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하고 성실하게,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2026.06.11

순수하고 성실하게,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유영국 작가의 전시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1세대 서양화가인 유영국 작가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인데요. 미공개작을 포함한 회화, 부조, 사진, 드로잉 및 아카이브 작품 170여 점을 통해 작가의 오랜 작업 세계를 총망라하는 자리라 규모로 봐도 최대일 겁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롭게 선보이는 ‘한국 근대 거장전’ 시리즈의 첫 프로젝트라 하는군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1916년에 태어나 한국의 근현대사, 그 어마어마한 격동기를 예술로 관통해낸 유영국의 작업 앞에서, 그리고 세월을 입은 작업을 정성스럽게 눈과 마음에 담아내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 시대에 예술가로 산다는 건 어떤 일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유학 시기 유영국(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제공

이번 전시장에서는 유영국이라는 예술가에 대한 단서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근사한 양복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의 작품부터 휠체어에 앉은 채 캔버스를 마주하고 붓을 들어 완성한 작품까지, 모두 관객을 반깁니다.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시작된 추상미술에 대한 작가의 실험부터 자연과 합일한 자신만의 추상에 당도한 생애 후반의 작업까지 함께 모아뒀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건 이것이 전통적인 회고전 형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작업을 단순히 연대기별로 나열하기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이 귀한 예술가의 삶에 동행하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는 거죠. 단순히 옛 작업실의 소파나 이젤을 갖다 놓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작가의 삶과 작업은 필연적인 조화를 이룹니다. 고향 울진의 풍경,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한 사람의 영혼, 그림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고자 한 소명 의식….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듯, 이번 전시도 사람과 작업에 경계를 두지 않습니다.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 모습.

‘산은 내 안에 있다’는 유영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기에, 이만큼 절묘한 제목도 없을 겁니다. 유영국에게 산은 그저 자연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고향이자, 풍경이자, 일상이자, 기억이자, 삶이자 추상의 본질이자, 내면의 구조이자, 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전시장에 매우 다양한 형태와 색채의 산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1950~1960년대쯤 대세였던 앵포르멜의 영향 아래 거친 질감으로 표현한 산도 있고, 점, 색, 선, 면으로 수렴되어 한없이 정제된 산도 있습니다. 실제 산을 닮은 산도 있고, 상상 속에나 존재할 법한 이상향으로서의 산도 있습니다. 직선의 아우라를 발산하는 산도 있고, 동그라미의 기운을 품은 산도 있죠. 다채로운 산을 보고 있자면, 무의식에 묻혀 있던 궁극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일평생 산을 바라본 예술가 덕분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해질 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세계까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그때가 바로 추상의 정수를 경험한 순간이 아닐까 싶군요.

유영국, ‘작품(Work)’, 1961, 25.2×35.5cm.
유영국, ‘산-Blue’, 1994, 캔버스에 유채, 260×200cm.
유영국, ‘작품(Work)’, 1989, 100×81cm.

이번 전시는 19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당시 한국 미술계를 뒤흔든 추상미술을 향한 높은 관심과 연구의 증거를 함께 제시하며, 유영국의 추상이 근대미술의 흐름과 맥락 안에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짚어내는데요. 전시의 끝 무렵, ‘절필작’으로 알려진 1999년 작품 앞에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의 추상이 결국 가닿고자 하는 데가 바로 자신의 영혼,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아버지로, 생활인으로 살다가 48세의 늦은 나이에 첫 개인전을 연 작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저 그림을 그린 화가, 수도사처럼 순수하게 성실하게 산, 예술가만이 당도할 수 있는 그곳 말입니다. 그렇기에 유영국은 평생 자신의 마음속 산을, 풍경을, 희망을 바라보고, 이를 자신의 시간으로 걸러내 추상이라는 무한의 영토에 가닿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한 예술가, 그런 그가 발견해낸 가장 숭고한 추상이 미술의 영역을 넘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감흥을 선사하는 이유입니다. 삶과 예술의 접점에 뿌리내린 유영국의 곡진한 그림 앞에서, 저는 오롯이 혼자가 되어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네, 산은 정말 내 안에 있었습니다.

유영국, ‘Work’, 1999, 캔버스에 유채, 105×105cm.

유영국, ‘Work’, 1940, 캔버스에 유채, 45×37.7cm.

유영국, ‘Work’, 1981, 캔버스에 유채, 73×61cm.

하솔휘

하솔휘

웹 에디터

2025년 4월 <보그>에서 시작했습니다. 패션 감각이 필요한 모든 분야의 글을 씁니다. 많이 듣고, 다니고, 읽고,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글을 재밌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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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윤원(미술 애호가, 작가)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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