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얼굴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展

2026.05.22

뚜렷한 얼굴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展

봄의 삼청동은 어느 때보다 활기찹니다. 나들이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삼청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 끄트머리의 뮤지엄한미에 당도하는데요. 종종 들르는 곳이지만, 올봄에는 또 느낌이 다르더군요. 지금 이곳에서는 한국 현대사진의 지평을 확장해온 네 작가의 작업이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명심(1933~2025)부터 홍순태(1934~2016), 한정식(1937~2022), 박영숙(1941~2025)까지, 이젠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삶을 관통하는 기록이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제목 아래 7월 19일까지 펼쳐집니다. 감성적인 제목 때문일까요. 인물과 자연, 기록과 성찰이라는 각각의 소명 의식을 바탕으로 전개된 옛 작가들의 오래된 작업이 눈부신 햇살 아래서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육명심, ‘강원도 강릉’, ‘백민’ 연작, 1983, Gelatin silver print

사실 전시의 대표 이미지를 우연히 만난 이상 전시장을 찾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형형한 눈빛, 단호한 입매를 한 어느 여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 바로 육명심 작가의 1983년 작 ‘강원도 강릉’입니다. 이는 오랜 시간 한국인의 정서를 뷰파인더에 담아온 작가의 ‘백민’ 연작 중 하나인데요. 한국적인 것을 탐구하던 그가 한국의 역사와 일상을 살아낸 평범한 여인의 얼굴에 주목했다는 건 너무 합당하고 또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엄청난 역사를 담은 피사체가 또 어디 있을까요. ‘백민’ 연작 중 어느 노인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 ‘경상북도 안동’도 우리 무의식에 자리한 누군가를 비추는 것 같습니다.

육명심, ‘경상북도 안동’, ‘백민’ 연작, 1983, Gelatin silver print

육명심의 인물 탐구의 에너지는 홍순태 작가의 ‘청계천’과 ‘서울’ 연작을 통한 도시 탐구로 이어집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겪어온 세월, 그 안에서 삶을 일군 이들의 숱한 사연이 낯설고도 새로운 풍경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특히 ‘청계천’과 ‘서울’ 연작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약 반세기에 걸친 도시의 변화와 재건 과정을 담아냈는데요. 이제는 잊힌 서울의 표정, 부조리하면서도 조화로운 이곳만의 복합적인 면모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서울의 풍경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재, 여기’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순간, 제3의 세계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홍순태, ‘청계천’ 연작, Inkjet print
홍순태, ‘명동’, ‘서울’ 연작, 1970, Gelatin silver print

한편 한정식 작가의 대표 연작 ‘고요’는 인물과 도시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사이를 부유하는 어떤 공기, 우리가 미처 포착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한정식은 사진을 통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담고자 한 작가인데요. 특히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길게 이어진 ‘고요’ 연작은 한국 사진의 추상 미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얼마나 정제된 시선에 기반하고 있는지, 그리고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얼마나 예술적일 수 있는지 각인시킵니다.

한정식,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 ‘고요 Ⅲ’ 연작, 1986, Gelatin silver print
한정식,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고요 Ⅲ’ 연작, 2012, C-print

전시 막바지, 한정식의 사진으로 만난 고요한 순간은 박영숙 작가의 ’36인의 포트레이트’ 연작으로 돌연 활기를 띱니다. 박영숙은 당시 여성을 둘러싼 사회 현실에 주목하며, 관습과 부조리에 자기 식대로 맞서온 이들의 존재감을 탐구했죠. 사진 속 여성들은 너무 당당해서 정말이지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유방암에 걸렸던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을 계기로 가까운 시인, 소설가, 화가, 교수 등 36명의 인물을 촬영했습니다. 여기엔 요절한 천재 여성 화가 최욱경, 연극배우 김금지 등이 포함되었는데요. 사진은 그들의 삶이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미지의 시대를 대표할 정도로 존재감이 강합니다.

박영숙, ‘최욱경, 화가’, ’36인의 포트레이트’ 연작, 1981, Gelatin silver print
박영숙, ‘김금지, 연극배우’, ’36인의 포트레이트’ 연작, 1981, Gelatin silver print

전시 제목은 정현종 시인의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고 합니다. 제목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보니, 사진 촬영이란 현재를 기록할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숨 쉬고 있는 가능성의 순간, 그 본질을 포착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더군요.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이 남긴 사진은 설사 비루하고, 우울하고, 가난한 시절에도 모든 삶의 순간은 빛날 수밖에 없음을 새삼 상기시킵니다. 전시를 둘러본 후 저는 다시 삼청로를 따라 안국역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그 길에서 마주한 모든 익명의 얼굴들이 이상할 정도로 생기 있게 다가오더군요. 예술품 안과 밖의 타인을 통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저 자신을 새삼 또렷하게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솔휘

하솔휘

웹 에디터

2025년 4월 <보그>에서 시작했습니다. 패션 감각이 필요한 모든 분야의 글을 씁니다. 많이 듣고, 다니고, 읽고,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글을 재밌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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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원(미술 애호가, 작가)
사진
뮤지엄한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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