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이주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완벽 입문서

미래 계획이 무어냐 물으면 계획은 없고, 그저 ‘숙명 작가님처럼 사는 것’이라 말했다. 그녀는 지난 3년간 매주 목요일이면 ‘Destiny(운명)’란 이름으로 OTT 드라마와 영화의 비평 기사를 보내오는 <보그>의 보물이다. 필시 OOOO 지면이나 XX 디지털이란 이름으로 그녀의 글을 받고 있을 모든 이들이 아끼는 필자일 것이다. 고칠 것 없이 그대로 기사화할 수 있는 글을 보내는 이는 손에 꼽히고, 이숙명이란 프리랜서가 그 손에 꼽히는 이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메일은 인터넷이란 전파를 타고 발리에서 전해 들어온다. 0과 1의 세계는 우리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만들었지만, 지리상 5,100km, 비행기로 7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산다. 무려 8년 전부터 발리에서 글을 쓰며 살았다. 그리고 정확히 그녀는 나의 꿈이기도 하다. 인스타 아이디가 ‘먹고 먹고 먹고 놀고 사랑하라’였던 유치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전이나 단수 같은 불편이나 의료 시설의 열악함, 동네 사람들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 고단함 따위는 알 게 뭐야, 그저 ‘발리’와 ‘글쓰기’란 두 단어가 주는 달콤함으로 머릿속이 저릿저릿했다.
현실을 도피하면 그곳에 또 다른 현실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발리에 가서 산다고 글감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원고 청탁이 느는 것도 필시 아닐 것이다. 지금도 프리랜서 파이에는 원고지 1매를 1만2,000원에서 1만원으로 내려도 ‘내가 해내겠노라’ 손을 드는 능력 있는 저자들이 줄을 선다. 다시 말해 이숙명 정도로 글을 쓰는 사람만이 가능한 영역이라 여기며, 선망으로 삼아왔을 뿐이다. 그런 그녀가 책을 냈다. 제목이 <발리에서 생긴 일>(2025, 김영사)이다. 또래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발리란 여행지가 유행하기 전부터, 인도네시아의 지역명이란 것을 모르기 이전에 그곳은 하지원과 조인성의 땅이었으니까.
책을 덮고 나니, 이 책 제목은 ‘발리에서 생긴 일’일 수밖에 없다. 발리 이주를 결심하게 된 서울에서의 삶, 그토록 부러워했던 발리에서 집 짓기(가장 끔찍한 챕터), 발리의 시골에서 살며 저자가 겪어야 했던 문화적 충격과 환경에 대한 공포, 마지막으로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이해 못했을 공정성 없는 무질서 속 진실과 디지털 노매드라는 이름으로 외국인들이 부풀린 부동산 폭등까지, 8년간의 시간을 꼼꼼히 되짚고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그녀는 발리 인근의 섬, ‘누사페니다’에 거주한다. 처음에 한국을 떠났을 때는 우붓에서 거주한 적도 있었지만, 반려자 해리를 만나 집을 짓고 누사페니다에 정착했다. 매체에 종종 소개되었던 집을 짓기 시작한 건 2020년 말,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공사는 2021년 1월에 시작되었지만 완공된 건 16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고, 이는 약속했던 시기를 12개월 지난 시점이었다. 고장 난 수평계로 작업을 하는 바람에 문틀이 삐뚤어져 온갖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는 분노가 차올랐다. 수도 작업이 잘못되어 변기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는 나의 오래된 꿈 또한 변기 속에 함께 빠져버렸고. ‘아, 나의 숙명 언니가 꿈을 박살 냈다’고 말하고 싶지만, 맨 끝장을 덮고 났을 때 발리라는 곳을,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를 조금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스쿠터가 왜 그리 많은지, 경찰들은 외국인에게 왜 그토록 헬멧 착용을 강요하는지, 문제가 생길 때 발리인들은 왜 잠수를 선택하는지, ‘이 책의 독자는 발리에 사는 게 목표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작은 수익 창출을 꿈꾸는 개인이라고 가정을 해보자’(226p)라는 문장을 반추하며 규모 있게 꿈을 키우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러한 삶을 살아온 이가 말하는 에필로그의 ‘편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얼마나 단단하고 무거운 것인지 또한 깨닫게 된다.
떠나겠다는 결단을 실천한 이들은 많다. 그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의 이야기는 귀한 법이다. 2018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섬에서 규모 7.5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발표한 성명을 잊을 수 없다(그의 현재 평판이 어떠하든). 그는 개막식을 앞두고 벌어진 참사에 전 세계를 향해 말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인도네시아입니다.” 그 나라 사람도 아니면서 그 말에 굉장한 위안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국민들도 그랬으리라. 그때를 기점으로 발리 사랑 또한 더욱 깊어졌다. 죽음까지의 과정이 그곳에서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이었달까.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와 비슷한 위안을 받았다. 무엇인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신들의 섬은 가끔 모두를 한 번쯤은 신으로 만든다.
이숙명발리에서 생긴 일
김영사
구매하러 가기
- 포토
- Getty Images, Instagram, Yes24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