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마지네일리아의 대화

2025.09.11

마지네일리아의 대화

낯선 이름, 미지의 영화.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일곱 번째 장편 <너는 나를 불태워>(2024)가 8월 27일 개봉했다. 영화 평론가로서 그의 영화에 관해 몇 차례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주요하게 생각했던 지점들이 있다. 그것을 이곳에 메모로, 흔적으로 남겨두고 싶다.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스틸 컷.

마티아스 영화의 재료 또는 질료

영화와 문학. 둘은 상반된 형식의 예술로 평가받으며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경합한다. 반대로, 그 긴장을 틈타 긴밀히 협력하고 상호 동거를 꾀하기도 한다. 마티아스는? 이 두 예술의 긴장을 즐기고 두 세계를 적극적으로 접속시키려 한다. 시청각적 이미지와 텍스트의 감각적인 만남. 그는 오랫동안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영화로 만들었다. <십이야>를 <비올라>(2012)로, <한여름 밤의 꿈>을 <허미아와 헬레나>(2016)로, <자에는 자로>를 <이사벨라>(2020)로. 각색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영화가 된 희곡이랄까. 적극적이고 색다른 번안 작업이랄까. 그렇게 셰익스피어 세계를 일단락 지으며 그는 새로운 텍스트와 만났다. 이탈리아의 작가 체사레 파베세의 희곡 소설집 <레우코와의 대화>,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바다 거품’ 챕터가 주효했다. 신화 속 요정들이 등장하고, 대화의 주인공들이 가늠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비가시적 존재, 님프. 이를테면 여성 시인 사포와 님프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가 마티아스의 귓전을 맴돈다. <너는 나를 불태워>는 그로부터 시작됐고, 그것으로 완성된 영화다.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스틸 컷.

마티아스의 의도 또는 욕망

마티아스는 자신이 읽은 파베세의 책, 사포의 시편, 각주 등을 스크린 위에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로 써 내려가고 싶어 한다. 영화라는 방식과 형식으로 그들의 책, 시, 각주를 함께 읽어보자고 제안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너는 나를 불태워>의 본질이자 본령, 이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 활용 방식, 형식이 곧 ‘영화-쓰기’, ‘영화-읽기’다. 관객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야 이 텍스트를 읽게 할 것인가, 라는 고민의 흔적이 있다.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를 전하는 배우 마리아 비샤르, 가브리엘라 사이돈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얼굴 없이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여성 내레이터, 그 밖의 여성들의 존재가 교차한다. 이 영화 앞에서 전통적 의미의 ‘영화를 본다’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영화를 읽는다’고 해야 더 적확할 것이다. ‘시네마토그래피(Cinematography)’, 말 그대로 영화로 쓴 영화, 그 실행이자 실천으로서의 영화다.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스틸 컷.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스틸 컷.

이것은 ‘유령의 영화’, ‘포말의 영화’

‘이야기를 하는 이 여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야기를 하는 이 여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유령이에요. 이건 유령 영화예요. 그들은 절벽 끝에서 죽음 이후에 대화를 나누는 거죠. 이 영화는 좀 추상적이에요. 때로는 추상적일 필요도 있죠. 이건 시간을 구성하는 또 다른 방법이에요.’ –<마티아스 피녜이로: 방랑하는 영화, 모험하는 영화>(코프키노, 2025)

<너는 나를 불태워>에서는 지금, 이곳에는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분절된, 파편화된 형태로 새로이 구성돼 들려온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포말 같은 상태와 닮았다. 파도가 치고 부서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물거품처럼, 금세 허물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깨짐과 재건의 거듭된 운동으로서의 그것 말이다.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스틸 컷.

이것은 마지네일리아의 영화

거품, 포말, 박테리아, 미생물, 파편, 흔적, 노이즈, 흠결, 여백, 가장자리, 끄적임, 주석, 다성의 목소리 같은 존재들이 시가 되고, 음악이 되고, 영화가 돼 메아리친다.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너는 나를 불태워>야말로 이러한 울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그것을 전적으로 이해하는 마지네일리아의 영화, 영화로 쓴 마지네일리아다. 그리하여 되살아난다. 여성들이여, 영혼들이여, 님프들이여.

영화와 함께 떠오르는 두 권의 책

하나. <마티아스 피녜이로: 방랑하는 영화, 모험하는 영화>(코프키노, 2025)

마티아스를 국내에 소개한 영화 수입, 배급사 시네마토그래프와 영화 서적을 출간하는 코프키노가 <마티아스 피녜이로: 방랑하는 영화, 모험하는 영화>(코프키노, 2025)를 엮어 펴냈다. 마티아스에 관한 리뷰, 비평, 그와의 인터뷰, 그가 직접 쓴 영화에 관한 글 모음이다. 마티아스 본인이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는 영화와 영화인에 관한 글도 직접 썼다.

둘.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김지승, 마티, 2025)

‘“여백(Margin)에 있는 것들”이란 의미에서 파생된 마지네일리아는 책의 여백에 남기는 표식, 주석, 메모, 삽화, 분류할 수 없는 반응의 흔적들을 총칭한다. (…) 예상 가능하겠지만 초기에는 마지네일리아의 주체와 연구 대상이 남성 철학자와 작가, 그 계승자에 한정되었다. 그들이 마지네일리아를 사용하는 방식과 가치를 주요하게 유통하고 축적하는 동안 가장자리의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은 새로운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 여백, 가장자리, 곁, 빔, 소외 등 마지네일리아가 내포하는 의미가 그것을 실천하는 위치와 맥락까지 결정하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언어에서 소외된 이들이 마지네일리아라는 공간에서 중심과 가장자리, 텍스트와 주석, 인쇄된 공적 매체와 손으로 쓴 사적 메모 등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위의 책, 9~10쪽)

책을 읽다가 든 생각이나 질문을 책 여백에 글로 남겨본 적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마지네일리아 거주자다. 경계 안팎의 유동적 위치성을 체현하는 작가이자 독립 연구자 김지승의 신간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는 ‘여성적 읽기로 여백을 쓰다’라는 부제처럼 여백에 쓴 글이 여성의 목소리와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확장해왔는지 전한다. 공식, 주류, 중심의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여성 주체, 존재의 고유한 역사를 여백, 빈 곳에 아로새긴다. 이것은 그들의 생생하고 치열한 흔적, 시간, 역사다.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는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그것의 영화적 실천이다.

관객이자 독자인 나는 비슷한 시기에 ‘읽은’ 영화와 책이 나라는 존재, 매개, 역사를 통해 서로 이어지고 접속하고 만나는 듯해 신기하고 반갑다. 이것이 영화와 책으로 나누는 대화, 영화와 책의 대화가 아니겠는가. 바다 깊숙한 곳에서 되살아나 이곳에 온 님프, 요정, 유령, 서로 다른 시공간의 여성 저자들의 기묘한 만남이 아니겠는가. 마지네일리아 거주자의 교신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김지승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친애하는 책장 친족들’, 줄여서 ‘ㅊㅊㅊ.’ 나는 그렇게 느낀다.

  • 김지승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2025,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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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티아스 피녜이로, 마르셀로 알데레테, 문성경, 한성민, 노성욱 외 4명마티아스 피녜이로: 방랑하는 영화, 모험하는 영화

    (2025, 코프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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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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