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루저를 향한 응원가, ‘트라이:우리는 기적이 된다’
실패한 운동선수가 가망 없는 팀의 감독이 되어 기적을 일궈내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며 성장한다. 스포츠 드라마의 흔한 서사다. 이 서사가 흔해진 것은 그만큼 일상에서 흔치 않은 위로, 희망, 리더십, 성취 따위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SBS, 이하 <트라이>)도 마찬가지다. 명랑 만화 같은 유머에 감동을 담아냈다.

하필 종목이 럭비라서,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도달할 수 있는 성공의 크기는 조촐하다. 한국 럭비에는 프로 리그가 없다. 실업팀은 국군체육부대 포함 5개에 불과하다. 올림픽에서는 메달은커녕 1승도 따본 적이 없다. 한국 시청자 대부분은 럭비 룰조차 모를 것이다. 주인공의 한양체고 럭비팀이 전국체전 우승을 한다 해도 그들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할 것이다. 그 암담함이 이 작품의 포인트다.
주인공 주가람(윤계상)은 한때 국가대표 럭비팀 주장이었지만 커리어의 정점에서 약물 파동으로 은퇴했다. 주인공을 변호하기 위해 치료용 약물이었다는 설명이 초반에 나올 법도 하건만, 주가람은 그저 자기가 욕먹을 짓을 했다는 식으로 세상의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가 모교인 한양체고 럭비팀 감독으로 부임하자 ‘도핑을 했던 인물이 학생을 지도해도 되는가’라는 논란이 불거진다. 럭비계 인사들도 그를 ‘약쟁이’라고 무시한다. 팀의 유망주 윤성준(김요한)은 모처럼 럭비가 부흥할 기회를 날려버린 인물로 주가람을 기억한다. 과거 주가람과 연인 사이였고, 현재 한양체고 사격팀 코치인 배이지(임세미)는 주가람이 돌연 은퇴하고 사라져버린 것에 원한을 품고 있다. 그 지경인데도 주가람은 변명으로 과거의 실책을 만회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허허실실 웃으며 실패 후의 삶을 새로 구축해간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회복 탄력성에 관한 이야기다.



업계에서 배척당하는 주가람이라도 감독으로 써야 할 만큼 한양체고 럭비팀의 상황은 최악이다. 가뜩이나 비인기 종목에 만년 꼴찌라 학생들은 진학률도 낮고 실업팀 진출 전망도 어둡다. 지원자도 없어서 선수가 한 명만 이탈해도 팀 구성이 불가하다. 기존 감독이 이웃 학교로 스카우트되어 가자 교내에서는 이참에 럭비팀을 해체하고 지원금을 풍족하게 나눠 쓰자는 의견이 나온다. 주가람의 은사인 교장 강정효(길해연)만이 럭비팀 편이다.
극 중 럭비팀은 해체 압력에 맞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체육고등학교의 목표는 엘리트 체육인 양성인데 실적 나쁜 팀을 왜 보존해야 하는가, 연령대별 경로 압박이 뚜렷한 한국에서는 실패한 체육 전공자가 설 곳이 많지 않으니 진로가 안 보이면 일찌감치 포기시키는 게 당사자에게도 좋지 않은가, 사회의 한정된 자원을 성공 가능성 높은 분야에 몰아주는 게 효율성 면에서 낫지 않은가 등의 질문이 제기된다. 이 질문들은 한국 사회의 성과 경쟁, 효율 강박, 물질주의, 생애 주기 압박 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에 대한 드라마의 답은 제목에서 드러난다.


<트라이> 2화, 만년 꼴찌에다 최근 팀 내 불화를 겪은 한양체고는 이웃 학교와 연습 경기에 나선다. 전반 내내 팀이 크게 밀리지만 주가람은 별 작전을 내놓지 않는다. 선수들이 “후반전을 이길 수는 없는 겁니까”라고 스스로 투지를 드러내자 그제야 감독이 득점 전략을 내놓는다. 경기가 속개되면 주가람의 내레이션이 오버랩된다. “날아오는 럭비공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은 안다. 럭비공이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을 가졌는지. 그래서 럭비의 득점은 ‘골’이 아니라 ‘트라이’다.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는 공을 붙잡기 위한 수많은 시도와 도전에 대한 찬사를 담아. 그러니까 럭비는 ‘결과’가 아니라 시도와 도전의 ‘과정’이다. 매 순간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덮쳐오는 태클에 굴복하지 않는 과정. 그래서 우리는 럭비를 한다.” 이건 곧 ‘그래서 우리는 럭비 드라마를 찍었다’는 제작진의 변이고, 제목에 대한 해설이다.
한편으로 이 드라마는 세상에 닳아버린 기성세대와 아직 가능성 가득한 청소년, 그리고 그들 사이에 놓인 ‘어른’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다. <트라이> 4화, 학교 측은 주가람이 스카우트한 학생의 입학을 막기 위해 시험을 제시한다. 전학생이 여러 종목 선수들과 대결해서 승리해야 입학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체력전이면 모르겠으나 양궁, 사격 같은 기술 종목에서 문외한이 기존 선수들을 꺾는 건 불가능하다. 주가람은 애들을 상대로 이렇게 치사하게 굴어야 하냐고 학교 측에 따지지만 먹히지 않는다. 이 사태를 해결하는 건 사격부 대표로 출전한 고교생 서우진(박정연)이다. 우진은 실력도 좋고 근성도 뛰어나다. 하지만 사격부 감독은 부잣집 딸인 다른 선수에게만 관심이 쏠려 있다. 냉정해 보이지만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우진은 럭비부 전학생에게 “져도 된다”고 말하는 주가람 감독의 모습을 눈여겨본다. 그러고는 드라마에서 직접 확인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대단히 멋진 방식으로 대결에서 ‘져준다.’ 왜 그랬냐는 주가람의 질문에 서우진은 답한다. “그건 감독님이 알려주세요. 저도 지금은 잘 모르겠으니까.”

저 사격 대결 에피소드와 서우진의 대사는 이 드라마가 이기는 방법보다 중요한 ‘잘 지는 방법’, 그리고 ‘져도 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알려준다. 서우진만큼이나 시청자들도 주가람이 우리를 설득해주길 바랄 것이다. 그 위안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드라마에서나 간신히 얻을 수 있는 메시지이자, 감동 스포츠 성장 드라마의 끝없는 생명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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