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자리를 내어주고 가장자리를 보듬는, ‘올해의 작가상 2025’
올해가 두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어김없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저에게 <올해의 작가상>전은 우리가 지금 주목해야 하는 한국 미술가들을 톺아보는 시간인 동시에 현재 예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죠. 특히 올해 선정된 4명의 작가, 김영은, 임영주, 김지평, 언메이크랩의 전시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세계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미술의 자장 안에서 풀어낸다는 겁니다. 이들은 저마다의 새로운 방식으로 그간 감춰지거나 누락되거나 소외되거나 잊힌 세계를 추적합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김영은의 전시는 소리와 청취라는 행위를 작업의 중심에 둡니다. 동서고금의 예술가들은 지금껏 ‘다르게 보기’에 열중해왔죠. 하지만 작가는 그동안 시각의 보조자 역할을 해온 청각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르게 듣기’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주류 예술에 이견을 제시합니다. 덕분에 김영은의 작업에서 소리는 엄연히 공간적이자 조각적인 매체가 됩니다. 더군다나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소리 민속지학’적 시선과 태도를 ‘이주’와 ‘번역’이라는 상황으로 풀어냅니다. 작품들을 공들여 ‘듣다’ 보면, 소리가 이토록 풍부한 감각과 서사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되죠.




김영은이 소리와 청취를 통해 공감과 이해의 장을 연다면, 임영주는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다양한 믿음을 경계 없이 구현하며 사유의 감각 영역을 확장합니다. 작가는 전시장을 ‘빈 무덤’으로 상정하고, 그 안에서 다채로운 사유, 즉 전통적 미신, 유사 과학, 종말론, 최신 기술을 통해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직조합니다. 미래도 과거도, 그렇다고 현재도 아닌 시간대로 진입하고, 현실도 내세도 아닌 장소에 머물게 되는 거죠. VR 작업이 인기라지만, 이 전시장이야말로 그 자체로 어떤 기계의 도움 없이도 상상적인 시공간, 즉 유사 VR 속 환경이 됩니다. 한 번도 볼 수 없었고, 갈 수도 없었던 그곳에 머물면서 느낀 기이한 감각의 향연이 아직 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편 김지평의 전시는 ‘전통’이라는 단어에 가려지거나 상실되었던 것들을 길어 올려 작가만의 방식으로 기립니다. 책가도, 산수화, 괴석도, 병풍, 족자, 두루마리, 화첩 등 동아시아 미술의 다양한 형식이 작가의 작업 세계 안에서 해체되고, 또 다른 형태로 태어나죠. 익숙한 전통의 틈새, 새로운 서사와 가치가 피어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존재 및 대상이 출몰합니다. 이들은 생경하지만 낯익고, 없지만 있으며, 죽었지만 탄생한 적 없습니다. 김지평의 작업에서 매번 언급되던 ‘재야의 미술’은 어쩌면 단순히 이들을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소환된 것들이 동시대와 조우하고 충돌하는 그 순간의 에너지, 즉 가능성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군요.




김지평의 새로 쓰는 전통은 바로 옆 전시장에서 펼쳐지는 언메이크랩의 더없이 낯선 풍경과 대구를 이룹니다. 최빛나와 송수연이 구성한 컬렉티브인 언메이크랩은 한국의 역사와 인공지능의 기술을 교차하며 사변적인 세계를 그려내는데요. 특히 이들의 전략 중 하나인 ‘데이터셋-팅’은 단순히 데이터셋을 정보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데이터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되묻고 그 간극의 균열을 작업에 적극 반영하는 겁니다. 그 결과 데이터는 사실 기반의 충실한 통계자료가 아니라 엉뚱하게 뒤틀린 결과물로 드러나는데요. 그것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아이러니하고, 심지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인간을 비추는 기계의 눈을 통해, 기술이 예술을 감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예술이 기술을 다시금 감각하게 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번 <올해의 작가상> 전시가 예년과 다른 점은 전시장을 천천히 거니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듯한 느낌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미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그들의 미술계’를 넘어 ‘우리의 세상’을 체험하는 거죠. 이들 4명의 작가는 우리가 매일 보는 것, 당연하다 믿는 것, 혹은 기대하고 욕망하는 바가 아니라 그것이 비껴간 언저리를 다룹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당연하다고 믿어본 적 없는 것, 기대받지 못한 바에 더욱 애정을 쏟습니다. 요즘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일까요. 가장자리에 눈을 돌리는 이들의 작업을 보며 저는 묘하게 위로받았습니다. 예술과 세상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에, 요즘 유행하는 ‘몰입형 전시’가 부럽지 않습니다.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