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내내 ‘미샤 바튼’ 스타일을 고집할 이유

지난 주말, 의도치 않게 ‘미라클 모닝’을 실천했습니다. 일찍 잠에서 깬 강아지가 산책을 갈구하며 발톱으로 방문을 긁어댄 탓이었죠. 겨우 눈을 뜨고, 좁은 침실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인 옷들을 헤치다 눈에 들어온 데님 스커트와 프레피 그린 라코스테 폴로셔츠를 집어 들었습니다.
문밖에서 강아지가 점점 악마 같은 소리를 냈지만, 잠시 무시하고 거울 앞에 섰습니다. 그때 문득, 개 산책을 위해 대충 걸친 이 룩이 사실 마리사 쿠퍼(Marissa Cooper)의 전성기 스타일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요. 이제는 명작의 반열에 오른 드라마 <더 O.C(The O.C)>에서 미샤 바튼(Mischa Barton)이 연기했던 마리사 쿠퍼 말이에요. 2000년대 오렌지 카운티 스타일, 즉 미국 상류층 틴에이저 패션의 정석을 보여준 캐릭터죠.
그래서 저는 산책을 하며 마리사 쿠퍼 코스프레를 하기로 했습니다. 가진 것 중 가장 크고, 가장 촌스러운 디자이너 백을 찾아 어깨에 걸친 뒤 살짝 세상에 환멸이 난 것같이 게슴츠레한 표정을 지은 채 집을 나섰죠. 날씨 좋은 LA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10대 소녀라도 된 것처럼 말이에요. 에어팟에서는 ‘더 킬러스’의 2000년대 초반 노래들이 흘러나왔습니다.
<더 O.C> 주인공들의 나이와 그닥 차이 나지 않는 1990년대생이지만, 저는 <더 O.C>가 방영되던 시절에는 시청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저는 미국 상류층 청소년의 고민보다 ‘바비’같이 예쁜 인형이 등장하는 소녀용 애니메이션에 훨씬 관심이 많았거든요.

오렌지 카운티 청소년들의 삶에 빠져든 건 불과 몇 달 전입니다. 과할 정도로 화려하고 근사한 영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마침 미국 서부 해안가에 사는 상류층 틴에이저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을 추천받았거든요. 몇 시간 만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스토리만큼 눈에 띈 건 ‘캘리포니아 캐주얼’ 그 자체인 등장인물들의 스타일링이었어요. Y2K 감성이 트렌드가 된 지금, 참고하기 아주 좋은 스타일 교본이었죠.
예전에 저는 칼럼을 통해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Sliding Doors)>에서 볼 수 있는 캘빈 클라인 감성의 미니멀리즘이나 루카 구아다니노의 발레코어 코트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즌엔 어딘가 과장되고 연극적인 스타일에 끌리네요. 바로 <더 O.C> 속 마리사 쿠퍼의 2000년대 스타일 말이에요.

그녀는 샤넬 드레스와 낡은 신발을 매치하고, 홀리스터풍 프레피 룩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냅니다. 제게 마리사 쿠퍼는 조금 덜 미국적이고, 조금 더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찍어낸 듯 완벽하게 다듬어진 애버크롬비 모델 같은 느낌은 전혀 없죠. 약간 정돈이 안 된 듯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게 또 색다른 매력을 주잖아요. 샤넬 백, 그리고 꿈을 가진 10대 소녀라니, 그야말로 ‘핫 메스(Hot Mess)’랄까요.
마리사 쿠퍼 스타일에 푹 빠진 만큼 이번 가을 제 옷장은 못생긴 카디건과 체형에 맞지 않는 스커트, 그리고 큼지막한 로고가 박힌 커다란 디자이너 백으로 가득 채워질 것 같습니다. <더 O.C>의 의상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웰커는 영국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한 바 있습니다. “마리사가 술에 취해 차를 박살 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녀는 샤넬 드레스를 입고 있었죠. 심지어 그 옷을 입고 창문을 타고 나오는 장면도 찍었어요.” 저는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네요. “브라보!”
추천기사
-
워치&주얼리
에디터 푼미 페토와 함께한 불가리 홀리데이 기프트 쇼핑
2025.12.04by 이재은
-
뷰 포인트
피곤하면 절대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2025.03.28by 김나랑
-
엔터테인먼트
크리스틴 스튜어트 연출작 '물의 연대기', 베일 벗었다
2025.11.19by 오기쁨
-
셀러브리티 스타일
안젤리나 졸리 따라가는 마고 로비의 드레스 룩
2025.12.08by 황혜원
-
패션 아이템
올겨울 가장 쉽게 우아해지는 법, 청바지 대신 '레깅스' 입어보세요
2025.12.10by 김현유, Melisa Vargas
-
패션 아이템
짧을수록 매력적인, 2026년 유행할 치마와 드레스
2025.12.09by 안건호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