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내 안으로 꽃과 새가 날아들었다, ‘화조미감’展

2025.05.13

내 안으로 꽃과 새가 날아들었다, ‘화조미감’展

“아기 새 소리다!” 탐조가 취미인 친구가 막 둥지를 떠난 4월의 아기 새들이 저리 목청을 높인다면서 흥분했다. 새의 연령은커녕,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그 순간은 무음이었다. 그녀가 가로수를 향해 손짓하지 않았더라면 새의 존재도, 벚꽃이 피었던 자리에 초록 잎이 무성해졌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화조미감> 전시를 보기 위해 동대구역에 내렸을 때도 빨리 복귀해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산안개 그윽이 내린 대구간송미술관 앞에서도 체험 학습 온 고등학생들보다 먼저 보겠다고 기어코 뜀박질했고.

‘화조미감’ 전시 입구에 꾸민 ‘잡화의 방’. 사진 박성재(@pbysj)

예상했겠지만, 입구에 설치된 ‘접화의 방’을 지나면서 그날의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졌다. 이번 전시를 설계한 양태오 디자이너는 접화의 방 설명에 ‘외부 환경과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문인화를 마주하도록 유도했다’고 적었다. 그 유도처럼 첫 작품, 김시의 ‘매조문향’의 새 한 마리가 예쁜 나 좀 찬찬히 보고 가라는 듯 한가로이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조도 때문인지 전시장 안쪽으로 한 발만 내디뎌도 이세계에 입성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동굴처럼 컴컴한 전시실에 작품과 캡션만 비추는 조명들이 몰입도를 높이고, 무엇보다 화조화 자체를 귀하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킨다. 실은 처음부터 의문이었다. 왜 산수화도, 인물화도 아닌 화조화를 첫 전시 주제로 선택했을까.

<화조미감>은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 후 선보이는 첫 기획전으로, 조선 시대 화조화 37건 77점을 모아 8월 3일까지 약 3개월간 진행된다. 수리 복원 후 최초 공개라는 겸재 정선의 ‘화훼영모화첩’,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화첩’을 비롯해 5만원권 속 신사임당의 ‘초충도’까지, 수준 높은 화조화를 한번에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하지만 어느 지역 박물관에서든 만날 수 있는 대중적 그림이 화조화이기도 하다. 대구간송미술관의 이랑 책임 학예사는 시대나 가치를 초월하는 꽃과 새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꽃과 새는 일상적인 존재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랑스러운 동반자예요. 저마다의 형태와 색, 향과 소리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미의 화신’이기도 하고요. 다양한 문화적 상징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옛 선인들은 화조화를 감상하며 자연의 이치를 헤아렸을 뿐 아니라 부귀영화나 자손 번영 등 일상의 행복을 염원했죠. 넓은 범주에서 인간의 탈속적 이상과 세속적 바람을 모두 충족시키는 화조화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화풍으로 발전하는데, 이러한 흐름을 이번 전시에서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화조미감’ 1부, ‘고고孤高, 화조로 그려진 이상’ – 특별 공간. 사진 박성재(@pbysj)
신사임당 ‘초충도’ – ‘수박과 들쥐’.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화훼영모화첩’ – ‘하마가자’ 두꺼비와 가지. ⓒ간송미술문화재단
‘화조미감’ 3부, ‘탐미耽美, 행복과 염원을 담다’. 사진 박성재(@pbysj)

전시는 시기에 따라 총 3부로 나뉜다. 문인화풍이 돋보이는 16~17세기, 세밀한 관찰력과 서정성이 도드라진 18세기, 길상적 의미에 장식미가 더해진 19세기까지. 시대별 대표 화가의 작품을 통해 자연스레 우리 산수의 사계절을 모두 만끽할 수 있다. 물론 전시의 중심은 역시 정선과 변상벽, 김홍도 등 대가의 화조화가 연달아 등장하는 18세기다. 사실주의 화풍을 주도했던 이들은 섬세한 표현력에 색채를 더해 자연이 지닌 생생함과 역동성을 부각했다. 다음 작품으로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자연스레 관람객들 사이가 벌어지는데, 학생들은 붉은 패랭이꽃밭에 노란 고양이를 그린 김홍도의 ‘황묘농접’ 앞에서 귀엽다며 한참을 서 있었다. 봄날 풀밭을 보는 닭 가족의 모습, 여름의 오이밭 풍경, 단풍이 곱게 든 산속의 꿩까지, 계절의 맛을 진득하게 누리는 간만의 경험이었다.

이렇게 풍경에 쉬이 빠질 수 있는 데는 공간의 몫이 크다. 매화나무 위 까치를 그린 조지운의 ‘매상숙조’는 창호지 문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문을 열면 자연 풍경이 거기 있음을, 즉 차경의 정신이 매우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전시 공간을 설계한 양태오 디자이너는 “단순히 작품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비들이 화조화를 통해 자연과 교감하며 본질을 추구한 정신적 여정을 관람객분들이 직접 체험하실 수 있도록 ‘선비의 응시와 사유의 태도’를 공간적으로 구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선비들의 시선을 유추하는 재미는 전시장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선의 ‘독서여가’ 속 초당이 전시실 내에 그대로 들어와 있는가 하면, ‘단원의 방’ 한가운데에는 ‘단원도’ 속 마당과 연못을 재해석한 구조물을 두어 김홍도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뒤로 김홍도의 ‘화조도8폭병’이 펼쳐져 있는 건 매우 상징적이다. 영모 외에는 여백으로 처리한 과감함이 시적인 정취, 빈 곳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랑 학예사는 “일반적으로 새의 뒷모습을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김홍도는 넓게 펼쳐진 여백과 화면 밖으로 날아가는 새를 즐겨 그렸습니다. 불필요한 요소를 없앤 한적한 자연에 작은 새를 중심으로 점차 퍼져나가는 여운이 그림의 한계를 벗어납니다”라며 여운의 의미를 곱씹기를 권했다.

‘화조미감’ 1부, ‘고고孤高, 화조로 그려진 이상’. 사진 박성재(@pbysj)
‘화조미감’ 2부, ‘시정詩情, 자연과 시를 품다’. 사진 박성재(@pbysj)
‘화조미감’ 2부, ‘시정詩情, 자연과 시를 품다’ – 특별 공간. 사진 박성재(@pbysj)

3부로 넘어가, 조선 말기의 탐미적 화조화가 주는 풍성함은 또 다른 맛이다. 잘 먹고 자란 통통한 병아리들이 어미 닭 옆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표현한 장승업의 ‘계포군추’나 만개한 살구나무 사이로 날아드는 제비의 모습을 담은 ‘군연농춘’은 보는 것만으로도 따스하고 행복하다.

장승업 '계포군추', 어미 닭이 병아리 떼를 먹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장승업 '군연농춘', 뭇 제비가 봄을 희롱하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이날 전시를 보며 기차 시간을 두 번이나 바꿨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두 번째는 이 꽃밭을 더 오래 거닐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럼에도 시간이 부족해 역에서 산 단팥빵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차내에 앉아 빵을 먹으며 전시 내용을 기록하는데, 문득 멀리 날아가는 백로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뛰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시절을 지나면 날아오를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저 뜀박질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닌가. “선비들이 화조화를 매개로 자연과 자신을 성찰하던 태도를 오늘날의 감상자에게 공간적으로 번역해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 양태오 디자이너의 말 그대로였다. 물론 그 짧은 관람이 내 삶을 바꿨다는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지친 일상에 잠시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이랑 학예사의 말은 확실하다. 뛰는 건 멈출 순 없지만, 속도를 늦추고 주위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김홍도 ‘향사군탄’, 사군탄으로 향하다. ⓒ간송미술문화재단

<화조미감>은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실 4에서 8월 3일까지 진행된다.

포토
박성재(@pbysj),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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