다른 시작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바로 지난해 11월 말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심포지엄 <엇갈린 랑데부: 윤이상의 음악적 유산>이 그것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전형적인 이벤트에 머물지 않았던 건 스스로 당위성을 일구고 얻은 덕분이다. 저명한 음악학자, 역사학자, 작곡가 및 연주자들이 지식의 공동체를 구축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던 윤이상을 소환했는데, 현대음악사의 맥락 안에서 그의 생애와 음악적 유산을 조명하는 이러한 시도가 북미에서 처음이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윤이상의 음악과 양혜규의 방법론을 연결하는 시도부터 냉전 시대를 주도한 미국에서 윤이상이 도외시된 배경까지, 논의는 다채로웠다. 이들은 융복합적 시선으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탄생한 예술적 목소리에 대한 주관적인 진실을 피력했고, 윤이상 음악을 현재적 경험으로 되돌렸다. 뒤늦게 유튜브로 심포지엄을 참관하면서, 나는 오랜 세월 윤이상을 둘러싸고 있던 두꺼운 막을 누군가가 칼과 끌로 세심하게 조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역사를 통틀어 그에 대한 가장 실제적이고도 다차원적인 대화일 거라 확신했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는 지난 2024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양혜규의 서베이전 <윤년>에 맞춰 태어난 작품이다. 당시 나는 전시를 앞둔 양혜규를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때만 해도 이 대규모 신작이 현지에서 과연 어떻게 구현될지 감히 확신할 수 없는 눈치였다. 그간 양혜규를 매료한 인물들은 많았다. 특히 작가는 소외와 결핍, 고뇌와 갈등을 동반한 인식으로 평생을 살아낸 문제적 인물들을 리서치하고, 서로 중첩시키며, ‘조각’하는 과정의 은밀한 감동과 쾌감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의 오랜 동료인 홍콩 M+의 부관장 정도련이 말한 적 있다. “연관 없어 보이는 인물들과 양혜규의 공통점은 바로 헌신적이고 강인한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이들의 삶에 대한 연구, 이로써 점철된 삶 자체가 양혜규의 작업 및 사고의 가장 큰 동력이죠.” 하지만 그런 양혜규도 윤이상을 작업 전면에 내세운 건 처음이었다.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대표 조형 언어라 더 엄격한 베네치안 블라인드를 활용해 윤이상을 소환한 것도 의외였고, 특정 음악을 작업에 직접 도입한 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다. 스튜디오 한쪽에는 윤이상에 대한 다양한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다며 웃는 작가의 모습에서, 엄두도 못 내던 작업을 감행하기까지 그에게 큰 용기가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양혜규는 윤이상을 자신의 작업 세계에 품어왔다. 윤이상의 음악이 양혜규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표현도 맞겠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단서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2019년 국제갤러리 개인전에서는 윤이상과 마르그리트 뒤라스, 전혀 상관없는 인생들을 교차편집한 텍스트 작업 ‘융합된 분산의 연대기–뒤라스와 윤’(2018)을 내놓았다. 식민주의와 냉전, 사회적 변혁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이어지는 둘의 필연적인 생을 작가의 주관으로 엮은 결과물이었다. 또 평안남도 덕흥리의 강서고분에 영감을 받은 명곡, 네 가지 신화적 동물을 네 개의 악기로 작곡한 ‘영상’(1968)을 다양한 전시에서 들려주면서, 그의 안에서 순환했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시간대를 통해 현재에 맞설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하기도 했다. 새로운 영상 신작 ‘황색 춤’(2024)에서는 오보에 독주곡 ‘피리’(1971)를 배경음악으로 도입하면서 ‘봉희’라는 허구적 인물과의 접점을 찾고자 시도했다.

이쯤 되면 왜 윤이상이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양혜규는 유럽을 음악적 기반으로 삼았던 윤이상의 삶과 한국적 뿌리 사이에 놓인 비대칭적 유산을 언급한다. 시대의 희생양이자 정치적 망명자로 회자되는 사이 그의 음악과 예술적 성취는 정작 잊혔고, 이런 예술가의 운명이 후대의 예술가를 각성시킨 셈이다.

“윤이상의 이름이 제 마음에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저 역시 정작 그의 음악을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요. 반쪽만 알고 나머지 반쪽은 완전히 음 소거되거나 희미해진 느낌, 이게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죽었지만 살아 있는 음악가인데, 동시에 영영 죽은 것만 같은 대조적인 상태였죠. 현대미술가로서 윤이상을 바라보며 얼마나 사실적인 흔적을 찾으려 하는지, 어떤 욕망이나 호기심이 발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를 시대적 산물로서 필요로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그저 균열의 시대를 한 인간으로서 살아간 것이죠. 이 시대의 우리에게 그 비대칭성은 얼마나 의미 있는 성질일까요? 그것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동력인 것 같아요. 역사, 동서양,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에 관심 있는 저에게 윤이상은 냉전의 시대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이해하게 하는 단서였어요. 어느 작가에게나 자신의 복합성을 잃는 건 가장 두려운 일일 겁니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2024. 전시 ‘양혜규: 엇갈린 랑데부’ 설치 전경,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 2026.

7년 전 ‘융합된 분산의 연대기–뒤라스와 윤’을 처음 공개했을 때, 양혜규는 그와의 공통점을 찾아내기라도 한 듯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확실히 그런 지점이 있다. 윤이상은 한국 음악의 제스처와 음색을 서양 악기에 옮겨 심었고, 동양의 음악적 개념을 서양음악의 체계 안에서 다시 쓴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단지 동서양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안팎으로 굴절된 역사 속에서 지켜낸 ‘문화적 압축’의 결과물이다. 개인적 경험과 음악적 전통을 겹겹이 올려 윤이상이 곡을 만드는 방식은, 양혜규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온갖 신비로운 요소를 조각에, 평면에 접고, 펼치고, 쌓으며 깊은 압축의 에너지를 길어내는 추상의 방법론과 신기할 정도로 유사하다. 각자의 세계에 뿌리 깊게 자리한 이런 예술적 실천은 요컨대 둘 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한 디아스포라라는 식의 단순 비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설화(‘견우와 직녀’)가 음악(‘이중 협주곡’)으로 환생했고, 다시 현대미술(‘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로 거듭났다는 사실 자체가 양혜규식 추상이 발휘해온 비약적 확장성과 겹쳐진다. 그의 작품도 고대부터의 역사, 문명 간의 충돌과 얽힘, 이 시간을 살아낸 개인이 삶을 경험하는 방식 등을 다면적으로 담아내고, 그래서 많은 이가 한 번에 읽히지 않는 그의 작업을 어려워하기도 한다.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사고의 전환, 도약에 버금가는 방대한 관심사는 바로 작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 이를테면 초기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이방인인 나’와 그들의 동질감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고대까지 거슬러 가야만 접점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그 과정에서 지금껏 살아남은 것들의 생명력을 민속 전통, 샤머니즘, 이교도적 문화 등을 통해 예술적으로 발굴하는 작업이 탄생했다. 양혜규가, 12음계, 무조음악 등 서구 모더니즘 음악의 본질을 섭렵한 윤이상이 왜 고대 문명에 관심을 가졌는가에 집요하게 천착하는 까닭도 이런 자신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그도 현대 작가, 동시대 작가였을 텐데, 어떻게 고대 문명을 보고, 작업하게 되었을까요. 잠정적인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윤이상이라는 한 사람 안에서도 다양한 시간대가 순환하거나 충돌합니다. 과거와 현재,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윤이상은 양쪽을 비약적으로 오간 사람이 아닐까요. 1차원적인 현재의 시간을 사는 우리가 윤이상이라는 사람을 통해 고대의 상상력을 빌려올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현재 시간대와 맞설 수 있는 거고요. 그게 바로 예술의 차원입니다. 저는 1970년대에 태어났어요. 윤이상의 작품 대부분은 그 전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저는 시간과 기억을 연결해야만 해요. 예술의 힘으로만 시간을 접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저는 실제 뭔가를 많이 접습니다. 평면은 입체가 되고, 멀리 있는 것은 가까워지며, 또 언제든 다시 펼칠 수도 있죠. 시간을 연결하고, 뛰어넘기도 하죠. 구원적 연결일 수도 있지만,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하기도 하는 것, 지금의 예술가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양혜규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또 다른 임무 중 하나는 어떤 작품이든 새로운 토양에서 다른 실제성을 획득하고 새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가 아예 다른 작품처럼 다가온다는 건 이번에도 책임을 다했다는 증거다. 예컨대 헤이워드에서는 정면을 향해 있어 계단의 형태가 덜 직관적이었던 반면, 이번에는 측면으로 배치되어 그 형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는 이번에야 애초에 반쪽짜리 오작교였다는 걸 새삼 인지하고는 허를 찔린 것 같았다.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음악은 반쪽인 오작교 혹은 윤이상의 또 다른 반쪽이 되어 서로 다양한 쌍을 이룬다. 그러고 보니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는 그 자체로 ‘반쪽’과 ‘쌍’의 개념으로 촘촘히 직조되어 있다. ‘이중 협주곡’의 대칭적 구조, 두 개의 악기, 두 명의 연인, 두 개의 스피커, 두 개의 조명, 전시장 입구도 두 개, 하물며 벽면의 전시 제목과 서문도 두 개다. 견우와 직녀처럼 만날 미술관과 콘서트홀은 또 어떤가. 큐레이터인 폴라 크롤(Paula Kroll)은 “빛에 대한 양혜규의 관심과 빛을 경험하는 관람객의 방식 또한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두 개의 다른 반쪽이 된다”고 말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평소에도 양혜규는 작업이나 개념이 쌍을 이루는 ‘이중화(Doubling)’의 방식을 자주 써왔다. 같거나 비슷한 혹은 다른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이지 않는 연결점을 제시한다. “‘유일한 단 하나’라는 것에 함정이 있어요. 그 ‘하나’라는 건 원래 없을 뿐 아니라 이들이 끊임없이 다시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작업에서도 ‘오리지널한 것’만큼 기억해야 하는 건 ‘엄연한 것’이고,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는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하는 작품이 훨씬 위대한 것 같아요.” 그러므로 반쪽과 쌍은 단지 구성의 문제가 아니다. 양혜규는 숱한 반쪽들이 전체를 이루지 못한 채 나뉜 상태에 천착하고, 반쪽들이 하나가 되고자 애쓰기보다는 온전한 둘이기를 소망한다. 여기엔 이질적 요소를 합쳐 적대적이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작업 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더 깊숙하게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도 함께할 수 있는 레이어를 만드는 것, 서로를 불투명하게 남겨둔 상태에서 공존하는 법을 통해 새로운 타자를 상상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신념이 자리한다.

‘솔 르윗 뒤집기–1078배로 확장·복제하여 다시 돌려 놓은 K123456’, 2015. 전시 ‘양혜규: 엇갈린 랑데부’ 설치 전경,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 2026.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옆 전시장에 또 다른 블라인드 작품 ‘솔 르윗 뒤집기–1078배로 확장·복제하여 다시 돌려 놓은 K123456(Sol LeWitt Upside Down–K123456, Expanded 1078 Times, Doubled and Mirrored)’(2015, ‘솔 르윗 뒤집기’)을 놓아 대구를 이루게 한 건, 쌍의 의미와 비대칭성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전략이다. 전자가 반쪽의 구조라면, 후자는 쌍의 구조다. 일단 생김새부터 다르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가 상승과 하강의 뚜렷한 대조와 움직이는 조명으로 드라마틱한 서사를 시사한다면, 고정된 조명 아래 두 군데의 접합점을 만드는 ‘솔 르윗 뒤집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땅에서 불쑥 솟은 듯 엄격하다. 이 역시 작품 안에 어떤 인물이 ‘배양(Incubate)된’ 상태인데, 솔 르윗(Sol LeWitt)은 미국의 미니멀리스트이자 미술관 소장품전에서 볼 법한 개념 미술의 거장이다. 양혜규는 그의 상징적인 정육면체 구조물을 재해석했다. 원작 스케일을 1,078배로 확대하고 데칼코마니처럼 반사해 거꾸로 거는 방식으로 모듈식 설치작을 만든 것이다. 솔 르윗의 정육면체는 전면이 열려 있지만, 양혜규는 이를 흰색 블라인드로 채워버렸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블라인드가 겹쳐지는 정도와 밀도가 달라지는데, 블라인드 작품의 큰 특징이었던 투과성은 희미해지고 대신 불투명성과 투명성 간에 새로운 관계가 생겨난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와 ‘솔 르윗 뒤집기’의 이형 조합은 곧 불투명과 투명, 노출과 단절, 고립과 소통의 양가성을 통해 진화해온 블라인드 설치작의 변천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2006년부터 시작된 블라인드 조각은 고립되어 있으면서 연결된 모호한 상태, 색, 빛, 소리 등이 넘나드는 다감각적이고도 멜랑콜리한 경험의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추상화된 역사적 내러티브와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터전이 되었다. 반면 ‘솔 르윗 뒤집기’는 작가가 그간 배우고 익힌 블라인드 사용법 혹은 추상 언어를 완전히 잊거나 비우려고 작정한 듯, 순수한 추상의 형태와 체계적 반복에 몰두한 작품이다. 양혜규식 ‘배양된 추상(Incubated Abstraction)’의 역할에 충실하던 블라인드는 인물과 서사가 지워진 바로 그 지점에서 미니멀리즘적 작업 방식을 둘러싼 서구 미술사의 규범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장치로 변모한다. 더군다나 미니멀리즘이라는 건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것을 ‘하얗게’ 지우는 행위라는 면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솔 르윗 뒤집기’는 양혜규에게 엄청난 터닝 포인트다.

“쌍은 물론 음과 양, 흑과 백의 대비지만, 그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진동’하는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양혜규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여기에는 실로 많은 것이 전율하고 있다.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영원한 이방인 윤이상이 있고, 죽어서도 길이길이 전설로 회자되는 솔 르윗이 있다. 두 작품이 각각 탄생하기까지의 9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있고, 그 시간 동안 동분서주하며 나날이 진화해온 양혜규의 추상 언어가 있다. ‘이중 협주곡’의 하프와 오보에가 빚어내는 서로 다른 질감의 소리가 있고, 또 중요하게는 그 신비로운 소리를 실제로 되살리기 위해 나선 젊은 지휘자 이얼의 시도가 있다.

이얼은 ‘이중 협주곡’의 악보를 연구하는 동안에도 수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를 음악적으로 그려보았다. “처음 코드가 딱 시작하는, 저는 이걸 ‘음향적 화음(Klang Chord)’이라고 부르는데, 이 부분에서 밝은 빛이 짠 하고 등장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블라인드 작품을 보는데, 정말 그 코드 직전에 빛이 쫙 나오더군요. 그래서 말씀드렸죠. 작가님, 이게 제가 떠올리던 바로 그 장면입니다!” 양혜규와 완벽히 독자적인 쌍을 이루는 이얼이 말했다.

공연 전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꽉 채운 양혜규의 ‘조명 서곡’.

밤 8시가 가까워지자,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로비가 길을 건너온 관람객으로 가득 찼다. 양혜규의 작품을 눈으로 담았으니, 이제는 음악을 통해 온전히 윤이상을 경험할 차례다. 이날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이었다. 양혜규가 아무리 ‘유일한 단 하나’에 저항하는 예술가라도, 오늘만큼은 이를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전시는 오는 8월 2일까지 열리지만, 전시와 쌍을 이루는 공연은 이날 하루뿐이었다. 나의 지인은 공연을 보기 위해 당장이라도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표를 끊을 기세였다. 물론 이 도시에서 그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유일하고 한시적이며 휘발적이라 더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는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이런 상황은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양혜규조차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곡을 공연으로 듣는 건 나도 처음이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공연으로 직접 듣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여겼어요.” 윤이상이라는 존재를 혼자 작업해온 양혜규가 가끔 외로워 보이기도, 그래서 수행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모르긴 해도 그런 작가에게 가장 벅찬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주한 이얼에게 윤이상의 ‘이중 협주곡’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미국 앤아버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동시대 작곡가들과 활발히 협업해온 그에게도 이 작품은 자신의 태생적, 사회적, 예술적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저는 지휘자이지 작곡가가 아닙니다. 지휘자의 역할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곡을 다시 보여드리고, 악보에 담긴 작곡가의 원래 의도를 최상으로 해석하는 거지요. 어떤 특정 작품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투영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번처럼 한국 작곡가가 만든 곡을 지휘하는 일이야말로 퍼포머인 저에게는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고 헤아리게 하는 행복한 계기입니다.” 클래식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윤이상의 ‘거리’(1988)를 처음 들었던 놀라운 순간을 아직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 9월 <윤이상 타계 30주년 기념: 이상을 바라보다> 공연에서 ‘소년 이얼’에게 신세계를 펼쳐 보인 바로 그 곡을 지휘했다.

‘이중 협주곡’은 1977년에 공개되었고, 그래서 이번 공연은 젊은 지휘자를 비롯한 연주자들의 입장에서도 초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곡은 저와 연주자들 모두에게 낯설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결과를 예상하기도 어려웠어요.” 리허설을 마친 후, 이얼 지휘자는 “관계의 서사에서 탄생한 이 곡만의 다양한 층위와 텍스처를 강조하고, 복잡하고도 미묘한 소리의 층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다는 느낌으로” 곡을 만들어갈 거라 말했다. 특히 ‘이중 협주곡’은 윤이상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었던 ‘주요음 기법’이 정점이 달한 시점의 작품이다. 12음 기법을 바탕으로 동양의 선적인 음악 사상을 융합한 윤이상의 고유한 방식인데, 하나의 중심 음(주요음)을 고정된 상태로 두지 않고 트릴, 장식음, 글리산도 등의 기술과 기교로 장식해 음색과 음의 밀도를 변화시킨다. 이얼은 이렇게 펄펄 살아 있는 음,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솔로이스트 사이의 조화와 긴장을 조율해 곡에 내재된 풍성함과 복합성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우리의 목표는 공연에서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휘자 이얼이 말한 ‘마법 같은 순간’을 미리 만끽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리허설에서는 대단한 각오보다 설렘과 흥분이 먼저 느껴지고, 연주자들이 조심스럽게 서로 소리를 맞춰보는 광경은 어쩐지 감동적인 데가 있다. 그건 양혜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특히 작가는 LA 필하모닉 연주자들을 비롯해 두 솔로이스트, LA 필하모닉 수석 오보이스트 라이언 로버츠(Ryan Roberts)와 수석 하피스트 엠마누엘 세이송(Emmanuel Ceysson)이 보여준 장인 정신에 무척 감동했다. ‘이중 협주곡’은 난도가 높고 실험적이기로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데, 이 곡이 상대적으로 묻혀 있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어쨌든 곡의 현학성은 솔로이스트들에게 도전이었다. 이들이 윤이상을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엠마누엘 세이송은 난도를 소화하기 위해 현 위에 타악기용 맬릿을 사용했고, 소리를 더 건조하게 만들기 위해 댐퍼를 썼다고 했다. 라이언 로버츠도 오늘 공연을 위해 전문가를 여러 번 찾아 오보에에 특별한 장치를 더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두 사람의 열정에 어쩐지 이얼보다 양혜규가 더 즐거워 보였다.

몇 년 전 인터뷰에서 건축가이자 음악 애호가인 프랭크 게리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화려한 외관보다 소리를 다루는 내부 공간을 건축적으로 더 신경 썼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그가 만든 콘서트홀에서 음악을 들었다. 살아생전 윤이상은 “음은 살아 있는 선, 음은 붓질과도 같다”고 얘기해왔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특히 오보에와 하프는 같은 세계의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듯 확연히 상이한 결의 소리를 내며 진취적으로 어우러졌다. 두 악기가 동서양을 오간 윤이상 음악의 경계성, 이중성을 의미한다는 식의 다소 납작한 해석은, 곡의 원전을 염두에 두고 들으면 한결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고뇌에 찬 듯 단단하고 날카로운 소리의 선을 만드는 오보에가 견우를, 시공간에 흩어지며 울림을 품어 안는 소리를 가진 하프가 직녀를 의인화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오보이스트의 숨을 떠나서도 긴장감을 간직한 소리와 하피스트의 손을 떠나서 부드러워진 잔향이 층층이 쌓이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한다. 오보에와 하프의 놀랍도록 추상적인 소리는 대립이 아닌 대조를 이루며, 더 나아가 도교에 영감을 받은 작곡가의 세계관인 분산과 융합, 회귀의 순환 구조까지 실행해냈다.

오케스트라의 비호 아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오보에와 하프의 존재감은 특히 시각적, 공간적 연출로 확연히 두드러졌다. 실제 윤이상은 악보에 ‘멀리서’ ‘아주 가까이서’ 등의 지시어를 적어 넣으며 소리의 거리와 움직임을 곡의 일부로 녹여냈고, 이얼은 이런 공간적인 제스처를 공연에 적극 반영했다. “보통 공연에서는 독주자들이 무대 앞에서 연주를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다르게 접근했어요. 곡 중간에 오보에와 하프가 만나는 부분이 있어요. 그때 맨 뒤에서 연주하던 오보이스트와 하피스트가 걸어와 중앙에서 만나면 어떨까 한 거죠. 시각적인 측면을 고려한 건데, 음악적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봐요. 초반에 특히 그리움 같은 요소,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긴장감 등을 무대 위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이요. 공연에서 이런 유연성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번에는 모두 기꺼이, 흔쾌히 수용했어요. 하피스트는 하프를 두 대나 준비해주었고, 그래서 두 사람이, 두 악기가 실제로 분리되었다 만나는 구성이 가능해진 겁니다.”

(왼쪽부터) 지휘자 이얼, 오보에 연주자 라이언 로버츠, 양혜규 작가, 하프 연주자 엠마누엘 세이송.

드디어 콘서트장의 불이 꺼지고, 음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천상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신호가 켜졌다. 양혜규가 기획한 ‘조명 서곡(Lighting Prelude)’이 공연을 여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곳의 모든 존재를 향한 헌정이었다. 기대감에 웅성거리던 관람객이 들뜬 마음을 다독이며 몰입할 준비를 하고, 연주자들이 긴장된 숨을 고르는 5분여 동안,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를 비추던 조명을 잠시 빌려온 것 같았다. 두 개의 조명이 무대와 객석을 훑으며 관람객을 쓰다듬었고, 음악이 아닌 자연의 소리가 공간을 꽉 채웠다. 윤이상은 자신의 작곡 과정을 “우주의 소리를 포착하거나, 이미 자연 속에 떠다니는 소리를 붙잡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그런 그에게 양혜규가 하늘과 땅, 낮과 밤의 소리를 담아 바치는 봉헌이라 해도 좋았다.

생면부지의 타인들과 ‘이중 협주곡’을 감상한다는 건 시대에 상처받은 윤이상을 되살리는 예술적 공감의 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알게 됐다. 그저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생성되고, 변화하고, 소멸되는 소리를 통해 그의 철학을 온몸으로 함께 체감하는 행위였다. 하나하나의 음이 살아 있는 듯 흔들리고 떨리고 충돌하고 전율하여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에너지. 작가가 언급한, 작품과 작품 사이, 수많은 쌍 사이에서 진동하는 움직임을 청각화하면 이렇게 될까. 오보에와 하프가 오케스트라 없이 긴 카덴차를 연주할 무렵, 문득 심포지엄에서 하버드 음악대학 교수 앤 C. 슈레플러(Anne C. Shreffler)가 한 말이 떠올랐다. “윤이상의 음악은 육체적으로 다가오는 힘이 있으며, 매우 강렬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인간적인 차원과 형이상학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 아름답고도 끔찍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저는 그것이 더 강력하다고 느낍니다. 이 음악에는 동화 같은 결말이 없습니다.” 대신 여기엔 길이 있다. 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길’을 보고 싶었다는 윤이상은 자신의 바람대로 그 길에서 우리 모두를 서로 만나게 했다.

40여 분간의 음악이 잦아들자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공연의 피날레는 작가의 몫이었다. 양혜규는 무대에 올라 오보이스트와 하피스트의 손을 양손에 잡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는 미술 작가가 좀체 보여주지 않는 낯선 제스처인 데다, 최근 이토록 활짝 피어난 작가의 진심 어린 함박웃음을 본 적이 없었다. 양혜규는 과거를 마주하고, 추상 언어로 그 가능성을 탐구하며, 그것을 현재와 결합하는 작업을 실천하는 예술가이고, 그렇기에 늘 쉽게 다다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추구해왔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돌아가는 바람개비처럼, 또 가끔은 바람이 불어도 돌지 않는 바람개비처럼.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삶을 사는 것이고, 많은 예술품이 이런 시도에서 탄생한다”며 고독한 용기를 발휘해온 그에게는, 우리가 문화와 역사, 인물을 통해 서로 연결된 채 동시대에서의 위치를 인지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렬한 조우의 장면이 아닐까 짐작했다.

현대미술가 양혜규와 한국계 캐나다인 지휘자 이얼. ‘양혜규: 엇갈린 랑데부’전,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 2026.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을 잊어야만 생생해질 수 있듯, 작가 개인의 성취와 작품의 의미를 따로 떼어 가늠하지 않을 때 시너지가 난다. 양혜규의 말대로, 가끔은 이토록 복잡한 작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여유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한없이 궁핍한 마음으로 대체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자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혼동의 세계를 반영하는 건 어느 시대이든 당대 예술(Contemporary Art)의 가장 기본적인 소임이었고, 긴장과 열정의 결정체인 <양혜규: 엇갈린 랑데부> 프로젝트는 그 첫 문장으로 어김없이 돌아간다. 예술이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하는 하나의 형식이 되는 그 지점에서, 복합성과 다양성을 경험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삶의 동력으로 전환된다. 더구나 이곳은 디아스포라와 다문화의 상징인 도시, 바로 로스앤젤레스다. 얼마 전에 발발한 중동 전쟁이 점차 확전될 거라는 전망이 며칠째 각종 뉴스를 도배하는 중이었다. 엄청나게 불안하고 믿을 수 없게 소란한 시절, 그 분열의 한가운데서 “이번 공연이 평화 콘서트가 되길 바란다”던 양혜규의 예술적 야망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었다. VK

    컨트리뷰팅 에디터
    윤혜정(국제갤러리 사외 이사, 문화 예술 전문 작가)
    포토그래퍼
    Owen Kolasinski
    포토
    Zak Kelley(전시), Farah Sosa(공연)
    COURTESY OF
    KUKJE GALLERY, MOCA LA, THE LA PHIL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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