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부인’ 시리즈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되었다, ‘애마’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는 올해 가장 신선하고 대담한 한국 콘텐츠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꿔봤을 법한, 영화 만들기에 관한 메타드라마다. 1970년대 영화계를 풍자한 김지운 감독의 수작 <거미집>(2023)과 겹쳐 보이면서도 ‘지금 우리에게 왜 이 이야기가 필요한가’라는 고민을 담아내 한결 대중적이다.

<애마>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파급력이 큰 시리즈 <애마부인>을 실명으로 거론하고 당대 정치, 문화 코드를 충실히 고증하는 작품이다. 한편 허구의 대형 사건을 하이라이트로 삽입해 팩션의 한계를 재설정했다. 과감한 상상력은 B급 유머 감각으로도 발현된다. 극 중 영화감독 곽인우(조현철)는 <애마부인> 시나리오에서 유럽 스타일 ‘에로 그로 논센스’를 구현하려 했다고 주장하다가 톱스타 정희란(이하늬)에게 구박을 받는다. 희란은 감독이 여자를 모르는 것 같으니 에로는 포기하라며 “그로테스크와 논센스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조언한다. 희란의 제안은 드라마 <애마>에서 현실화된다. 에로 영화 만들기에 관한 드라마지만 에로틱하지 않다. 대신 기이하고 부조리한 유머가 넘친다. 남배우의 성기 ‘공사’ 장면처럼 에로 영화 제작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해주거나, 1980년대 미디어용 말씨에 담긴 허위의식을 풍자하는 직관적인 유머도 있다.
<애마>는 정희란이 아시아영화제 주연상을 받고 금의환향하면서 시작한다. 비행기에서 그가 받은 시나리오는 지문에 ‘젖가슴’이 한가득이다. 열받은 희란은 파티에서 신성영화사 대표 구중호(진선규)를 두들겨 패고 기자회견을 열어서 더 이상 노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구중호는 여배우 벗겨서 돈 벌 궁리만 하고, 어쩌다 감독이 멀쩡한 영화를 찍어오면 편집실에서 하루아침에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인물이다. 정희란과 구중호는 계약관계 때문에 영화 한 편을 더 찍어야 한다. 희란은 작가주의 감독 권도일(김종수)을 신성영화사로 데려와서 남은 한 편을 해결하려 하고, 구중호는 희란을 <애마>에 조연으로 세워서 욕보이려 한다. 한편 닭장 같은 집에 살면서 밤무대 댄서로 일하던 신주애(방효린)는 인생 역전을 위해 뭐든 할 각오로 <애마> 오디션에 응한다. 그러나 여배우의 삶은 주애의 생각보다 훨씬 험난하다.


드라마 초반은 여배우라는 종족에 대한 온갖 고정관념을 패러디한다. 희란은 카메라 앞뒤에서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안하무인 ‘썅년’이다. 제 발로 <애마> 주인공 배역을 걷어차놓고 막상 신주애가 등장하자 “누구랑 잤니? 제작자건 감독이건!”이라고 비아냥댄다. 신주애는 이를 “제작님이랑 감독님이랑 둘 중 좆은 누가 더 커요?”라고 받아친다. ‘여배우의 기싸움’은 황색 언론의 스테디셀러다.
작품이 전개되면서 관객은 그 시대 여배우들이 처한 상황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영화는 가난한 소녀 가장들이 꿈을 좇아 모여드는 곳이었고, 여배우의 노출은 돈이 되었고, 언론은 여성 연예인을 희롱거리 삼았으며, 인권의 안전장치는 시스템화되지 못했고, 권력자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정희란이 ‘간지 나는 썅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가 에로 영화에서 벗어나려는 게 단지 허영심이나 까탈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는 점이 차차 설명이 된다. 그러면서 희란과 주애 사이에도 동지 의식이 싹튼다. 그들의 연대에는 여성, 선후배 외에 예술가라는 접점이 작용한다. 극 중 희란, 주애, 인우는 핍박받고 망가지고 난도질당하더라도 영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고, 제작자 구중호는 영화를 축재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람이다. 전자는 시대가 변해도 불변하는 가치, 후자는 시대와 함께 사라져야 할 가치로 표현된다.
작품 후반 <애마>는 소문만 무성했던 군부 정권하의 성 상납 문화를 소재로 가져와서 이에 맞서는 희란의 활약을 그린다. 실존 역사를 모티브로 한 작품에 반영하기는 민감한 선택이 아닌가 싶은데, 이해영 감독은 그럴듯한 상상과 확실한 판타지를 뒤섞어놓음으로써 솜씨 좋게 논쟁을 피해간다. <애마부인> 엔딩처럼 말을 타고 도망치는 희란과 주애의 모습은 이 작품 속 난센스 코미디의 정점인 동시에, 왜 이 시대에 <애마부인>이 소환되었나에 대한 답이다.



1980년대 군부 정권은 3S 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을 추진하면서도 강력한 검열을 유지했다. <애마부인>은 통금 해제의 수혜를 받은 첫 심야 영화였다. 드라마 <애마>에서 신인 감독으로 설정된 것과 달리, 실제 <애마부인> 1편부터 3편까지 연출한 정인엽 감독은 1960년대부터 다작을 해온 베테랑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며 유럽 예술영화에 눈을 뜬 정인엽 감독은 <애마부인>에서 심한 노출 없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 가난 때문에 팔려간 호스티스물이 득세했다면, <애마부인>은 아파트에 살며 자가용을 모는 유한부인의 성적 모험을 다룬다. 드라마 <애마>에서 정희란이 연기하는 에리카는 실제 <애마부인> 1편에서 김애경이 맡은 역할로, 박정자가 더빙을 했다. 드라마에서처럼 애마에게 “봉건사상을 탈피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부추기는 역할이다. 둘 사이에는 은근한 동성애 기류도 있다. 여러모로 <애마부인>은 성인영화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었다.
문제는 <애마부인> 시리즈가 여성의 각성을 소재로 하면서도 여배우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점이다. 애마가 가부장제로 돌아가는 1편의 엔딩도 시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드라마 <애마>는 그것이 여배우들이 원한 엔딩이 아니었다고 가정하며 희란과 주애의 연대를 완성해낸다. 그들은 여성 착취 구조를 일거에 뒤집어엎거나 거기서 탈출하는 대신 기존 시스템을 약간 수정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도 계속되는 유구한 싸움의 일부이며, 오늘날 주류 영화계의 윤리의식과 여성 예술가의 지위가 1980년대와 얼마나 달라졌나를 떠올리면 주인공들의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주애와 매니저 이근하(이주영)의 관계 역시 <애마부인>의 동성애 코드에 대한 오마주이자 오늘날에도 개선점이 남은 퀴어에 대한 인식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처럼 <애마>는 험한 시대를 오롯이 개인의 기세로, 악으로, 깡으로 살아남은 여자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에는 위로와 감사를, 미래에는 응원을 보낸다. 게다가 의미를 떠나 서사와 미장센의 완성도가 모두 뛰어난 작품이다. 이해영 감독은 연출 데뷔작 <천하장사 마돈나>(2006) 직후 <애마> 시놉을 썼지만 2시간짜리 영화로 만들 자신이 없어서 방치하다가 매체가 다변화되고 자신도 유연해져서 다시 꺼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과연 TV 미니시리즈보다 짧은 6부작으로 군더더기 없는 서사를 완성했고, 영화 못지않은 품질로 1980년대 연예계를 화려하게 재현했다. 넷플릭스 구독료의 가치를 느껴볼 좋은 기회다.
추천기사
-
엔터테인먼트
'국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은 과연 아름답기만 할까
2025.11.26by 강병진
-
아트
사적이고 광대하며 야심 찬 역사의 이어받기 '보이저'
2025.12.13by 정지혜
-
여행
음악 따라 떠나는 여행, 클래식 축제 3
2025.03.21by 이정미
-
엔터테인먼트
날아오는 주먹을 끝까지 응시하는 사람들의 세계, ‘아이 엠 복서’
2025.12.04by 이숙명
-
엔터테인먼트
우리가 기다리던 웰메이드 로맨스 ‘경도를 기다리며’
2025.12.17by 이숙명
-
패션 뉴스
마티유 블라지의 첫 샤넬 공방 컬렉션에 대한 두 가지 시선
2025.12.19by 고주연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