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 만한 톱 패션 디자이너들은 잘 법니다. 넉넉지 않은 통장 잔고를 걱정하는 일은 거의 없죠. 그렇기에 재산 사용처를 보면, 그들의 취향과 추구하는 이미지를 캐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용기를 삽니다. 아니면 꾸뛰르 위크에 카리브해 은신처까지 데려다줄 호화 요트, 또는 랜드마크로 구성된 부동산 포트폴리오, 베네치아 대운하의 궁전일 수도 있습니다. 선택지는 무궁무진하지만,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는 따로 있었죠. 지난 9년간 디올에서의 눈부신 여정을 마무리하며, 그녀는 고향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화려한 파리를 벗어나 웅장하고 강렬한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고향 로마로.
2020년 그녀는 ‘영원의 도시’ 로마에 자리한 역사적인 극장, ‘테아트로 델라 코메타(Teatro della Cometa)’를 매입했습니다. 딸 라켈레(Rachele), 아들 니콜로(Niccoló), 남편 파올로 레지니(Paolo Regini)의 지지 속에서 이뤄졌죠. 극장을 인수할 당시, 옛 영광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누군가 그림자에서 쇠락을 점칠 때, 키우리는 부활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상업적 성공이나 도피를 노린 것이 아니라 순수한 예술과 문화에 베팅한 겁니다.
극장에는 매혹적인 역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교황 레오 13세의 후손이자 로마의 귀족 미미 페치 블룬트(Mimì Pecci Blunt) 백작 부인이 1958년에 설립한 이 극장은 당시 문화적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녀는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등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 인물들과 교류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인사들을 자신의 살롱으로 초대한 인물이었죠.
젯셋족의 상징적 인물인 그녀는 1930년대 만 레이(Man Ray)와 협업해 순백의 무도회 ‘발 블랑크(Bal Blanc)’를 개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전설적인 파티는 로마의 빌라 알바니 토를로니아(Villa Albani Torlonia)에서 선보인 2026 디올 크루즈 컬렉션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백작 부인의 비전을 재현하기 위해 여성 게스트에게 드레스 코드를 ‘흰색’으로 전달했습니다. 백작 부인이 발 블랑크에서 요청한 것과 동일했죠.

그녀의 예술 정신은 테아트로 델라 코메타의 개막 공연에서도 되살아났습니다. 키우리는 올 화이트 타블로 비방(Tableaux Vivants, 활인화) 시리즈를 제작하기 위해 창작 팀을 모았습니다. 마리아 루이사 프리사(Maria Luisa Frisa)는 시대극 의상을 큐레이션했고, 전설적인 아틀리에 티렐리(Atelier Tirelli)에서 만들어 디올 드레스와 함께 전시했죠. 예술가 피에트로 루포(Pietro Ruffo)는 회전무대의 세트를 디자인했고, 연출가 로렌초 살베티(Lorenzo Salveti)는 공연을 지휘했으며, 작곡가 파올로 부온비노(Paolo Buonvino)는 배경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극장은 백작 부인의 세련된 살롱을 예술적으로 확장한 것이었으나, 그녀가 사망한 후 극장의 명성과 내부 공간 모두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를 되살린 건 키우리였죠. 부인의 특별한 유산에 매료된 키우리는 건축가 파비오 투디스코(Fabio Tudisco)의 도움을 받아 복원에 착수했고, 1950년대 토마소 부치(Tomaso Buzzi)가 구상한 바로크풍 궁정 극장 본연의 모습을 되살렸습니다.
디올에서의 마지막 날 밤, 부드러운 빗방울이 런웨이를 안개 자욱한 영화로 만들었고, 키우리는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로마의 테라스에서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와 그녀의 딸 라켈레 레지니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문화에 투자하는 이유, 로마라는 도시가 그녀의 비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용감하고 로마적인 모험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르고뉴의 성이나 파리의 특별한 호텔에 자원을 쏟아붓는 대신, 일반적이지 않고 훨씬 더 관대한 문화적 모험에 투자했습니다. 이 비전은 무엇에서 비롯됐고, 극장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요?
미미 페치 블룬트의 이야기에 매료됐어요. 우연이었죠. 어느 날 토마소 부치가 쓴 문서와 스케치를 발견했어요. 그는 극장 외관을 담당한 절충주의 건축가였죠. 당시 이 극장은 백작 부인의 손녀이자 작가인 가이아 데 베아우몬트(Gaia de Beaumont)가 소유한 부지의 일부였습니다. 부치의 도면은 아름다웠고, 라켈레와 제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우리는 이 특별한 여성의 놀라운 세계에 빠져들었죠. 그녀는 20세기 주요 예술운동을 거치며, 수많은 예술가와 개인적으로 교류했어요. 파리, 빌라 마를리아, 로마, 뉴욕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그들을 초대했죠.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그녀는 전적으로 자신만의 예술 공간, 즉 개인 극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처음부터 극장을 사겠다거나 운영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어요. 그저 그녀에게 계속 관심이 갔어요. 그녀의 삶은 우리가 열정을 쏟았던 예술이나 여성성, 문화 같은 주제와 맞닿아 있었고, 우리가 존경하는 많은 예술가와도 교류했죠.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국제적 예술 네트워크가 있었는데, 디올 쇼를 준비하며 조사하던 예술가들과 교차점도 많았습니다.
제가 해오던 일이었고, 개인적인 관심사였어요. 20세기 문화와 모더니즘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과도 같았죠. 정식으로 공부해본 적은 없었지만, 늘 매료되어 있었고요. 그러다 극장 건물을 인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소유주가 건물을 팔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죠. 당시에도 극장은 여전히 운영 중이었고, 정기적인 연극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실은 저와 남편이 후원자였어요. 무엇보다 그 공간이 다른 용도로 활용되거나, 특히 저렴한 소매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기존 관리자들에게 계속 맡기는 것을 목표로 했죠.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경영진이 임대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한 거예요. 그 후 건물 소유주 가족과의 협상은 꽤 복잡했습니다. 제 생각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도 많았죠. 결국 남편과 아들, 딸까지 참여했습니다. 건물을 매입한 후에는 “리노베이션해야 하지 않아?”라고 말했죠. 토마소 부치의 아름다운 원본 스케치를 발견한 후였습니다. 우리는 그 스케치에 완전히 매료됐고, 그때부터 모험이 시작됐어요. 연구와 리노베이션에만 5년을 투자했습니다. 운 좋게도 극장에서 이미 일하고 있었고, 그 역사에 열정을 가진 건축가 파비오 투디스코가 있었죠. 그와 함께 복원 작업을 진행했고요. 아주 특별한 사건과 우연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죠. 무엇보다 이 장소를 로마시에 돌려주는 아이디어가 핵심이었고요.
라켈레는 이 모험에서 어떤 점이 가장 좋았나요?
라켈레 레지니(RR) 우리는 미미의 이야기에 점점 더 매료됐어요. 시간을 초월하는 유대감으로 연결된 친척을 발견한 기분이었죠. 미미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고, 그녀가 만든 공간에 그녀의 정신을 되살릴 기회를 얻게 된 건 큰 의미였어요.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GC) 그녀의 영혼은 우리를 매료했어요. 그렇게 매혹적인 인물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정말 매혹적인 인물이었어요. 골리아르다 사피엔차(Goliarda Sapienza)의 소설 <환희의 예술(The Art of Joy)>을 읽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죠. 책을 덮고 나서 “이건 영화로 만들어야 해!”라고 말했죠. 그런데 판권이 이미 팔렸더라고요. 마리오 마르토네(Mario Martone) 감독이 올해 칸영화제에서 공개한 영화 <퓨오리(Fuori)>가 그 작품이었어요.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제게는 정말 강렬한 감정이에요.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고, 그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그 책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나는군요.
이것은 디올에서 오랜 시간 해온 창작 활동과도 밀접해 보여요. 미미 페치 블룬트의 이야기가 화룡점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은 늘 여성성, 페미니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해왔으니까요.
MGC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저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개인적이면서도 공감할 수 있고, 진실하면서도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뭔가를 말이죠. 그들의 경험을 듣다 보면 연결되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모든 여성은 극도로 복잡한 순간을 돌파하는 창의력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놀라운 회복력을 지니고 있죠. 저는 많은 여성 예술가가 창작 활동을 통해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모습에서 큰 영감을 받아요. 미래에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는 비전, 즉 감각을 전달하죠.
여성성에 대해 얘기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무엇이 이런 표현 욕구를 자극했나요?
MGC 딸 덕분이에요. 저는 본능적으로 일하는 타입이에요. 라켈레는 저와 달리 삶에 대해 분석적인 접근 방식을 가졌죠. 완전히 달라요. 그녀와 지극히 개인적인 세대 간의 대화를 나누며 많은 걸 깨달았어요. 그녀는 패션의 역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죠. 패션이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지, 제 접근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우리는 패션이 더 의미 있는 책임을 져야 했던 시기를 함께 경험했습니다.
RR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패션의 역할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어요. 패션은 늘 이미지를 생산하고, 여성성과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역할을 해왔죠. 그 무렵 엄마가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취임했죠.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성 디자이너로서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MGC 저는 여성의 몸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장인 정신’, 창작의 예술적 측면에 초점을 맞췄어요. 그건 제가 살아온 배경 때문이었죠. 우리 어머니 세대가 제게 보장해준 권리는 이미 확보됐다고 느꼈고, 그것을 당연시했어요. 펜디에서 여성과 함께 일하면서는 완전한 자유를 느꼈고요. 그래서 그런 권리는 이미 주어진 것,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제 딸도 그걸 이어받을 거라 확신했죠. 제 어머니 세대는 이미 이혼과 낙태라는 금기를 깨뜨렸으니까요. 하지만 딸과 대화하면서 ‘여성성’을 표현하는 것이 다른 차원의 복잡성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 커리어 초기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다른 시각 문화에 접근하는 것은 일종의 계시 같았어요. 우리 세대의 디자이너 대부분이 장인 정신이라는 문화를 공유했잖아요. 패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훨씬 더 추상적이었고, 여성의 몸을 대표한다는 책임감에 크게 얽매이지 않던 세대였죠.
RR 제가 했던 비판은 엄마가 더 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진 역할에 맞는 책임을 인지하기를 바라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어요. 나중에 엄마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죠. 변화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걸요. 그리고 다양한 현실과 맞부딪치는 동시에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죠.
아직도 패션 브랜드의 수장으로서 여성을 위해 디자인하는 여성은 매우 적습니다. 이건 사실이죠.
RR 가부장적 시선(Patriarchal Gaze)은 하나의 시스템이에요. 이건 모든 산업과 창작 분야에 존재합니다. 이런 가부장적 시각은 여성 스스로도 종종 무의식적으로 흡수해 내면화되어 있죠.
MGC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해요.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에 대해서요. 딸과 딸 세대가 가진 사고방식에 깊이 공감하면서 많은 것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그 시기는 패션계가 변화하고 있던, 적어도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점이었고요.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죠. 지금 우리는 많은 정보와 특정 유형의 커뮤니케이션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보와 찾을 수 있는 자료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확실히 엄청난 발전을 이뤘어요. 새로운 기술과 소셜 미디어는 이 모든 과정을 연결했고요. 간혹 지나치게 복잡하게 연결된 것 같지만,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비판적인 접근 방식을 갖도록 해주었어요. 충분히 정제되지 않은 분석이나 과도하게 단순화된 방식도 있었죠. 하지만 이 모든 건 진행 과정의 일부입니다.
패션쇼는 전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하지만, 디올에서 경험한 규모와는 정반대인 보석처럼 작고 친밀한 극장을 관리하게 됐어요. 오늘날 패션에 대해 당신은 어떤 관점을 갖고 있나요?
MGC 흥미로운 건 규모보다는 특정 수준의 프로젝트에 협업할 기회예요. 브랜드가 작든 크든 거대하든, 기회와 예산은 다르겠지만, 즐거움은 다름없어요. 아주 작은 브랜드에서 일하던 때와 거대 브랜드에서 일할 때 느끼는 즐거움은 다르지 않아요.
극장은 훨씬 작은 규모로 접근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자극적이에요. 자원이 적기 때문에 훨씬 더 창의적으로 장인 정신에 입각해 접근해야 해요.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하니까요. 예를 들면, 아티스트 피에트로 루포와 함께 무대 디자인을 할 사람을 정하고, 작은 카탈로그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고, 작은 인쇄소를 찾고, 타이포그래피를 의뢰하는 일까지요. 저는 이런 장인 정신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껴요. 젊은이들도 이런 걸 진심으로 좋아하고 열정을 느끼는 것 같고요. 저는 라켈레를 데리고 함께 일하던 장인들을 모두 만나러 갔어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과 소통하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죠.
제가 로마 출신이라서 그럴 수도 있어요. ‘함께하는 문화’가 강하거든요. 저는 함께 일한 모든 사람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어요. 어젯밤 크루즈 쇼에도 저와 함께 일하던 많은 분이 참석했죠. 저는 그분들을 곁에 두고 싶었어요. 우리가 해낸 일의 정점에서 함께 만족감을 느끼고 싶었죠.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후 어떻게 변화를 경험했나요?
MGC 저는 패션의 세대별 진화를 전부 목격했어요. 라켈레를 통해서도요. 말 그대로 패션 속에서 태어난 아이였으니까요. 아주 어릴 때 저와 함께 펜디 사무실에 갔고, 쇼룸에서 오빠와 함께 컸죠. 저는 가방 정리를 돕게 하거나 선반에 올려두게 하면서 아이들을 바쁘게 만들었어요. 남편 파올로는 로마 외곽에서 일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제 쇼룸에 데려와서 돌봤어요. 일하면서 모유 수유도 했어요. 아주 이탈리아적이죠. 가족의 영역이 직장까지 확장돼요.
또 운 좋게도 발렌티노의 창립자들, 펜디 자매들과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어요. 훌륭한 멘토였고,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었죠. 그 후 패션은 대기업 시스템으로 변모했고, 그 변화의 시기를 온전히 경험했죠.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왔어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패션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했고, 슈퍼 팝(대중문화)으로 거듭났죠.
사실 예전에는 대화가 훨씬 더 엘리트주의적이었어요. 패션에 대해 잘 아는 소수의 사람하고만 대화가 이뤄졌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관객이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어쩌면 쇼를 본 적도 없고, 컬렉션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어마어마한 노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요. 요즘 같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그 모든 이면을 설명하긴 어렵고, 피상적으로만 소비될 위험도 크죠.
이 시스템이 어디로 갈지 말하긴 어려워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모든 건 순환한다고 믿습니다. 이탈리아 드라마 <레오파드>에서 “모든 것이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그대로죠. 아마도 지금의 시스템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봐야 할 거예요. 극장에 대해서도 생각해요. 테아트로 델라 코메타는 고전적인 프로그램을 고려하지 않아요. 지속 가능하지 않거든요. 사람들이 집중하는 시간이 훨씬 짧아졌죠.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소비됩니다.
라켈레, 테아트로 델라 코메타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RR 음악에 집중할 거예요. 1958년 테아트로 델라 코메타의 초연작이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의 <마리안의 변덕(Les Caprices de Marianne)>이었어요. 모니카 비티(Monica Vitti)가 주연을 맡았죠. 실내악 콘서트도 많이 열렸어요. 그래서 음악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연극뿐 아니라 음악, 공연 예술, 무용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싶었고요. 디올에서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티브와 대화를 나누고, 플랫폼을 제공하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어요.
분야별로 여러 명의 큐레이터를 두는 것이 핵심이고요. 각 분야에 자체 큐레이터가 있다면, 프로그램 전체를 감독하는 과학·예술 자문 위원회가 구성될 거예요. 위원회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게 되고요. 관객은 6개월 동안 같은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달은 무용, 그다음 달은 음악, 이런 식으로 축제처럼 번갈아가며 공연을 즐기게 될 거예요.
MGC 이건 장기 프로젝트예요. 우리가 진짜 좋아하는 일, 즉 ‘연구(리서치)’할 수 있게 해주는 장기 프로젝트죠. 게다가 이건 정말 시대를 초월하는 프로젝트고요. 패션이 그토록 사랑하는, 말 그대로 ‘타임리스’하죠. 패션과 비교할 때 이 작업이 훨씬 더 시대를 초월합니다.
그럼 당신도 이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고 있겠군요?
RR 그녀는 이제 문화 기업가예요!
MGC 사실, 그저 비용을 충당하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다행히 남편과 아들이 도와주고 있어요. 제가 비즈니스 플랜에 정말 서툴거든요. 재정 분야는 정말이지 약해서, 지출을 더 잘 관리하려면 재정에 대해 좀 더 배워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연극 의상을 디자인할 생각은 없나요?
MGC 아니요, 지금은 의상엔 관심 없어요. 연구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팀과 함께 일하는 데 관심이 있죠.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건, 미미 페치 블룬트에 관한 책을 쓰는 거예요. 그건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에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에겐 모든 아카이브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테아트로 델라 코메타가 자체적인 생명력을 갖길 바라죠. 물론 지금까지는 제가 많이 노출됐지만, 우리만의 영역으로 묶어두고 싶지 않아요.
디올에서 수년간 함께 작업하고 공연에 참여한 분 중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거나 영감을 받은 순간이 있었나요? 함께 작업하면서 특히 즐거웠던 아티스트가 있을까요?
MGC 사실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는 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늘 팀워크가 필요하죠. 팀원들이 이런 경험에 기꺼이 참여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 모두 배우고 있으니까요.
안무가 샤론 에얄(Sharon Eyal)과 함께한 2019 디올 봄/여름 컬렉션은 정말 대단했어요. 발레 의상을 디자인하는 건 진짜 몸과 소통하는 것이었죠. 니트웨어 팀과 적절한 의상을 제작하기 위해 솔루션을 찾는 과정은 기술적이면서 감정적이고, 시각적인 경험을 모두 아울러야 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강렬했고, 모두가 그 작업에 매혹됐어요. 안무가와 함께 일한 건 처음이었고, 모두가 ‘무용’과 ‘음악’을 동시에 조율하는 쇼를 기획한다는 걸 두려워했죠. 하지만 많이 배웠고, 그 후에도 샤론의 발레 작업에 계속 참여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차나키야(Chanakya) 스쿨, 아티스트들, 바티칸에서 했던 전시,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코스믹 가든(Cosmic Garden)’이라는 부대 전시로 함께한 것도 정말 멋졌어요. 비엔날레에는 엄청난 여성들이 있었죠.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제안서 제출법도 몰랐어요. 그게 바로 모험심이죠. 성공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어쨌든 도전하고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거죠. 저는 확실히 모험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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