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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관한 초단편소설_편혜영 ‘너머의 소리’

2026.05.08

가족에 관한 초단편소설_편혜영 ‘너머의 소리’

집에 돌아가면 나는 딸이 된다. 할머니는 천국에 갔지만 여전히 나의 할머니다. 오늘 우연히 만난 당신과도 가족이 될지 모른다. 여러 세대의 소설가들이 가족에 관해 쓴 초단편소설 8편.

너머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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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늘 드라마를 본다. 성공을 위해 가난한 아내를 버리고 총각인 척 재벌가와 결혼한 남자가 나오거나 비슷한 이유로 가족을 버린 남자에게 복수하려는 여자가 나오는 드라마. 덕분에 나도 하루 종일 절규와 분노로 가득 찬 배우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나마 건강 프로그램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다. 혈당 스파이크나 관절염에 좋은 음식 얘기를 줄곧 듣는 것보다야 가족이 파탄 나는 드라마가 낫다. 언젠가 할머니가 나이 들면 죽어야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몸을 챙기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다.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마음에도 없으면서. 그렇게 대꾸하며 웃은 사람은 노인복지관에서 나온 생활지원사 아주머니다.

아주머니는 매달 한 번씩 할머니를 찾아온다. 집에 들어오면 아주머니는 정신없다면서 일단 텔레비전부터 끈다. 그러면 잠시 조용해진다. 나는 그 이유로 생활지원사 아주머니를 좋아한다. 아주머니는 그다음 간단히 청소를 하고 할머니가 쌓아놓은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 버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할머니가 약을 잘 먹고 있는지 확인하고, 안 먹은 약이 있으면 잔소리를 하고, 다리와 이는 아프지 않은지, 똥은 제때 잘 누는지 등등을 끊임없이 묻는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두 사람은 언제나 소리를 질러야 한다. 생활지원사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들려요? 하고 확인하는 말이다. 그러면 할머니는 늘 안 들려, 하고 대답한다. 영 말이 안 통하는 듯해도 할머니는 아주머니가 집에 가겠다는 말은 단번에 알아듣는다. 할머니는 매번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고 아쉬워한다.

할머니는 혼자다. 할머니에게는 그 흔한 쿠팡도 오지 않고 배민도 오지 않는다. 대신 한 달에 한 번씩 생활지원사 아주머니가 온다. 역시 한 달에 한 번씩 병원 도우미 아저씨도 온다.

같은 드라마를 보거나 듣기 때문에 하루 종일 할머니와 함께 있는 기분이지만, 나도 혼자다. 나에게는 거의 날마다 쿠팡과 배민이 온다. 생활지원사 아주머니나 도우미 아저씨는 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독거노인만 방문하지, 독거 청년에게는 관심이 없다.

집에 틀어박힌 지 6개월이 조금 넘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나갔다가 온 후로 집에만 있었으니, 아는 사람을 만난 지는 9개월쯤 된 셈이다. 그날 친구들을 못 만나고 돌아왔다. 한 친구는 몸이 아파 꼼짝 못하겠다 했고, 한 친구는 회사에 급한 회의가 잡혔다고 했다.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나는 할 수 없이 파스타를 시켜 먹었다. 나는 면 요리를 싫어하는데, 친구들은 항상 파스타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돈이 아깝다 생각하며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불현듯 화가 났다. 그전에도 두 친구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약속을 미뤘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제 막 이사한 동네와 반지하 집에 대해 얘기하고, 귀가 잘 안 들려 하루 종일 최대 볼륨으로 드라마를 보는 옆집 할머니 흉도 볼 생각이었지만, 할 수 없게 됐다. 하긴, 만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친구는 회사 얘기와 남자 친구 얘기로 나보다 더 할 말이 많을 테니까.

그다음 날부터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조용히 있고 싶었으나 텔레비전 소리가 너무 방해가 됐다. 한번은 참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소리를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노크하듯 벽을 쿵쿵 친 다음 할머니, 하고 불러 사정했다. 할머니는 겨우 내 목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하며 되물었다. 그러더니 내게 밥을 먹으러 오라고 소리 질렀다. 요새는 왜 통 밥 먹으러 안 오느냐면서. 별 이상한 할머니한테 걸렸다 싶었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 이상해졌다. 3년 전,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내게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해주는 사람은 할머니가 처음이었다.

오늘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습관적으로 벽을 치며 할머니에게 소리 좀 줄이라고 소리친다. 이제는 딱히 텔레비전 소리가 거슬리지 않아도 그렇게 말한다. 뭐라고? 하고 되묻는 할머니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래야 뭐든 말하게 되니까. 내가 아무리 속얘기를 떠들어대도 할머니는 못 들으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할머니는 잠자코 있다. 시끄러운 드라마 소리만 계속 들려온다. 할머니는 화장실에 간 걸까. 옆집은 어떤지 몰라도, 이 집 화장실 바닥에는 돌로 된 빨래판이 박혀 있다. 진짜다. 처음에 집을 보러 왔을 때 그걸 보고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세입자 아주머니는 보기에는 저래도 제법 편하다고 말해줬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한 사람은 어쩌면 나 이전에 이 집에 살던 아주머니인지도 몰랐다. 할머니는 아주머니가 이사 간 걸 모르거나 까먹었을 것이다.

할머니, 볼륨 좀 줄여요. 나는 다시 소리친다. 뭐라고? 하는 말을 기대하면서. 할머니는 잠자코 있다. 나는 또 소리를 지른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조용하다. 오늘 할머니가 병원에 가는 날인가 헤아려본다. 아니다. 생활지원사 아주머니가 오기 전날이 할머니가 병원에 가는 날이다. 나는 별로 두껍지도 않은 벽을 계속 치며 할머니를 부른다. 아무래도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 목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서. 아니다. 겁이 나서. 할머니는 다리가 아파 잘 걷지도 못하고 이가 아파 음식물도 못 씹고 귀가 안 들려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생활지원사 아주머니가 다시 오려면 거의 한 달이 남았으니까.

아무래도 대꾸가 없어서 나는 주저하다가 몸을 일으킨다. 오랜만에 현관문을 연다. 시멘트 바른 마당에 햇볕을 받고 있는 작은 화분이 보인다. 라일락 화분이다. 원래 있던 것인지 그 사이 집주인이 가져다 둔 건지 모르겠다. 거기서 꽃향기가 난다. 나는 낯선 향기에 힘을 얻어 마당에 발을 내딛고 두 걸음 떨어진 옆집 현관 앞으로 간다. 나는 이번에는 문을 두드린다. 할머니 하고 크게 부른다.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다시 할머니에게 소리친다. 밥 먹으러 오라면서요. 어쩐지 울음이 나지만 힘을 내서 다시 문을 두드린다. 안에서 누군가 문 쪽으로 천천히, 그러나 잔뜩 힘을 내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나는 계속 문을 두드린다.

편혜영 편혜영은 한국문학의 든든한 기둥이다. 미스터리하고 신비한 거목으로 만든.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소설집 <아오이가든>으로 주목받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소년이로> <어쩌면 스무 번> 등을 펴냈으며,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홀> 등으로 독자층이 탄탄하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김승옥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7년에는 장편소설 <홀>로 미국 문학상인 셜리 잭슨상을 받았다.

그래도 가족

김나랑

김나랑

피처 디렉터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매번 배웁니다. 집에 가면 요가를 수련하고 책을 읽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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