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옷에 묻히는 것을 원치 않아요” – 이와이 료타
미니멀하면서도 섬세한 오라리의 옷은 입는 사람의 분위기까지 재단한다. 도쿄 쇼룸에서 오라리의 수장 이와이 료타를 만나 급변하는 패션계에 흔들리지 않되 유연한 취향을 이야기했다.

요지 야마모토와 준야 와타나베를 지나 한국에서도 뜨겁게 사랑받을 만큼 초국가적 매력을 지닌 일본인 패션 디자이너를 꼽는다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캐피탈을 이끌게 된 키로 히라타, 꾸뛰르적 미학을 갖춘 느와 케이 니노미야의 디자이너 케이 니노미야, 빈티지의 굳건한 아름다움을 믿는 비즈빔의 수장 나카무라 히로키 등 수많은 인물이 주변 패션 에디터의 입에서 등장했지만 끝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대상은 오라리(Auralee)의 창립자 이와이 료타(Iwai Ryota)다. 이와이 료타가 만든 옷은 은은한 매력으로 모두의 호감을 쉽게 사며, 온갖 시대의 유행 속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을 것 같은 타임리스한 힘을 지녔다. 이동휘와 봉태규 등 옷 좀 입는다는 남자 셀러브리티들이 자기만의 ‘오라리 컬렉션’을 자랑했으며, 그들의 패션을 눈여겨보는 국내 패션 피플은 일본 여행을 계획할 때 오라리를 떠올렸다. 모두가 소재와 실루엣을 중시하는 오라리를 멋지게 착용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주는 희열이 얼마나 값진 것이기에 그랬을까.
2015년 탄생한 오라리가 한 편의 영화 같은 컬렉션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다른 브랜드와 조금 다르다. 오키나와 바다, 바나나 속살, 사그라져가는 노을빛 등 오라리만의 감성이 깃든 직물을 먼저 제작한 뒤 이 원단을 가장 근사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실루엣의 옷을 한 피스씩 완성해나간다. 패턴메이커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와이 료타는 이렇다 할 컨셉을 정하기 전에 만족할 만한 원단부터 제작하는 방식을 10년 동안 고수해왔다.
“사람이 옷에 묻히는 것을 원치 않아요. 클래식한 브이넥 니트 한 장도 그 사람이 연출하는 분위기에 따라 매 시즌 다른 매력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믿고요. 빼곡한 옷장에서도 무심코 손이 가는 옷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절제와 특유의 감성이 녹아 있는 오라리의 옷은 파리 컬렉션에서 가장 서정적인 스토리를 들려준다. 2023 가을/겨울 시즌 테마는 ‘어느 평범한 날의 아침’이었다. 막 잠에서 깨어 외투와 머플러를 무심히 걸치고 집 앞 편의점으로 향하는 사소한 일상을 담았다. 핏기 없는 얼굴의 모델들이 허리에 패딩을 두른 채 슬립온을 신고 런웨이를 빠져나오자 탄성이 쏟아졌다. 2024 가을/겨울 시즌은 ‘집으로 가는 길’을 주제로 서사를 펼쳤다. 퇴근 후의 일상을 고대하며 귀가하는 도시인의 모습을 표현했는데, 주름진 수트 위에 두꺼운 외투를 걸친 모델들은 목에 사원증을 걸고 세탁소에서 막 찾아온 셔츠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미학과 견고한 스토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오라리의 수장 이와이 료타를 직접 만나 급변하는 패션계에서 단단하되 유연한 행보를 보일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평소 선호하는 스타일이 궁금하다.
물론 매일 이렇게 오라리로만 스타일링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촬영을 위해 직접 만든 오라리 셔츠와 팬츠를 입었지만 평소에는 빈티지 의상도 자주 착용한다. 오래된 빈티지 데님과 워크 웨어를 좋아하는데, 보호색처럼 익숙한 아이템에 깨끗하고 말간 분위기가 느껴지는 새 옷을 매치하는 것이 좋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나?
정해진 루틴에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20년 전 구입한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아틀리에로 출근한다. 페달을 밟는 동안 미묘하게 달라지는 주변에서 영감을 얻고,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가게에서 구입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컬렉션 준비로 바쁜 날에는 저녁에도 같은 도시락을 먹곤 한다. 퇴근하면 집 근처에 있는 대중탕에 가서 몸을 담근다. 목욕탕에 갈 수 있는 날이 가장 무난하고 행복한 날이다.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팬층을 키웠다.
새로운 아이템이 들어올 때마다 매장을 찾는 한국 고객을 보며 우리 옷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실감한다. 브랜드를 시작할 때부터 해외 첫 진출은 한국이길 바랐는데, 감사하게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 오라리의 옷은 색감이 아주 독특하고, 말쑥한 실루엣이라 아시안에게 특히 잘 어울리는데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미감이 뛰어난 한국에서 뜨거운 관심을 보내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급변하는 트렌드를 좇지 않고 매 시즌 일관성 있는 컬렉션을 선보이는 점이 인상적이다.
패턴메이커로 처음 패션 산업에 뛰어들었지만 트렌드에 대해 별로 신경 써본 적은 없다. 트렌드를 일부러 거스르겠다는 뜻은 아니고, 패션이란 언제나 개성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순간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며 디자인하는 편이다. 컬렉션을 준비할 때도 규칙에 얽매이기보다는 그때그때 기분에 맞춰 예뻐 보이는 걸 찾아서 만든다. 매 시즌 눈에 띄는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컬렉션의 시작점에서 디자인에 앞서 원단에 집중한 계기는?
10년 전 처음 오라리를 시작할 때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에 집중해보자고 결심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중시하는 소재에 공을 많이 들인다. 원단 자체에서 높은 완성도가 느껴지는 원재료를 찾기 위해 몽골, 페루, 뉴질랜드 등지로 소싱을 떠나고,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원하는 직물을 개발하려 한다. 촉감이나 질, 컬러가 만족스러운 원단을 먼저 제작한 다음 소재가 가장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실루엣을 구상하는 방식이 내게 잘 맞다. 진정성을 가지고 원단을 대하는 자세 덕분에 우리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얻었다.
다른 브랜드와 협업한 컬렉션도 이슈였다. 파트너를 정하는 기준은?
서로의 브랜드 철학에 공감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마케팅만 염두에 두고 이슈가 될 것 같은 브랜드와 손을 잡는 건 지양한다. 예를 들어 뉴발란스는 내가 늘 착용해온 신발이라 디자인 결이 우리와 맞다고 여겼고, 가방 브랜드 아에타(Aeta)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이끄는 브랜드였다. 아이반(Eyevan) 아이웨어 역시 오랜 시간 인연을 이어온 소중한 친구라 따로 호흡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테클라(Tekla)는 개인적인 호감으로 작업해보고 싶던 차에 친근한 대화와 만남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됐다. 모자 브랜드 키지마 타카유키(Kijima Takayuki) 역시 10대 때부터 착용한 애착 브랜드다.
‘오라리’ 하면 일본 특유의 미니멀리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브랜드를 이끌며 한 번도 ‘일본다운 것’을 고려해본 적은 없다. 국적이나 시대성이 느껴지지 않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론칭하고 10년이 지난 뒤 사람들이 우리 브랜드를 “지극히 일본다운 브랜드”라고 표현하는 걸 듣고 ‘아차!’ 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일본 문화와 가치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구나 싶었다. 절제되고 소박한 분위기, 간결함, 조용하고 겸손한 사고방식 등 여러 요소가 결국 가치관으로 이어지고 브랜드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다.
주로 어디에서 디자인 영감을 얻나?
친한 친구나 동료들이 옷을 입는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예를 들어, 어떤 날에는 낡고 해진 록 티셔츠를 입고, 또 어떤 날에는 우아한 울 셋업을 입지만 두 모습에서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두 가지 모두 ‘그 사람답다’는 느낌이 드는 친구.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은 것도 복이다.
한국의 패션 신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일단 활기가 넘친다. 요즘에는 특히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브랜드가 많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개성 있는 한국 브랜드를 마주할 때마다 ‘정말 멋지네!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까?’ 하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 같은 브랜드는 정체성이 확실해서 근사하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한국 아티스트가 있다면?
이우환 작가와 홍상수 감독. 한국인이라는 조건을 빼더라도 두 아티스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우환 작가의 경우 미술 작품도 좋아하지만 에세이도 좋아한다. 그에게서 받은 영감이 오라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준 면도 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쌀을 씻는 이야기’ 같은 글은 서술 방식이나 표현이 형언할 수 없이 가슴에 촉촉하게 와닿았다. 몇 년 전 경매를 통해 그의 미술 작품을 구매했는데, 좋아하는 예술가의 작품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홍상수 감독은 최소한의 요소와 배우들의 대화만으로 심오한 맥락을 이어간다는 점이 볼 때마다 인상적이다. 줌인, 줌아웃이 자주 등장하는 촬영 방식과 인물들의 일상적인 대화로 이어지는 스토리 전개는 언제 봐도 좋다. 특유의 담백함에서 ‘역시 홍상수!’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브랜드를 전개한 지 10년이 지났다. 실감하나?
지금까지 거창한 목표를 정해두고 브랜드를 운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저 눈앞의 일을 성실히 해왔고, 그러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기념 컬렉션조차 만들지 않고 조용히 10주년을 보냈다. 유난스럽지 않은 것이 오라리답다고 느낀다.
앞으로 오라리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연간 판매 목표를 세우지 않고, 브랜드의 몸집을 더 키울 욕심도 없다. 지금까지 신뢰를 쌓아온 사람들과 함께 더 좋은 옷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다. 무엇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옷을 고객에게 선보이며 매 시즌 한 걸음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게 목표다. 눈에 띄게 새로운 걸 시도하기보다는 우리의 키에 맞는 균형을 유지할 것이다. 다만 오라리의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해외에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VK
J ISSUE
한국과 일본이 수교 60주년을 맞았다. 가깝고도 먼 우리지만 대중문화에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생해왔다. 〈보그〉가 주목한 동시대 일본 문화 예술인들이 간극을 더 좁혀가리라 믿는다. 배우 안도 사쿠라, 영화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배우 히다카 유키토, 종합 격투기 선수 미우라 코타, 뮤지션 크리피 너츠, 소설가 무라타 사야카, 아트 디렉터 요시다 유니, 패션 디자이너 이와이 료타가 K에 보내는 J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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