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트렌드

커정이 만든 향, 인류 보편의 언어

2025.12.01

커정이 만든 향, 인류 보편의 언어

‘향’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일까? 여기, 30년간 한 가지 질문을 파고든 프란시스 커정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한 장의 티켓을 건넨다.

‘뷰티 에디터’라는 직업의 매력 중 하나는 일하면서 세계적인 조향사를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프란시스 커정(Francis Kurkdjian)과의 만남은 비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는 프랑스 명문 향료 연구소 ISIPCA(Institut Supérieur International du Parfum, de la Cosmétique et de l’Aromatique Alimentaire) 출신 마스터 퍼퓨머로, 2008년에는 문화 예술 공로 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동명의 레이블 ‘메종 프란시스 커정’의 창립자이자 프랑수아 드마시(François Demachy)에 이어 2021년부터 크리스챤 디올 퍼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하며 많은 이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향수만 무려 수백 개. 24세의 젊은 나이에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장 폴 고티에 ‘르 말(Le Male)’을 시작으로 엘리자베스 아덴 ‘그린티’,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포 허’, 버버리 ‘마이 버버리’, 다비도프 ‘쿨 워터 웨이브’, 그리고 독자 레이블인 메종 프란시스 커정의 ‘바카라 루쥬 540’과 ‘아쿠아 유니버셜’ 등이 대표적이다.

언젠가 커정을 인터뷰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첫째, 그를 보면 조지 클루니처럼 거칠게 기른 수염이 눈에 띈다. 둘째, 그는 의외로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소유자다. 특히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음성을 듣고 있으면 ‘잠들기 전 침대 머리맡에서 그가 동화책을 읽어주면 어떨까?’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셋째, 조향사 대부분이 그렇듯, 그는 새로운 작품을 테스트할 때가 아니면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넷째, 그는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으며, 음악과 발레에 정통하다(열두 살, 열세 살에 파리 오페라 발레의 트레이닝 프로그램 오디션에 도전했고, 두 번 다 탈락하자 무용수의 꿈을 접었다). 다섯째, 그는 조향사를 빗대 ‘코’라고 지칭하는 것에 민감하다. 위대한 향수는 그 이상이기에 대신할 표현으로 ‘브레인’을 제시한다.

향수의 고장 프랑스에서 나고 자라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통해 향수의 민주화를 이룬 인물로 많은 명품 향수 제작을 지휘한 커정의 커리어는 아주 인상적이다. 그런 그가 향을 예술의 경지에 올린 전시를 파리 팔레 드 도쿄에서 공개했다. <Parfum, Sculpture de I’invisible(Perfume, Sculpture of the Invisible)>, 직역하면 ‘향수, 보이지 않는 조각’이다. 커정에게 ‘향수’란 그저 화장대 위에 올려놓는 예쁘장한 유리병이 아니다. 유연한 소재, 웅장한 건축물, 신비로운 물성처럼 다뤄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그는 향수 제작을 ‘오뜨 꾸뛰르’와 다름없는 예술 분야로 여기며, 그랑 팔레와 베르사유 궁전, 상하이 웨스트 번드 아트 & 디자인 현대미술 박람회 등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후각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음악과 향기를 결합해 파리 필하모닉과 몰입형 경험도 제공했다. 비눗방울, 분무기, 인공 눈, 분수, 물의 벽 등 다양한 매체와 향수를 혼합해 관람객에게 후각적 감상을 넘어 감각적 희열을 유도한다.

비즈니스 파트너인 파리 금융가 마크 차야(Marc Chaya)의 지지로 절대 후각의 소유자 프란시스 커정이 기획하고, 그랑 팔레의 수석 큐레이터 제롬 노이트르(Jérôme Neutres)가 세심하게 선별한 이번 전시는 ‘향 남자’의 30년 창작 활동을 되돌아보는 후각 회고전이기에 더 뜻깊다. 커정이 각 분야 창작자와 나눈 ‘예술적 대화’의 농밀함은 더할 나위 없다.

작은 미로를 지나 입구에 진입하면 화이트 세라믹 로즈가 전시 시작을 알린다. 첫인상은 소심하고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봉오리에 코를 가까이 대니 향은 결코 은은하지 않다. 곧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휩쓸고, 순간 이동한다. 이어질 퍼포먼스의 예측 불가한 반전을 예고하는 걸까? 레드 벨벳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베르사유 궁전이 반긴다. LED 조명 아래 스탠드는 반짝이고, 커정의 향기가 공기 중에 감돈다.

다음 설치 작품에 애칭을 붙인다면 ‘커정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적절하겠다. 예술가 얀 토마(Yann Toma)와 협업한 ‘로르 블루(L’Or Bleu)’ 존에서는 향긋한 식수를 제공한다. 맛보고 음미하는 과정에서 후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려는 이들의 기발함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때는 1999년, 개념 미술가 소피 칼(Sophie Calle)은 커정에게 ‘돈의 향기’를 담아낼 향수 제작을 의뢰한다. 종이, 금속, 꿈, 땀, 권력, 욕망과 도취의 냄새. 그리하여 탄생한 ‘로되르 드 라르장(L’odeur de L’argent)’은 ‘돈 냄새’의 쓸모를 논한다. 2003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 첫선을 보인 이 컬트 향수는 커정이 “매력적이면서도 혐오스럽다”고 묘사하며 ‘향수는 향기롭다’는 기본명제를 꼬집고 비튼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질문은 또 한 번 이어진다. 향수가 피부에 흔적을 남긴다면 어떤 모습일까?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사진가 크리스텔 불레(Christelle Boulé)의 시리즈물이 여기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일련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향이 이미지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무한대의 스펙트럼으로 빛난다. 향이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내면을 건드리고 감각의 언어로 기억되는 예술이니까.

현실을 뛰어넘는 몰입형 가상 체험 ‘에덴(Eden)’도 놓치지 말아야 할 즐길 거리다. 자연의 리듬을 VR 기기로 체험할 수 있으며, 헤드셋을 쓰면 모든 준비는 끝난다. 촉촉한 대지, 싱그러운 새싹, 갓 내린 눈, 밤 풍경, 계절의 변화가 향기의 확산, 인지, 발향 농도와 조화를 이루며 시각적 깊이를 탐험한다.

빛, 소리, 맛, 향이 어우러지는 몰입형 설치 예술 ‘감각의 연금술(L’Alchimie des Sens)’은 히트작 ‘바카라 루쥬 540’에 보내는 커정의 헌사다. 디지털 아티스트 위고 아르시에(Hugo Arcier)와 시릴 테스트(Cyril Teste)의 연출 아래, 엘리아스 크레스팽(Elias Crespin), 다비드 샬맹(David Chalmin), 카티아와 마리엘 라베크(Katia & Marielle Labèque) 자매의 창작물과 미쉐린 스타 셰프 안 소피 픽(Anne Sophie Pic)의 매콤한 풍미(사프란, 마리골드 패션프루트, 스위트 페퍼를 넣은 가늘고 긴 다크 초콜릿 바)가 화룡점정.

이뿐만이 아니다. 팔레 드 도쿄 내 소 뒤 루(Saut du Loup) 공간 한쪽에 마련한 뮤직 살롱에선 스크린을 통해 오페라 작품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특히 첼리스트이자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클라우스 메켈레(Klaus Mäkelä)가 연주한 바흐의 첼로 모음곡 2번은 후각 화음으로 번역되어 음표와 향기의 미묘한 연결성을 포착한다.

투어는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조향사의 사무실로 마무리된다. 개인 소장품으로 꾸민 이곳은 프랑수아즈 사강, 루돌프 누레예프, 이브 생 로랑을 흠모하는 예술가의 초상이자 무용, 연극, 영화, 음악 등 장르를 뛰어넘는 문화 예술에 대한 커정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역사적으로 후각이 발달한 이유는 음식을 찾고, 위기에서 탈출하고, 이성을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커정은 이번 기행을 통해 향수를 다양한 분야, 감성, 예술과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격상시켰다. 후각이 오감 중 가장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려는 듯, 예상치 못한 곳 어디서나 그의 향기가 스민다. “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정과 기억을 조각합니다. 사라지는 순간에도 존재를 남기죠. 그것이 제가 향을 예술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VK

    뷰티 디렉터
    이주현
    SPONSORED BY
    MAISON FRANCIS KURKD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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