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논의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내 친구들
지난 3월 중순, 서울 삼청동 일대는 가을이면 프리즈 서울에 맞춰 열리는 ‘삼청 나잇’이 몇 달 일찍 도래했나 싶을 정도로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바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의 오프닝을 맞이해 관람객은 물론 미술 작가들까지 대거 출현했기 때문인데요. 저는 이 전시가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대규모 퀴어 그룹전이라는 사실이 새삼 더 놀라웠습니다. 지난 2014년 LGBTQ+ 커뮤니티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홍콩 선프라이드 재단(재단)과 협력으로 이뤄진 이번 전시는 그간 타이베이 현대미술관(2017), 방콕 아트 앤 컬처 센터(2019), 타이쿤(2022, 홍콩)에서 열린 ‘스펙트로신테시스’ 전시 시리즈를 잇는 네 번째 에디션입니다. 재단 소장품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세대 작가들을 아우르면서, 동시대 퀴어 미술의 생생한 흐름을 ‘서울’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엮어내는 자리죠.


‘스펙트로신테시스’는 빛이 무지개색으로 분해되는 현상이자 다양성을 상징하는 ‘스펙트럼(Spectrum)’과 다른 요소들이 합성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신테시스(Synthesis)’를 결합한 단어입니다. 제목부터 퀴어성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 시선과 태도 등이 서로 격렬하게 교차하거나 연결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무려 74팀의 작가가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파트 1 ‘양면의 조개껍데기’에서는 선프라이드 재단 소장품과 소장 작가는 물론 다른 작가들의 신작까지 폭넓게 선보임으로써 ‘트랜스(Trans)’의 개념을 기존의 것을 새롭게 읽는 시도로 해석합니다. 한편 파트 2 ‘텐더: 언제든, 어디서든’에서는 한국 작가 20인과 홍콩 작가 1인의 작업으로 구성,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퀴어적 장소성을 통해 ‘한국 퀴어 미술’의 현재를 조망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퀴어 미술의 주요 계보와 한국만의 특수한 퀴어성을 동시에 살펴봄으로써 다른 사회적, 시대적 환경을 관통하는 퀴어성의 핵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아트선재센터는 미술관 건물을 통째로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솜씨를 적극적으로 발휘해왔는데요. 이번에도 맨 먼저 미술관 정면의 대형 LED 스크린과 건물 외벽 현수막에 설치된 신 와이 킨의 작업이 눈에 띕니다. 2022년 터너 프라이즈 후보로 선정된 영국 및 캐나다 출신의 이 작가는 남성용 향수를 홍보하는 광고 형식을 빌려 퍼포먼스와 서사를 통해 구축되는 정체성을 탐구하고, 세상을 향해 선언합니다. 또 마크 브래드포드가 전시 개최 전, 공간에 직접 머물면서 새로 제작한 장소 특정적 작업도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죠. 재단 소장품과 소장 작가 중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온 길버트 & 조지, 마틴 웡의 작품부터 한국 작가 김아영, 이강승의 작업까지, 갖가지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작품이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 포개지고 겹치는 풍경은 실로 흥미진진합니다.

길버트 & 조지, ‘립 타이’, 2022, 혼합 매체, 151×127×4cm.

마틴 웡, ‘미 비다 로카’, 1991, 캔버스에 아크릴, 앤티크 프레임 포함, 207×120×8.5cm.


전시를 둘러보면서 저는 그동안 퀴어적 감각과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가시화되지 못했고, 제대로 논의될 기회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퀴어 미술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실험성과 상상력은 단순히 젠더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백상연극상을 수상한 연출가 구자혜의 작업이 보여주듯, 그보다는 사회로부터 지워진 존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젠더 문제는 소외와 갈등을 야기하는 삶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다시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고민, 갈등을 지나 연대의 순간으로 순식간에 가닿습니다. 아마도 이 전시 오프닝 풍경이 서울에서 열리는 어떤 행사보다 더 뜨겁고 활기차게 느껴진 건 우리가 그간 경험하지 못한 공동체적 순간이 발현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현대미술을 추동하는 생생한 실천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낯선 타인의 서사를 나의 이야기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만큼 전위적인 순간이 또 있을까요. 전시는 6월 28일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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